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0. 날 원망해, 날, 때려 (70/100)


70. 날 원망해, 날, 때려
2023.01.30.



 
엉망진창 왕나나의 결혼식이 끝이 난 그날.

멀어지는 은조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재하는 결국 강 비서가 운전하는 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입을 꾹 다문 채 차창 밖만 응시하던 그는 결혼식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았다.

아파트에 도착해서는 혼자 들어가겠다고 말했지만 이미 운전석에서 내린 강 비서가 앞서서 걷고 있었다.

점점 더 성가시다.


[…….]

재하는 비서를 갈아치워야 하나 생각하며 뒤를 따랐다.

.
.



[이러고 계신다고 달라질 게 뭡니까. 이런 방법은 전혀 대표님답지 않을뿐더러, 단언하건대 문제 해결에 1도 도움이 안 됩니다. 정 여기에 계시겠다면 당장 집답게 침대나 기타 가구를…….]

역시나 빈 술병들을 모으는 강 비서가 구시렁댔지만 재하야 말로 그의 말을 1도 듣고 있지 않았다.

씻으러 간다며 알아서 사라지라는 뜻으로 손을 내저었을 뿐이다.


[대표님! 백번 이해해서 술은 그렇다 치겠습니다. 하지만…….]

쿵, 닫힌 문을 바라보던 강 비서는 또 말을 마치지 못했다.

떠든다고, 부탁한다고 말을 들을 사람도, 상황도 아니라는 걸 알아서였다.

***

이후, 권재하는 이틀 내내 출근은커녕 집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다.

역시나 강 비서가 서너 번 이상 들러 잔소리와 근심 어린 조언을 섞어서 했지만 먹힐 리 없다.

망가진 왕나나의 스토리에 대해서도 전혀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다 부질없는 짓이라는 걸 뒤늦게라도 알게 된 걸까.

하지만 후회하느냐는 강 비서의 질문에 재하는 코웃음을 쳤다.

테이블 위에 있던 두통약 두 알을 삼키는 그는 술기운이 꽤 짙어 보였다.

물끄러미 저를 바라보는 강 비서에게 천장에 달린 환한 조명을 가리켜 보였다.


[너는 왜 오자마자 불부터 켜. 죽었나 살았나 확인하게? 저, 빛 때문에 눈이 부시고 머리가 깨질 것 같다고 몇 번을 말해.]

[…….]

[그만 가서 네 볼일을 봐. 이왕이면 내 일도 네가 좀 하면 좋고. 이제 그 정도는 하지 않나? 끼고 가르친 세월이 얼만데.]

강 비서의 눈이 가늘어졌다.


[왜? 너무 정상으로 보여서 실망했냐? 가라. 하…… 부탁이야, 혼자 있고 싶으니까 제발 좀 꺼져 줘.]

[네…… 하지만.]

다시 오겠다는 말을 남긴 강 비서가 사라지자마자 자리에서 일어선 재하는 전기 차단기기 있는 곳으로 가더니 뚜껑을 열고 스위치를 내려버렸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위스키 병과 잔을 찾았다.

느릿하게 독한 액체를 입안으로 흘려 넣던 그는 이 모든 게, 제 인생이 어디서부터 잘못됐을까 곰곰이 생각했다.

동시에 잠을 좀 자고 싶다고도 생각했다.


“…….”

깨질 것 같이 무거워진 머리를 소파에 파묻은 순간, 어린 소녀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재하는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은조였다.

며칠 전에도 잠과 꿈, 그 중간 어디쯤에서 들은 가냘픈 울음소리가 또 들렸다.


“……은조야.”

이내 의식의 반 정도만 잠의 영역에 들여놓은 그는 제3자처럼 어린아이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홉 살 은조와 열 살의 권재하.

여기는…… 해바라기 언덕의 본관 뒤 창고다. 보통은 술래잡기 놀이를 할 때 은조가 잘 숨는 곳인데…….


[여기 숨어있으면 어떡해! 오늘 숀을 소개해 준다고 오빠가 말했어, 안 했어?]

턱시도를 입고 나비넥타이까지 목에 맨 열 살의 재하가 숨어 있던 소녀를 찾아냈다.


[윤은조, 자꾸 이러면 너 미국 못 간다고 했지! 오빠 봐봐! 뚝! 그만 울어!]

[…….]

여전히 브라우니를 끌어안고 있는 어린 은조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훌쩍이기만 한다.

그래…… 기억이 나네. 자선행사가 있던 날.

너를 숀에게 보여주려고 했던 날.

내가 영어 공부도 더 하고 얼마나 노력을 했는데…….

숀이 수녀님에게 말하는 걸 재하는 분명하게 들었다. 다른 사람들처럼 아이를 입양할 생각은 없다고.

하지만 그는 정기 행사가 아닌 경우에도 자주 해바라기 언덕에 들르곤 했다.

미국 대사관이 가깝기도 했지만 영민한 재하는 알았다.

그도 곧, 다른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아이들 중 누군가를 선택하고 데려가게 될 것이라는 것을.

그렇다면 그건 반드시 예쁜 은조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공주님이 될 만한 아이는 그 애뿐이니까.

그런데 이 울보는 이방인들이 오면 꼭 숨어버린다. 모두가 선물을 받지 못해 안달인데.

내가 숀에게 꼬마숙녀에 대해 이야기를 하느라 진땀을 빼는 것도 모르고 말이다.

얼마나 예쁘고 귀엽고, 똑똑한지, 그림은 또 얼마나 잘 그리는지, 조곤조곤, 그것도 영어로 길게 설명을 하는데.

‘그 애를 대려와 봐.’라는 말을 기다리는 재하는 반짝이는 까만 눈으로 한참동안 숀 알렉시스의 눈을 들여다보곤 했다.

하지만 매번 ‘어메이징’이라고 말하는 벽안의 이방인은 옅은 미소만 지었다.


[은조야, 어서 오빠랑 가자, 응? 파란 눈 본 적 없다며! 제발, 응?]

[아니…… 엄마 보고 싶어.]

고집을 피우는 은조를 간신히 창고에서 끌어냈지만 숀은 이미 돌아가고 난 후였다.

세 번째 시도였었다.


[고집쟁이! 또 망쳤잖아!]

[내가 왜 고집쟁이야! 오빠 미워! 미국이 좋으면 오빠 너나 가! 나는 엄마…… 우리 엄마 기다릴 거야! 으아앙-]

결국 또 우네. 우는 것도 되게 귀여웠는데…….

커다란 눈망울에서 떨어지는 맑은 눈물을 바라보던 소년은 하얀 뺨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래, 알았어. 울지 마. 오빠가 미안해.]

서른 하나 권재하의 손이 허공 안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내가…… 미안해.”

 

.
.

띠로로로-

‘0000’ 참 쉬운 잠금이 풀렸다.

조심스럽게 현관문을 연 은조는 집 안으로 발을 들여놓기 전, 주인을 먼저 찾았다.


“……나야. 집에 있어?”

아무런 기척이 없다. 작게 기침 소리도 내봤지만 역시 돌아오는 반응은 없다. 쥐죽은 듯 조용하다.


“……!”

복도의 센서 등까지 꺼지자 불빛 한 점 없는 새카만 공간이 되었다.

조금 겁이 나기도 했지만 일단 현관 안으로 들어선 은조는 제 집과 같은 위치에 있을 스위치를 찾기 위해 팔을 뻗었다.

달칵- 달칵, 달칵-


“어??”

달칵- 불이 켜지지 않는다.


“……윤은조?”

“악!!”

“나야, 놀랄 거 없어.”

“뭐, 뭐 하는 거야? 불은 왜 안 들어와? 거기서…… 뭐 하는 거냐고?”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자 소파에서 천천히 움직이는 커다란 인영(人影)이 느껴졌다.


“……불은 안 들어와. 차단기를 내려버렸거든.”

“차단기를? 왜? 뭐 때문에? 대체 무슨 일이야…….”

“아무 일도 아냐. 에디 때문에…… 귀찮아서…… 아무 때나 들이닥쳐서 불을 켜거든.”

“뭐?”

재하가 리모컨을 만졌는지 전동 블라인드가 스르륵 움직인다.

깜깜하던 실내에 어스레하게나마 빛이 생겨났다.


“두통이 좀 있는데…… 불빛이 있으면 좀 더 심한 것 같아서. 아니, 그냥 그 자식이 자꾸 귀찮게 들락거리는 게 꼴 보기 싫어서.”

“그래서 아예 차단기를 내려버렸다고?”

“응.”

“…….”

“좀 앉을래? 마침 물을 마시려고 했거든.”

“…….”

물을 마시려고 했다고? 설마! 조금만 더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면 죽은 줄 알았을 텐데?

반박하지 않고 멀거니 서 있는 은조를 가만히 지켜보던 재하가 거실 구석에 있던 램프의 불을 켰다.

순간 은조는 손으로 입을 막으며 터지는 탄식을 삼켜버렸다.


“앉아…… 물 가지고 올게.”

물은 은조가 아니라 권재하가 좀 마셔야 할 것 같았다.

시든 식물처럼 파리한 몰골이 어스름한 불빛 안에서 더욱 그늘을 만들고 있었다.

.
.

설명하기 힘든 심정을 담은 눈빛을 서로에게 건네며- 얼마나 말없이 앉아 있었을까.


“……권재하.”

“같이 떠나자, 아무도 없는 곳으로. 내가 모든 걸 다 되돌려 놓을게. 정말이야. 그렇게 할 수 있어.”

“그럴 수 없다는 거 알잖아. 그럴 필요도 없고. 나는 이제. 아니, 우리는 이제 그때의 우리가 아니야. 아직도 모르겠어?”

“난…… 그때 그 시간에 머물러 있어. 방금 전에 알았어.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했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고. 너도 그런 거 아니야? 너도 아직…… 아프잖아. 내 눈은 못 속여. 은조야, 내가…… 내가 노력할게. 우리 둘 다- 아니, 우리 아기까지 모두 같이 다시 행복해질 수 있어.”

……우리 아기? 은조는 재하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뭐?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취한 거야? 됐고, 나는 이미 충분히 행복해! 그래, 내 아기!! 다온이도 있고, 동생도 있어! 지난 일은 이제 정말 완전히 벗어던져 버릴 거야!”

“나 없이…… 그럴, 수 있어?”

“권재하! 너는 이미 없었어! 내가 그 응급실에서 정신이 돌아왔을 때!! 아이를…… 아기를 완전히 떠나보내야 한다는 소리를 부정하면서…… 수술을 거부했을 때! 그래서 결국!!! 다시는 아이를…… 다시는…….”

윽- 구역질을 하는 은조가 허리를 꺾으며 쓰러지듯 앞으로 몸을 접었다.


“은조야! 괜찮아?”

“괜찮아! 괜찮으니까, 건드리지 마.”

“…….”

“네가 여기서 떠나주면…….”

“…….”

“내 인생에서 완전히 사라져 주면, 더 괜찮을 것 같아.”

“난…… 그렇게 못해. 너 없이 난…… 나는…….”

“할 수 있어, 해야 해! 내가 원하니까, 그렇게 해!”

“내가 이렇게 사정할게…… 내가 뭘 어떻게 해야…….”

그 단단한 어깨가 떨리는 게 보였다.


“됐어! 제발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마!”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은조가 소리를 질렀다.


“하나도 즐겁지 않았어! 네가 마련한 왕나나 이벤트 말이야!! 왕나나는커녕 세상이 전부 무너져 내리고 산산 조각나도 내 아픔은! 내 상처는…… 흐흑…… 귀한 내 아이를 잃은…… 그날의 그 기억은 사라지지 않아! 건드릴수록 더 아프다는 걸 왜 몰라!! 네 얼굴을 보면 또 다른 상처가 생겨난다고!! 제발…… 흐으윽…….”

“…….”

“제발 내게서 사라져 줘!! 부탁이야! 흐으윽…….”

 

 
재하는 울부짖는 은조를 멍하니 응시했다.

그녀가, 윤은조가 소리를 지르며 울고 있다!

이제껏 한 번도 없는 모양으로 제 안에 있는 분노와 원망을 끄집어내고 있었다.


“그래, 더…… 소리 질러. 더 크게 울어…… 날 원망해, 날, 때려.”

권재하의 무릎이 꺾였다.

윤은조의 발아래로 무너져 내렸지만 괜찮았다.

제 눈에서 흐르는 눈물은 느끼지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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