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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끝났어 (73/100)


73. 끝났어
2023.02.09.



 
서류봉투를 집어든 재하가 서재의 문을 닫자마자 강 비서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껏 공(公)과 사(私)를 구분 짓고 움직이느라 골치 꽤나 아팠는데.


[브랜든, 무슨 일인지 내게도 알려줘.]

이제 ‘강 비서’든 친동생이나 다름없는 ‘에디 강’이든 다 집어치우고 적극적으로 나서기로 마음먹었다.


[…….]

예상대로 쉽게 입을 열지 않는다.

강 비서는. 아니, 에디는 엄중한 표정을 지으며 목소리를 깔았다.

머릿속에서 비상등이 점멸하는 중이지만 평소의 모습대로 침착함을 잃지 않는다.


[뭐, 당사자도 없는데- 그에게 직접 들어- 그런 소리는 안 통해. 카일과 나는. 아니, 우리 모두는 가족이나 마찬가지잖아. 나는 상황을 정확하게 알아야겠어.]

힐끗, 재하가 사라진 방향을 쳐다본 브랜든이 입을 열었다.


[윤은조 씨의 가방에 대해서는 전에 말해 줬지. 그런데-.]

[…….]

[내가 의외의 물건을 뒤늦게 발견했어. 굳이 핑계를 대자면 좀 바빴고, 그런- 음- 낡은? 오래 됐으니까- 아무튼, 낡고 작은 그 가방 안에…….]

눈을 끔벅거리는 브랜든이 이미 비워진 제 잔을 만지작거렸다.


[……의외? 작은 가방 안에 뭐?]

뜸을 들이는 브랜든을 바라보던 강 비서는 눈살을 찌푸리며 양 손을 세게 말았다 펴기를 반복했다.

입에 거의 담지 않는 욕지거리가 튀어나올 것 같았다.

그녀의 임신과 유산도 최악인데 대체 뭐가 더? 그런 사실들로 인해 초죽음까지 갔던 권재하를 이제 겨우 사람 모양 비슷하게 돌려놓았는데. 또?


[반지야. 다이아몬드 반지. 카일이 그녀에게 준 거겠지. 당연히 고가의 물건으로 보였어. 내 짐작보다 두 사람은 더 복잡한- 아니, 뭐라고 표현해야 하나. 내가 아직 이런 경우를 겪은 적이 없어서 말이야.]

브랜든이 슬쩍 강 비서의 눈치를 살폈다.


[복잡해! 아주 복잡하고…….]

제기랄! 낮은 탄식을 뱉어낸 강 비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워- 에디, 진정해!]

[보니까 사랑이 그런 거더라고. 특히 카일의 그것은, 복잡하고 우리 짐작보다 더 깊고, 더 아파. 내가 지켜본 바로는…… 그래.]

[에디, 너도 내게 대략이라도 얘기를 해 줘야겠는데. 사실, 내 눈에 카일의 꼴이 영 엉망이거든. 보고도 아무렇지 않은 척하느라 힘들었어! 대체 어느 정도야? 병원이라니!]

눈썹 끝을 한껏 내려뜨린 브랜든의 눈동자가 왠지 더욱 투명하고 파랗게 보였다.

북유럽 신화에나 나올법한 아름다운 얼굴의 그가 얼마나 거칠고 무시무시한 일을 하고 다니는지 아는 사람은 몇 안 된다.

다시 자리에 앉은 강 비서는 쓴웃음을 웃었다.


[브랜든, 나는…… 이런 일들도 언젠가는 추억이 되었으면 좋겠어. 우리가 보통 그렇듯 서로를 놀리는데 써먹는 그런 거 말이야.]

[그렇게 될 거야. 네가 그의 곁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잖아.]

강 비서는 재하와 은조의 어릴 적 인연, 그리고 뉴욕에서 은조가 겪은 일을 알게 된 이후 재하가 잠을 못 잤고 술로 살았다는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간 한국의 생활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브랜든은 얼마 못 가 제 겉옷과 가방을 챙겼다.


[인사도 없이 가려고?]

그의 움직임이나 거취가 일반인들의 그것과 매우 다르다는 것을 알지만 강 비서는 섭섭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밖에 나를 공항까지 데려다줄 사람이 와 있어. 아쉽지만 이만 가볼게. 에디, 카일을 부탁해.]

[……그래. 다음에 봐.]

왔던 것처럼 그렇게 문득 사라지는 브랜든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강 비서의 표정은 어두웠다.

집은 아무도 없는 것처럼 고요하기 그지없다.

이제 그만 나와야하는 것 아닌가. 들어가 봐야하나. 하…… 반지라니.


“……?”

잠깐. 반지라면…… 강 비서가 눈매를 좁혔다.

미국에서 본 기억이 있다! 물론 같은 건지 모르겠지만 언젠가 술에 취했던 재하가 주머니에서 꺼내 보여 줬는데!

돌려받았다고, 제대로 거절당했다고 했던 걸 기억한다. 당연히 윤은조 씨에게 줬다가 돌려받은 거고…….

그런데 어떻게? 반지가, 두 개였나? 그럴 리가!!!

강 비서는 재하가 있는 서재 쪽을 바라보았다.

***

L 호텔 6층, 이탈리안 레스토랑.

미리 와 있던 병현과 남희, 다온이와 민아가 은조를 맞이했다.


"오랜만이에요."

은조를 끌어안은 남희에게서는 우아하고 따뜻한 향기가 났다.

이렇게 안길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이게 바로 엄마 냄새라는 거다.

은조를 곁에서 웃고 있는 민아를 향해 밝은 미소를 지었다. 속된 말로 동생은 땡잡은 케이스다. 최선우만으로도 모자라 이런 시부모를 만나다니.


"이제 정말 말씀 편하게 하세요, 민아한테 하시는 것처럼요. 저도 딸같이 생각하신다면서요."

어디서 그런 어린애 같은 투정이 나왔는지 스스로도 놀란 은조가 얼굴을 조금 붉혔다.


"그럴, 까? 그럼 은조도 노력해 줘, 지금처럼."

남희가 잡은 은조의 손을 다정하게 토닥였다.


"아이고, 왜 내가 매번 코등이 시큰하지."

"나이 들었다는 얘기에요. 이 양반 요즘 티브이 보면서도 얼마나 자주 우는 줄 아니? 배고프지? 앉자."

"그래요 주문을 서두릅시다, 다온이 배고프지? 이리 와, 할아버지 옆에 앉자."

"네!"

씩씩하게 대답한 다온이는 병현이 꺼내준 의자에 앉았다.

.
.

포크로 스파게티를 돌돌 마는 다온이가 은조를 보고 씩, 웃었다.

병현은 먹기 좋게 썬 스테이크를 아이의 접시로 날랐다.

딱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손자를 대하는 할아버지의 모양이다.


"너무 감사한 제안인데 정말 죄송해요."

은조는 결국 공부를 더하는 게 어떠냐는 부모님들의 제안을 조심스럽게 거절했다.


"그래, 당장 가라는 건 아니니까, 천천히. 아무튼 우리 편할 대로 결론짓듯 얘기한 거는 사과를 해야 할 거 같아. 미안해."

“아니에요! 갈 수만 있다면 저한테도 큰 행운이에요. 사실 대학 졸업 즈음에는 유학 가는 친구들이 너무너무 부러웠어요. 배가 아플 정도로 부러웠는걸요. 하지만 지금은 음- 시기를 좀. 놓쳤다고 해야 할까, 저는…… 그저 민아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해요.”

“공부는 언니가 더 잘했잖아.”

“그게 언제 적 얘긴데. 넌 그냥 가만히 밥이나 먹어.”

은조는 민아를 향해 살짝 눈을 흘겼다.


“음- 내가 한마디 할게.”

포크를 내려놓고 냅킨으로 입가를 닦은 병현이 안경을 고쳐 썼다.


“생각을 많이 해봤어요, 아니, 해봤어. 나한테 선우 말고 딸이 있다면 어떨까, 은조 나이에 직장을 다니고 있고. 예전에는 이러저러해서 공부보다 일을 택한? 그런데 다시 공부를 시작한다?”

“……?”

“왜 안 돼? 나같이 든든한 아비가 있는데 뭐가 문제야!”

“그래도 제가 마음이 편하지 않아요. 선우 씨가- 이제 제부라고 불러야 하나. 아무튼 선우 씨도 꽤 검소하게 살던걸요. 민아에 저까지…… 아닙니다.”

“선우 그 녀석은 제가 원하는 대로 그렇게 사는 거고. 나, 딸 둘에 손자 하나- 정도는 좋은 거 먹이고 더 좋은 거 입히고, 공부까지 시킬 능력 되고도 남는데. 부끄럽네. 내 입으로 이런 말을 하다니, 허허.”

“여보, 당신…… 왜 갑자기 이렇게, 멋지고 그래요.”

“멋있자고 한 소리는 아니고. 나이나 기타 여러 가지 상황을 따지기 전에 은조가 스스로의 마음을 먼저 들여다보았으면 하는 거야. 하고 싶은 대로 해요. 나라면 그럴 거야, 나같이 든든하고 돈 많은 아버지가 있다면 말이지.”

“여보…….”

테이블 위 남편의 손을 꼭 잡은 남희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
.

스푼으로 아이스크림을 떠 입으로 가져가는 다온이를 바라보던 은조의 입매가 굳었다.


“저 생각을 해 봤는데요. 민아가 미국으로 가기 전에 호적을 제대로 정리하는 게 어떨까, 싶어요.”

“언니 갑자기 무슨 소리야!”

“부모님들께서 괜찮다고 하시면 그렇게 하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아이의 미래를 위해서도 그편이 나을 것 같아요.”

“우리 은조, 생각이 많았구나. 그게 뭐가 급하겠어. 그런데 혹시…… 어디 아파? 안색도 별로고 식사도 제대로 못한 것 같은데.”

“아니에요, 점심 먹은 게 좀 얹혔는지 입맛이 영 없어서요. 죄송해요.”

“죄송은- 무슨. 그럼 우리도 아이스크림 먹자! 아니, 시원하게 셔벗 어때? 여기 레몬 셔벗 정말 맛있거든.”

“맛있겠다! 저도요!”

민아가 환호했고, 새콤한 레몬 향을 떠올린 은조도 아이처럼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보, 얼른. 우리 레몬 셔벗 좀 시켜줘요.”

저도 모르게 양손을 맞잡은 남희가 함박웃음을 웃었다.

미국에 있는 부자 친구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확실해.’

제니스에게 전할 매우 기쁜 소식이 ‘생겼다’는 확신이 들었다.


 

***

이제 어둑해진 서재.

의자에 깊게 몸을 묻은 재하는 새카매진 창을 멍하나 바라보고 있었다.

책상 위에는 은조의 가방. 말로 전해 들었던 그녀의 작은 가방이 열려 있었다.

그저 작은 가방인 그것이 참 처참한 몰골이다.

가장자리가 헤지고 먼지구덩이를 구르다 나온 듯 때가 탄 가방 안에서 나온 것 중, 두 가지는 이미 들은 것이다.

여권과 초음파 사진.

하지만 이것은……. 재하는 책상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반짝이는 물건을 바라보며 느릿하게 눈을 껌벅거렸다.

한강에 던져버렸는데.

윤은조를 당황하게 하고, 놀라서 쩔쩔매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그런 꼴을 감상하는데 6억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오만하고 방자한 태도로.

내가 그것을 가지고 있으면서 아팠던 만큼- 아니, 그 이상 그녀를 괴롭히고 쩔쩔 매게 만들고 싶었는데.

하!

허탈한 웃음이 터졌다.

크크크크…….

왜 그때는 몰랐을까.

멍청하게 이 잘난 반지가 세상에 유일한 게 아니라는 걸, 왜 그땐 몰랐을까.

은조는 반지를 돌려보낸 적이 없었다.

이 작은 것을 소중하게 예쁜 손수건에 감싸 꼭꼭 숨기고…… 더 소중한 것을 제 안에 꼭꼭 숨기고 나를 찾아왔는데.

미친 새끼. 그냥 뒤지는 게 낫겠다.

다시 웃음을 터뜨렸을 때 노크 소리가 들렸고 강 비서가 서재 안으로 들어섰다.


“……괜찮으세요?”

어두운 서재에 낮게 깔린 웃음소리를 들은 강 비서의 눈이 커졌다.


“아니, 최악이야.”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어떻게, 그게…….”

“……끝났어.”

재하의 눈은 텅 비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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