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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잘 가. (71/100)


71. 잘 가.
2023.02.02.



 
쓰러지듯 제 앞에 무너져버린 남자를 내려다보는 은조는 더욱 흐느꼈다.


"……네가 있던 자리로, 돌아가…… 흐으흑…… 제발 내 인생에서, 그만 사라져 줘……."

소파에 주저앉은 그녀가 재하의 떨리는 어깨를 바라보며 젖은 뺨을 손등으로 밀어낸 순간.


“……!”

후두두, 잔뜩 꺾인 고개 아래로 떨어지는 눈물방울이 보였다.

이제 소리도 없이 우는 사람은 그였다.

아니, 은조가 그랬던 것처럼 눈물을 흘리며 옅은 웃음소리를 낸다.

이런 게 내가 보고 싶었던 장면인가. 다시 뺨 위로 흐르는 눈물을 훔친 은조는 저릿한 가슴 위에 손을 올렸다.

자신이 아팠던 만큼…… 아니, 그 이상 그가 아프기를 바라기도 했었다.

눈을 똑바로 마주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죽어버리라고도 말했다.

그건…… 그 정도로 간절하게 과거의 망령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뜻이었다.

나대신 네가, 그 자리에 머물면서…… 아프고 망가지기를 원하는 건 아냐……. 고개를 가로저은 은조는 양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이럴 필요 없어.”

“…….”

“이건…….”

목이 메었다.

아니라고, 오늘부로 전부 지워버리자고. 없었던 걸로 하자는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그때…… 나는 어렸어. 너무 어려서…… 그래서…….”

그의 목소리가 낯설다.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고통이, 짙게 배어 있었었다.


“너를…… 미국으로 보내겠다니…… 같은 어린애 주제에. 네 미래를…… 감히…… 그래도 부자 아버지가 생기면, 좋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숀은 부자면서도 자상하니까.”

이제 양손에 얼굴은 묻은 그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했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아버지? 숀?”

안 그래도 움츠러든 커다란 몸이 바로 고꾸라질 것처럼 더욱 말렸다.


“내가 그런 멍청한 생각만 하지 않았어도…… 우린…… 분명히, 행복했을 거야.”

“……설마.”

“우리는 같이 있었어야 했어…… 선택받는 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니었는데…….”

그는 해바라기 언덕 시절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대체 언제 적 이야기를…… 왜.

소파에서 내려온 은조는 그에게 바짝 다가가 앉았다.


“권재하…… 넌 지금 정상이 아냐. 내 말은…….”

“……아들이었을까, 딸이었을까.”

“……!”

“나, 너무 재수 없지…….”

그가 또 낮게 웃는다.

하…… 숨을 깊게 들이마신 은조는 눈가에 남아 있던 눈물을 마저 훔쳤다.

결국. 그도 제가 있던 그 어두운 자리에 서 있다.


“…….”

뉴욕, 응급실에서 눈을 뜬 은조는 수액으로 간신히 생명을 유지했다.

이제 윤은조의 인생은 끝났다고 생각하면서도 문득 문득 들던 생각.

심장을 찌르고 후벼 파던 그 생각.


[아들이었을까, 딸이었을까.]

어리석고 어리석다. 그게 무슨 소용이라고…….

은조는 지금 권재하를 통해 6년 전의 제 모습을 보고 있었다.

물론 그녀에게는 ‘최선우’가 있었다. 삶에 의지를 되찾게 도와준, 하늘이 준 인연.

그 감사한 인연 덕분에 은조는 살아서 서울로 돌아왔고, 동생을 만났다.

그런데 넌…… 너는 어쩌면 좋을까.


“돌아가. 너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로.”

“…….”

“내가, 내가 이 밤에…… 왜 여기에 왔는지 알아?”

“…….”

재하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친 순간 은조의 눈에 다시 눈물이 그득 차올랐다.


“널, 너를 걱정했어! 내가! 멍청하게 내가, 너를 걱정했다고! 정말로 죽었으면 어쩌나 바보 같은 생각에…… 흐윽…….”

끝났다고 생각했던 울음이 다시 터졌다.


“미안해, 울지 마. 오늘은…… 그만 울어.”

“흐으흑…….”

억지로 미소를 만드는 재하의 입술이 가늘게 떨렸다.


“내가, 전부 잘못했어. 너무 어리석었어.”

“아니, 그렇지 않아.”

“…….”

“우리는…….”

“……은조야.”

“그래, 우리는 그때 너무 어렸어. 그래서 서로를 놓친 거야…… 그게 다야. 내 잘못도 네 잘못도 아니야.”

“…….”

“나는 이제 그만…… 전부 잊을래. 너도, 그래야 해.”

“아니, 난…… 너 아니면…….”

자리에서 일어선 은조에게 재하가 손을 뻗었다.

그 떨리는 손을, 불안하게 흔들리는 검은 눈동자를 바라보던 은조가 작게 말했다.


“……잘 가.”

짧은 인사를 남긴 그녀는 바로 등을 돌렸다.

새로운 눈물이 차오르기 전에 그 집을 빠져나왔다.

***

다음 날 아침,

퉁퉁 부은 눈으로 출근 준비를 하는 은조의 뒤를 민아의 눈이 내내 좇았다.


“이모, 엄마 아픈가 봐.”

눈치 빠른 다온이가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한다.


“아냐, 엄마가 나쁜 꿈을 꿨다고 아까 그랬어. 다온이 이거 더 먹어.”

생선 살을 집어 아이의 밥그릇에 올려준 민아가 힐끗 은조의 눈치를 살폈다.


“언니, 밥 별로면 시리얼이라도 조금 먹고 가.”

“속이 안 좋아. 우리 강아지 많이 먹고 오늘도 즐겁게 보내.”

고개를 끄덕이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은 은조는 환기를 잘 시키라는 당부를 남기고 집을 나섰다.

현관을 나선 그녀는 엘리베이터를 대신 계단 쪽으로 빠르게 움직였다.

같은 시각, 강 비서는 1층에서 엘리베리터에 올라탔다.

.
.



“……!”

재하가 있는 집으로 들어선 강 비서의 눈이 커다래졌다.


“대표님?”

소파 아래, 바닥에 길게 누워 있는 재하의 모양이 심상치 않았다.


“카일!!”

한걸음에 재하에게 다가간 강 비서는 그가 숨을 쉬고 있는지부터 확인했다. 다행히 숨은 쉬고 있지만 굉장히 미약했다.

휴대폰을 막 꺼내 든 순간.


“……숀?”

반쯤 열린 눈이 저를 올려다본다.


"나예요, 에디. 말하지 말아요. 일단 병원으로 가야겠어요."

"……숀, 어떻게 여기에……."

침착하게 움직인 강 비서는 물을 먼저 가져왔다. 재하의 마른 입술 안으로 약간의 물을 흘려 넣고 나서 휴대폰을 열었다.

***

은조는 그날 오후에 문자 하나를 받았다.


[혹시 몰라서 알려드립니다. 대표님은 논현동 댁으로 오셨습니다.]

딱 그게 전부였다.

마치 은조의 마음을 아는 것처럼 그저 그가 당신 곁을 떠났다. 그거였다.

잘됐어. 잘 된 거야.

안심이 되면서 동시에 허탈했다.

마냥 후련해야 정상인데, 컨디션이 안 좋아서인지 앉아 있기도 힘들었다.

점심도 샌드위치 한입 베어 먹은 게 전부인데. 밥 생각은 없고 눕고 싶은 마음만 들었다.

결국 조퇴를 한 은조는 다음 날, 그 다음 날까지 심한 몸살을 앓았다.

자고 또 자고, 가끔 민아가 챙겨주는 죽이나 과일을 조금 먹고, 또 잤다.

아주 조용하고 아무 생각 없는 시간을 보냈다.

가끔 다온이가 '카일 아저씨'를 찾았지만 민아가 빠르게 아이의 관심을 다른 쪽으로 끌었다.

민아는 뭘 아는 눈치인지 은조에게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틀을 푹 쉬고 좀 편안해진 저녁, 다시 심장 철렁하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며칠 만에 밥 같은 밥을 넘기던 은조는 숟가락을 가만히 내려놓았다.


"……어디?"

"……뉴욕."

천천히 물을 한 모금 넘긴 은조는 다시 숟가락을 들었다.

예상했던 일이다.


"선우 씨랑 얘기가 됐구나?"

"응."

"예상했던 일이야. 선우 씨 정말 열심히 했더라고. 전문의 따는 거 말이야."

"응."

"결혼하면 당연히 그리 가야지."

"미안해, 언니."

"뭐가 미안해? 너 내내 그런 생각했어? 전혀 그럴 필요 없어!"

"이모, 미국 가? 나도 갈래!"

어찌나 잘 아는지. 최애인 돈가스를 먹느라 모를 줄 알았더니 귀신같이 알아들은 다온이가 끼어들었다.


"너, 너도?"

"응! 카일 아저씨 만날 거야!! 엄마, 나도 가도 되지?"

"……."

"……."

순진한 아이의 말에 자매가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
.

사과를 한입 베어 문 은조는 설거지 중인 민아와 그 옆에서 도와준다고 걸리적거리는 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민아와 선우의 사이를 알게 된 순간 이후 자주 생각했다.

어쩌면 권재하보다 윤은조를 더욱 괴롭히고 힘들게 한 문제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이제야 들었다.

최선우라는 사람.

분명히 좋은 남편, 훌륭한 아버지가 될 것이다. 민아와 아이에게…… 하늘이 준 최고의 선물일 수 있다.

언제든 닥칠 일이고 아무것도 아니라고, 속으로 다짐하고 또 했었다.

웃으며 축하해 줘야 하는 일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는데.


"……서글프네. 바보같이."

 

.
.



"같이 가자, 언니."

"……?"

"같아 가. 미안한데 우리가 마음대로 그렇게 결론 내렸어. 선우 씨는 물론 부모님들도."

잠든 아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던 은조가 옅게 웃었다.


"꿈도 야무지셔요."

"나 언니만 혼자 두고는 못가. 절대 안 가."

"그런 소리 하지 마. 내가 어린애니? 선우 씨는 하늘이 준 축복이야. 넌…… 너랑 다온이는 정말 운이 좋은 거야. 물론 나도. 이제 가족이잖아."

"……언니."

"규호 씨한테는 네가 알아서 말 잘해. 언젠가는 생부도 만나야지. 우리 다온이……."

갑자기 얼굴을 가린 은조가 흐느끼기 시작했다.


"언니!"

"……."

"울지 마, 못들은 거로 해…… 나, 안 갈래."

저를 끌어안은 민아가 울먹이자 은조의 흐느낌은 애처로운 통곡으로 변해버렸다.


"……언니, 미안해, 잘못했어."

"흐으윽……."

"부모님들이 우리 공부도 더 하라고 그러시고, 집도 구해 주신다는 거야. 안 늦었다고 하고 싶은 거 뭐든지 하라고…… 그래서 혹했어. 미안해……."

"흐윽…… 엄마……."

"……언니."

"……엄마."

엄마…… 나는 또 혼자가 될 건가 봐…… 왜 나는 이렇게 아픈 인생이야. 왜 나를 낳았어. 조금 살 만하면 뺏어가고…… 살 만하면 혼자 버려지게 만드는 세상에 왜…… 나를…….

얼마나 울었을까.

얼마나 소리죽여 통곡을 한 걸까.


"……엄마?"

언제 깼는지 다온이가 눈을 비비며 울상을 지었다.


"……아가!"

"히잉…… 엄마 왜 울어? 울지 마……."

"강아지, 엄마 좀…… 안아 줘.”

은조는 바로 달려든 아이를 품에 꼭 안았다.

힘들었고, 또 힘들지도 모르는 삶.

그럼에도 울음을 그치게 만드는, 그쳐도 되는 이유.

아이가 사랑스러운 체취로, 따듯한 체온으로 제 존재를 알렸다.

.
.

은조는 그날 밤 민아에게 모든 이야기를 털어 놓았다.

똑똑한 소년과의 추억을 시작으로, 헤어지고 다시 만나고 사랑했지만, 또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던 사연.

잃어버린 아이와. 이제 임신이 불가능하다는 것까지 전부.

담담하게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며칠 전, 그 남자를 완전히 떠나보낸 이야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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