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도망친 신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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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도망친 신랑
2023.01.23.
“뭐? 왕나나?? 갑자기? 허, 걘 끝까지 골 때리네.”
짧게 고개를 가로저은 장 팀장은 다시 식사에 집중했다.
“지난주에 포털에 떴었는데 모르셨어요? 일단 배부터 채우고, 구경 가요. 개발팀 직원들 전부 간다고 하던데. 드레스 너무 궁금해요. 물론 얼굴도 궁금하고. 큽.”
“들어갈 수 있대? 비공개 뭐 그런 거 아니고?”
“아뇨, 강 비서님이 가도 된다고 말씀하시는 걸 들었어요. 근데 팀장님, 모르시죠? 왕나나가 약혼녀 있던 남자를 뺏은 거래요.”
“하이구! 미친…….”
장 팀장이 또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입을 꼭 닫은 은조는 접시 위 음식을 포크로 잘게 뭉개고 있었다.
.
.
한편,
물과 탄산수만 놓고 앉아 있는 권재하.
그는 내내 멀찍이 앉아 있는 은조를 눈으로 좇는 중이었다.
“입맛이 없으실 테지만 조금이라도 드세요”
강 비서가 죽과 주스를 가지고와 재하 앞에 놓았다.
“내가 환자냐? 넌 병문안 왔고?”
역시나 까칠한 그였지만 강 비서는 별 대응을 하지 않는다. 재하가 잠을 못 잔다는 것을 알고 있다.
밥도 제대로 챙겨먹지 않고 운동은 오히려 두 배로 하고 있었다.
원래도 지방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날렵한 몸매였는데.
이제 좀 핼쑥하다 싶을 정도로 전과 확연히 달랐다.
강 비서는 상황이 점점 심각해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제대로 된 수면을 취하지 못하는 상태가 며칠, 몇 주가 되어가는 상황이다.
뉴욕에서 최고로 나빴을 때가 윤은조에게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때였다.
그 이후 2주정도 최악이었는데 그때보다 몇 배는 더하다.
그때는 ‘앞으로 어떤 경우에도 그 이름을 입에 담지 말라’는 결론을 내리고 제자리로 돌아왔었다.
하지만 지금의 권재하를 보라.
퀭한 눈으로 그녀의 모습을 한도 끝도 없이 좇는다,
이제 남들 눈도 신경 쓰지 않는다.
아니, 그럴 정신이 없겠지.
“그…… 닥터 정, 누군지 기억하시죠? 정상훈 선생님이요.”
재하가 만지작거리기만 하던 주스 잔에서 손을 뗐다.
왜냐고 묻는 눈빛이 날카롭다.
“지금 서울에 계세요.”
“상담을 받아보라? 완전 미치기 전에?”
큭큭, 권재하가 정말 미친 것처럼, 못 참겠다는 듯 눌린 웃음을 웃었다.
“아닙니다, 단지 누구에게라도 털어놓아야 한다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잖아요.”
됐어- 손을 내저은 재하가 시간을 확인했다.
“곧 시작하겠군. 조치는 제대로 취해 뒀지?”
“네, 제대로 바람 잡아 놨습니다. 제가 어쩌지 않아도 이미 다들 알고 난린걸요.”
권재하가 또, 웃겨 죽겠다는 듯 큭큭 거렸다.
“이것 보세요. 아무리 정상이라고 우기셔도, 방금 그런 행동은 비정상적이십니다!”
“야, 웃지도 못하냐? 너무 웃기잖아. 난 그 계집애가 어떤 결혼식을 꿈꿨는지 모조리 기억하거든.”
“…….”
미간을 찌푸린 강 비서는 제 귀를 손바닥으로 문지르는 재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하도 귀에 못이 박이게 떠들어 대서 말이야. 오빠, 난 결혼식을 두 번 하고 싶어. 뉴욕에서 한 번 서울에서 한 번. 오빠는? 참, 드레스는 베라 윙을 입을 거야? 들어봤지? 꽃은- 어쩌구, 샹들리에는 어쩌구, 미친X…….”
순간 눈을 꾹 감은 재하가 귀 전체를 큰 손으로 세게 문질러 댔다.
“대표님, 여기. 이 물 좀 드세요. 제발 부탁입니다.”
의자를 밀고 일어선 강 비서가 물 잔을 재하의 턱 아래까지 밀었다.
그런 강 비서를 잠시 쏘아본 재하는 결국 물 잔을 들어 입술을 적시는데.
순간 여직원 여럿이 신호라도 받은 것처럼 웅성거리며 단체로 움직였다.
.
.
“가보실 거죠?”
“글쎄.”
“챠넬을 입으시고 여기 혼자 계시겠다고요? 가요, 선배님, 네?”
망설이는 은조의 팔을 붙들고 늘어지는 최장미.
멀리서 저를 바라보는 재하의 눈길을 느낀 은조는 얼굴을 붉혔다.
“이거 챠넬인 거 어떻게 알았어?”
“선배님! 아무리 제품 디자이너지만 우리 팀원들은, 아니 여기 여자 직원들 거의 알죠. 그 시그니처 드레스를 모르겠어요? 아마, 누가 선물했는지도 대충 다 알 거고요.”
“…….”
천천히 재하에게로 향한 은조의 시선에 날이 섰다.
동생 민아는 은조보다 더 거짓말을 못 한다.
너무 비싼 건데 저한테 안 맞는다는 둥 취향이 어쩌고 말이 길어질 때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지만.
불과 몇 분 전에 깨달았다.
그 대단한 상견례가 있던 날, 배달되어왔던 검은 종이 상자를.
그러니까 지금 내가, 그가 사준 옷을 걸치고…… 하……. 하다 하다 별.
“그래, 가자. 얼마나 대단한 결혼인지 보자.”
허리를 곧게 편 은조는 보란 듯 당당하게 자리를 벗어났다.
***
“에이 시X! 이게! 응? 이게 뭐냐고!!!”
퍽- 퍽- 퍽- 드레스를 곱게 차려입은 왕나나가 부케로 벽을 갈기는 중이다.
“어머! 어머! 신부님! 갑자기 왜 이러세요?? 어머!!! 이걸 어째!!!”
핼퍼 둘이 기함을 하며 산산이 으스러진 꽃다발을 쥔 신부를 바라만 보고 있다.
앙상하게 남은 줄기에 목이 꺾인 꽃봉오리가 두어 개 간신히 달려있다.
“다른 거 가져와! 이까짓 거 더 있을 거 아냐!! 색깔이 저게 뭐냐고! 드레스랑 어울린다고 생각해? 병X들같이 눈이 다 왜 그 모양이야!!!”
그건 분명 제가 직접 고른 최고급 부케였다.
미쳐 발광을 하는 신부를 내내 참아내던 핼퍼들이 줄행랑을 치는 순간 이성자가 대기실로 들어섰다.
한눈에 봐도 상황이 뻔했지만 우아하게 한복을 차려입은 이성자는 침착하다.
“이제 곧 시작이야. 하객이 몇인데 여태껏 정신을 못 차려. 드레스도 찢어버리지, 왜.”
“엄마!!!”
“쓸데없는 짓 그만하라는 소리야. 할 만큼 하지 않았니? 이런다고 뭐가 달라져?”
금이야 옥이야 딸을 위하던 이성자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사실 말이 결혼이지 비즈니스의 연장선인 이 행사를 망나니 같은 딸이 말아먹게 둘 수는 없었다.
“아아아악!!!!”
나나가 마지막 발악을 했지만 어미의 눈빛은 더욱 차갑게 식었다.
“이제 긴말하기도 지쳤어. 남들 눈에 어떻게 보일지 네가 스스로 결정해.”
“엄마…….”
“부케 다른 것으로 준비해서 보낼 테니 곱게 모시고 있어.”
“어, 엄마……!”
나나는 등을 돌려버린 제 어미의 등 뒤에서 울상을 지었다.
하지만 흥분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의외의 손님들이 들이닥쳤다.
분명 부모님 이외에는 아무도 들여보내지 말라고 지시를 한 신부 대기실에 우르르 몰려든 사람들은.
JS 디자인팀 직원들!
꿀꺽, 숨을 삼킨 나나가 눈을 끔벅거렸다.
바닥에 흩뿌려진 꽃잎과 신부의 손에 쥐여 있는 걸레 같은 부케를 번갈아 쳐다보는 JS 직원들.
놀라서 서로 눈짓만 나누는 그들에게 나나는 짐짓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맘에 안 들어서 다른 걸 가져오라고 했어요. 아무리 봐도 드레스랑 영 안 어울리잖아요.”
목소리는 거짓되게 꾸몄을지 모르겠지만 이상한 빛으로 번질거리는 눈은 숨기지 못한다.
“근데 어떻게 들어왔어요? 아무도 못 들어오게 돼 있는데.”
“들여보내 주던데요? 아무튼, 결혼 축하해요. 마침 우리 회사 회식을 맞은편 뷔페에서 하고 있거든요.”
“뭐? 회식을? 어디서?”
왕나나의 얼굴이 보기 흉할 정도로 일그러졌다.
이게 다 무슨 소리야- 권재하, 도대체 어디까지 나를 엿 먹이려는 거야? 개새X!!!
“나나 씨, 드레스 실물이 정말 엄청나네요!”
“드레스 만요? 뭔 축하가 그 모양이야?”
나나는 멀찍이 서 있는 은조를 쏘아보았다.
하지만 그녀가 입은 고가의 드레스를 알아본 나나는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손으로 가려야 했다.
윤은조가 주인공인 자신보다 훨씬 예뻐 보였다. 간신히 참고 있는 분이 폭발할 것 같았다.
“구경 다 했음 그만 나가지? X나 짜증 나려고 하거든!”
제대로 된 축하의 말 한마디 건네지 않은 직원들은 아쉬울 것 없다는 표정으로 돌아섰다.
신부는 다시 혼자가 됐다.
.
.
같은 시각,
신랑 대기실의 차상윤은 신부와 다르게 매우 침착했다.
혼자 있고 싶다며 전부를 내보내고 소파에 퍼져 있던 그는 담배를 꺼내 물었다.
"……."
권재하는- 아니, 카일 알렉시스는 예상보다 더욱 사나웠다.
입에서 나오는 말은 새색시처럼 나긋했는데 그 눈빛에는 시퍼런 살기가 가득했다.
[긴 휴가를 보낸다 생각해요. 한 1년? 2년도 좋고. 돈 걱정 마시고.]
[그래서 내가 얻는 게 뭔데요?]
[사는 거? 숨 쉬는 거? 그쪽이 선택해요, 뭐든 상관없으니.]
죽을지 살지를 선택하라는 그는 묘한 미소까지 흘렸다.
왕나나랑 얽혀서 결국 재수가 없었다, 생각도 했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진정한 독립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썩 달갑지는 않지만 물주가 덤이지만.
“시X, X같네. 선택은 무슨, 죽으면 죽었지 왕나나랑 결혼을? 절대 못 하지.”
상윤은 태우다 만 담배를 커피잔 안으로 집어 던졌다.
***
연회장은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었다.
“맙소사, 무슨 도떼기시장인 줄…….”
놀라서 입을 떡 벌린 최장미를 본 장 팀장이 픽, 웃었다.
“도떼기시장? 우리 장미 씨 그런 말도 알아? 아휴, 난 돌아가서 술이나 한잔해야겠어. 이게 대체 무슨 짓인지 모르겠네.”
이미 돌아선 장 팀장이 손을 흔들며 사라졌다.
혼주(婚主)가 대(大) DL그룹의 회장 왕덕진이라는 게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혼잡하고 정신없는 광경이다.
경제인 정치인, 연예인 등 거물들이 총출동했는데, 문제는 기자들과 카메라의 숫자가 그들을 능가한다는 것이다.
여기저기서 터지는 카메라 플래시가 혼을 빼놓을 정도였다.
역시 자리를 벗어나고 싶은 은조가 후배의 팔을 건드리려는 순간, 팡, 팡, 팡팡팡, 팡- 수백 수천의 빛이 요란하게 번쩍거렸다.
최장미의 눈이 커졌다.
“선배님! 요즘 제일 핫한 신인 아나운서잖아요! 와- 너무 잘 생겼다! 사회를 보러 왔나 봐요! 그렇죠?? 대~박-아아! 아 정말! 왜들 이렇게 밀치고 난리야!”
“…….”
그렇게 핫한 결혼식이 정말이지 품위 없게 흘러가는 것을 은조는 지켜보았다.
“자,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주인공을 맞이하실 준비가 되셨습니까, 여러분? 네! 신랑 입장하겠습니다! 신랑, 입장!”
경쾌한 음악이 깔리고- 모두의 시선이 입구로 향했다.
“…….”
“…….”
“……?”
“신랑, 입장!!”
“……?”
“……??”
급하게 뛰어와 입구에 선 사람은 신랑이 아닌 울상이 된 헬퍼였다.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