67. 왕나나요, 왕. 나.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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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왕나나요, 왕. 나. 나!
2023.01.19.
네가 죽었으면 좋겠어.
야멸차게 뱉어놓고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그 집에서 도저히 못 지내겠어. 온통 네 향기가 넘쳐서…… 솔직히 너무 괴로웠거든. 그것도 이유라면 이유 중에 하나고…….]
대체 무슨 소리인지.
은조는 뒤척이며 재하가 한 말을 생각했다.
물론 그의 집에 한동안 머물렀으니, 특히 그녀가 사용하던 방에서야 고유의 체취라던가 화장품 향기 정도는 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은조는 평소 화장을 짙게 히는 편도 아니고 향수는 사용하지도 않는다.
향기가 좋은 핸드크림을 즐겨 바르기는 했지만 그게 오랜 시간 향기를 남기지는 않았다.
“…….”
무엇보다 그 얘기를 하던 재하의 눈빛이 마음에 걸렸다.
그는 마치 꿈속을 헤매는 사람처럼 보였다.
대체 술을 얼마나 마신 거야.
다시 몸의 방향을 바꾸던 그때, 아이의 울음소리를 들은 것이다.
다온이가 이불에 토해놓고 울고 있었다.
“아가, 괜찮아. 엄마 왔어.”
은조는 침착하게 이불부터 옆으로 치우고 아이가 놀라지 않게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어쩐지 저녁을 먹을 때 시들하더라니.
새 이불을 꺼내서 바닥에 깔고 아이를 옮겨주었는데 또 구역질을 했다.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고 얼굴이 창백했다.
나오는 게 없는데도 계속 욕지기를 하는 아이가 흐느끼지 시작했다.
그렇게 아이의 등 뒤에 높은 베개를 받쳐주고 담요를 덮어준 은조가 향한 곳이 옆집인 것이다.
.
.
“차 있지? 어디 세워뒀어? 좀 빌려줘.”
“무슨 일이야, 이 시간에. 차야 바로 아래에 있지만.”
“아이가 체했어.”
“뭐?”
재하의 얼굴도 다온이 못지않게 백지장처럼 변했다.
“놀랄 일 아냐, 119부를 정도도 아닌데 차가 필요해. 응급실 좀 가야 할 것 같아.”
“같이 가.”
“술 마셨잖아!”
“안 취했어. 아침 이후로 안 마셨어. 그래도 운전은 네가 해, 내가 아이를 안을게.”
민아가 있었다면 모르겠지만.
“그래…… 그럼.”
가방까지 들고 아이를 안기에는 역부족일 게 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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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은땀을 흘리며 축 쳐진 아이를 안은 재하는 사색이다. 곧 제 숨이 넘어갈 것처럼 애를 태웠다.
“다온이 얼굴이 너무 창백해! 은조야 속도 좀 내! 막 떨고 있다고.”
“최선을 다하고 있어, 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어. 보기보다 예민하거든. 내가 잘못해서 그런 거야. 아까 낮에, 아이가 보는 앞에서 너무 흥분해서…… 걱정 마, 괜찮아.”
은조는 룸미러로 재하를 바라보며 눈살을 구겼다.
그냥 택시를 불렀어야 했나, 잠깐 후회도 했지만 그가 단단하게 아이를 안고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재하가 아이의 얼굴 가까이에 제 귀를 대보는 것이 보였다.
숨을 쉬는지 확인하려는 게 분명하다.
“체해서 죽지 않아. 그냥 지금처럼 꼭 끌어안고 있으면 돼. 곧 도착해.”
“그…… 짜장면 때문이지? 너무 많이 먹는데 내가 말리지 않았거든…… 미안해.”
“미안하다는 소리 좀 그만해.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애들은 다 그래.”
“…….”
“이렇게 아프고 나면 또 훌쩍 커.”
대수롭지 않다는 듯 은조가 중얼거렸지만 창백해진 재하의 낯빛은 원래대로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
재하는 응급실을 벗어났지만 모자(母子)가 보이는 곳에서 강 비서와 통화 중이었다.
언제 준비해 왔는지 은조는 따듯한 물에 적신 타월로 아이의 몸을 닦아주고 있었다.
가방을 따로 챙긴 줄도 몰랐지만 몹시 침착한 그녀를 바라보는 재하는 만감이 교차했다.
너무 슬프면서도 마음 한구석은 따뜻하고, 온갖 복잡한 느낌들이 서로 부딪치고 엇갈렸다.
.
.
[일부러 많이 먹인 건 아니었어도, 어쨌든 내가 바보 같았어.]
[그래, 일부러 그런 거 아냐. 자책할 필요 없어.]
사랑할 때 상처라는 건-
받은 사람만 있지 준 사람은 없다고 누가 그랬는데.
그 말이 맞는지도 모르겠다.
은조는 내내 어쩔 줄 몰라 하는 재하를 보며, 다정하고 어렸던 그를 떠올렸다.
참, 어리고 철없었다. 우리.
되게 아픈 결말이었지만 그를 저주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도 없다.
미워할수록 자꾸 떠오르는 옛 기억은 오히려 제 살을 곪게 만들 뿐이다.
.
.
“거기서 지내지 마. 어울리지도 않는 짓 해서 여러 사람 힘들게 하지 말라고. 특히 본인.”
“내 걱정 마.”
“그래, 제발 내가 쓸데없는 걱정 좀 안 하게 해 줘! 왜 내가 그런 것까지 해야 되는데!”
은조가 목소리를 낮추며 재하에게 핀잔을 건넨 순간 나이 지긋한 의사가 젊은 의사 서넛을 달고 급하게 다가오는 게 보였다.
혹시나- 설마- 했더니, 역시나.
“권 대표님!”
백발이 성성한 의사가 먼저 허리를 접으며 손을 내밀었다.
“아, 박 원장님.”
행색이야 어쨌든 간에 원래의 권재하, 그 거만한 자세와 목소리가 쉽게 돌아왔다.
미쳐 내가.
사뭇 진지한 태도로 낮게 속삭이는 둘을 모른 척하는 은조는 메시지를 보냈다.
[미쳤어! 대체 누구를 부른 거야? 다온이 자잖아. 당장 돌려보내!]
“……?”
은조는 저를 쳐다보는 재하를 향해 잔뜩 구겨진 얼굴을 만들었다.
그리고 잠시 뒤. 아이의 상태를 약 30초간 살핀 의사는 왔던 것처럼 바쁘게 사라졌다.
“피 검사도 그렇고 별 이상 없대. 안심해.”
“으으- 그건 나도 진작부터 알고 있었던 거야. 여기 모두가 알고 있다고! 하…… 딱 여기까지만 해. 더는 못 봐줘.”
“…….”
“윤다온 보호자님!”
“네!”
간호사가 부르자 은조는 언제 사나웠나 싶게 상냥하고 빠르게 대답을 하더니 이내 사라져버렸다.
재하는 아픈 아이의 이마와 뺨을 쓸어본다.
수액을 맞고 체온이랑 안색이 돌아왔다.
원장은 아무래도 괜히 부른 듯.
“동구리, 너 이렇게 자주 아팠어? 윤은조 힘들었겠다. 아저씨가 미안해.”
“……응?”
“어, 눈 떴네! 윤다온, 괜찮아?”
“……엄마.”
“엄마 잠시 간호사 선생님 만나러 갔어. 너 체했대, 짜장면이 너무 맛있었나 보다. 기분 어때?”
고개를 가로젓는 아이가 어미를 찾는지 두리번거렸다.
“아저씨 여기 있으니까 괜찮아. 겁먹을 거 없어.”
재하는 고개를 끄덕이는 다온이의 이마와 뺨을 쓸어주었다.
축축했던 얼굴이 보송하니 혈색도 돌아와 있었다.
“……아저씨.”
“응, 왜? 물줄까?”
“아저씨가 정말 내 아빠 아니에요?”
“아…….”
“나, 아저씨 좋은데…… 이제 싫지 않아요.”
“나야 동구리 아빠 하면 좋지. 근데 엄마가 먼저 허락해야 해. 뭐든 엄마 허락이 먼저야. 어제처럼 놀이터에 갈 때도 다음에는 엄마한테 꼭 허락부터 받아. 응?”
“……네.”
“아직도 울렁거리고 토할 것 같아?”
아니- 고개를 가로젓는 아이.
“그런데 기운이 없지? 이제 말하지 말고 다시 코- 자. 자고 일어나면 아저씨가 네 침대에 옮겨 놔 줄 거야.”
얌전하게 고개를 끄덕인 다온이는 이내 고른 숨소리를 냈다.
이렇게 소중하고 예쁜데.
내가 은조에게서, 나에게서…… 뭘 빼앗은 거지.
“…….”
***
은조는 룸미러에 비친 창백한 얼굴의 재하를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아까부터 우리 다온이보다 얼굴이 더 창백한 거 모르지. 혹시 어디가 안 좋아?”
“걱정하지 마. 놀라서 그래.”
“누가 걱정을 해. 골치 아프게 만들까 봐 그러지.”
“그게 걱정하는 거 아냐?”
싱긋 웃은 재하가 검지를 입술 위에 올리며 눈짓으로 아이를 가리켰다.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에도 그는 다온이를 신생아 다루듯 품에 꼭 안고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은조는 문득, 그가 ‘우리 아기’라고 중얼거리는 걸 들은 것 같았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
“네?? 호텔 뷔페에서 회식이요? 대애박!!!”
“응, 근데 넌 고깃집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팀장님!! 호텔이라고요, 호텔! 고깃집이야 만날 가는 데잖아요. 선배님!! 대박이죠! 나 권 대표님 있는 한 JS 평생 다닐래! 너무 좋아요! 회식으로 호텔 뷔페라니!! 어머!!”
갑자기 허리를 숙인 최장미가 ‘안녕하세요’를 외쳤다.
인사하는 쪽을 보니 마침 무리를 이끌고 디자인팀 사무실 앞을 지나가는 권재하가 보였다.
은조는 그의 왼뺨에 붙어 있는 가늘고 긴 드레싱 밴드를 보고 얼른 고개를 숙였다.
어제는 정신이 없어서 몰랐는데 이제야 제가 한 짓이 떠올랐다.
“아니, 얼굴에 저게 뭐야? 대박…… 우리 대표님 꼭 잘생긴 깡패 같다. 그쵸, 팀장님? 아- 섹시해…….”
“너, 이상한 판타지 있니? 잘생긴 깡패 만나면 인생 어떻게 되는지 영화로만 봤구나.”
집에서와는 다르게 그는 평소처럼 반듯하고 빛이 났다.
뱀파이어처럼 창백한 얼굴에 붙은, 원인을 알 수 없는 반창고마저 미모를 부각시켜줄 뿐이다.
“우리 드레스 코드 맞출까요? 디자인 팀답게. 네?”
여기저기서 좋다는 반응이 흘러나왔는데 장 팀장은 ‘네가 정해 봐’ 한마디를 최장미에게 던지고 제 자리로 가버렸다.
“선배님, 뭐로 할까요? 모던 앤 시크? 블랙 앤 화이트는 너무 뻔하잖아요. 재미있는 거 뭐 없을까요? 좀 도와주세요.”
“글쎄…… 난 뷔페를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맛있게 실컷 먹자고 하면…… 편하게 입어야겠지.”
“그래!! 맛있게 실컷- 먹자고 가는 거죠!! 원피스 어때요? 드레스, 콜??”
평소에도 많이 먹는 스타일이 아닌 은조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얼마 전 민아와 쇼핑할 때 사둔 원피스도 있고, 굳이 동료들의 흥을 깨고 싶지 않았다.
***
이틀 뒤.
펠리스 호텔 24층, 콘스탄스 뷔페.
라운지 바(bar)를 겸한 장소는 도심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좋은 전망을 가지고 있었다.
“알아봤더니 여기는 해산물이 특히 맛있대요. 선배님 해산물 좋아하시잖아요. 많이 드세요. 크흐- 드레스 부럽다. 선배님 오늘 되게 예쁜 거 아시죠?”
“아, 고마워…… 장미 씨도 오늘 근사해.”
은조는 의도치 않게 입고 나온 새 옷 때문에 조금 불편했다.
어디서 났는지 민아가 굳이 입으라고 고집을 해서 입긴 입었는데 과하게 시선을 끌었다.
여자라면 모두가 부러워할 챠넬의 블랙미니 드레스.
너무 우아해서 오히려 진땀이 났다.
“근데 그 소리는 뭐야? 옆에 난리 났던데. 누구야, 연예인 누가 결혼하는 거야?”
장 팀장의 말에 최장미가 눈을 크게 떴다.
“연회장요? 에이- 팀장님 모르셨어요? 왕나나 씨 결혼하잖아요. 왕.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