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4. 20020620 (74/100)


74. 20020620
2023.02.13.



6년 전, 인천 공항.

스물네 살의 권재하는 U-Airline Vip 라운지를 지나쳤다.

그가 들어선 곳은 [클럽-U].

항공사가 VIP보다 특별한 몇을 위해 마련한 공간이었다.

고급스럽고 쾌적한 장소에는 옅은 커피 향기와 함께 잔잔한 피아노 연주곡이 흐르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예상대로 서비스를 담당하는 직원이 두어 명 있었지만 손님은 그가 유일했다.


“그럼, 편하게 쉬고 계십시오. 탑승 직전에 다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재하가 얕게 고개를 끄떡이자 안내를 맡았던 항공사 직원은 자리를 떴다.


“…….”

들고 있던 가방을 소파에 내려놓은 그는 재킷 안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미국에서부터 사용하던 것이다.

2년 넘게 한국에서 사용하던 전화기와 번호는 공항으로 오기 전에 없애버렸다.

그 충동적이고 성급한 행동에 은조에 대한 원망이 없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끝이라고 돌아선 이상 여지를 남길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어떤 이유로든 제가 그녀에게 연락할 일은 없을 것이다.

재하는 이를 꽉 물었다.

게다가 그녀도…… 연락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안다. 그 애는 어떤 경우에도 한 번 내린 결정을 번복하지 않는다.


“……잘한 거야.”

서류에 사인을 그리기 전까지 주저했다.

당장 전화번호까지 없애는 게 맞는 걸까. 혹시, 그녀가 연락하지 않을까. 실수하는 게 아닐까. 망설이기도 했지만.

2년을 꽉 채워 같이 살았고, 이제 그 애가 없는 시간은 상상할 수도 없었지만.

결론은 모든 연결 방법을 끊은 것뿐이었다.

재하에게도 쉽기만 한 결정은 아니었다.

하지만 겨우 스물넷인 남자의 자존심이라는 것은 유치하고 어리석었다.

상실감 따위는 외면해 버릴 수 있을 정도로, 거절당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서툴렀다.


“잘한 거야. 미련 때문에 돌아버리는 것보다…… 이편이 나아.”

그렇게 멀거니 자리에 서 있는 재하는 한참이나 출입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있는 대로 잘난 척을 했지만 심장이 쪼개지는 것처럼 아프고 숨을 쉬기 힘들었다. 계집애처럼 엉엉 울고 싶은 것 같기도 했다.

그 애가 나타날 것 같았다.

은조가…… 바로 문을 열고 뛰어 들어와 품에 안길 것만 같았다.

후회한다고, 늦었지만 같이 가자고, 아프게 해서 미안하다고……. 예쁜 목소리로, 더 예쁜 눈동자로 너 없이는 안 되겠다고 말할 것 같았다.


“……병신 새X.”

한심한 자신을 탓하며 소파의 등받이를 움켜잡은 순간, 출입문이 열렸다!


“……!”

“……오빠!”

윤은조가 아닌 왕나나가- 나타났다!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재하에게로 다가왔다.


“뭐야? 네가 왜?”

“아아…… 이걸 어쩌지.”

“뭘 어쩌겠다고 이래? 네가 왜 여기 나타났냐고 묻잖아!”

지나치게 흥분한 재하의 목소리가 넓은 공간에 울렸다.


“오빠 소리 지르지 마…… 무섭잖아.”

목을 움츠린 나나가 당장이라고 눈물이 떨어뜨릴 듯 울먹였다.


“됐고, 너 뭐야?”

“그게…… 진짜 오해 말고 들어. 이건 우연이야! 나도 뉴욕 갈 때는 이 항공사 퍼스트만 타잖아.”

“그런데?”

“공항 오기 직전에 은조 언니한테서 전화가 왔더라고…… 오빠가 전화를 안 받은 거야? 내가 …… 나는 뉴욕으로 갈 거라서 모른다고 하니까…… 오빠도 공항에 있을 거라고…… 나는, 오빠가 여기 있는지 몰랐어! 진짜야.”

“아! 시끄럽고!! 은조가 왜? 빨리 말하라고!!”

재하는 당장 밖으로 뛰쳐나가기라고 할 것처럼 성마른 표정을 지었다.

은조의 이름을 들은 순간 이미 이성은 흐려졌다. 그녀가 저를 찾는 게 아닌가 하는 기대감이 거대하게 부풀었을 때.


“……이걸.”

왕나나가 작은 가방을 내밀었다.


“……!”

검정 종이가방, 파란색 리본 장식. 리본에 떡하니 적혀 있는 브랜드 네임.

반지였다.


“급하게 찾아와서는…… 이걸 오빠한테 꼭 전해주라고 나한테 맡겼어. 이게 뭐야? 난 안 열어 봤거든. 둘이 무슨 일이야?”

“이걸…… 너한테, 맡겼다고?”

나나가 순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오빠 공항 갔다고 하면서. 그런데 혹시 공항에서 못 만나면 뉴욕에라도 꼭 전해 달라고…… 언니가 부탁하더라고.”

“알았으니까 거기 내려놔.”

턱으로 테이블을 가리킨 재하는 짐짓 평온을 가장했다.

그리고 왕나나를 상대하고 싶은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던 그는 대놓고 말했다.


“혼자 있고 싶으니까 방해할 생각 마.”

“방해라니? 내가 오빠를 왜? 참, 나는 면세점에 잠시 들러야 해서. 이따 비행기에서 봐.”

고분고분하게 자리를 뜬 왕나나 뒤에서 재하는 이를 갈았다.


“…….”

그렇게 한참 동안 정면을 노려보던 그는 이내 작은 가방 안에 들어 있던 벨벳 상자를 꺼냈다.

뭘 확인하려 했던 걸까. 쪽지라고 들어있길 바랐나.

비릿하게 웃은 재하는 다이아몬드 반지 안쪽에 새겨진 숫자를 찬찬히 보았다.

20020620.

은조를 처음 만난 날.

재하는 그날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젊은 여자는 마른 체격에 꽃무늬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비슷한 꽃무늬에 크기만 작은 원피스를 입은 꼬맹이.

제 엄마의 손에 이끌려 원장님 방으로 들어가던 소녀는 멀찍이 서 있던 소년을 발견하고 방긋 웃었다.

작은 손을 들어 꼬물거리며 입 모양으로 ‘안녕’이라고 말했다.

슬픈 앞날을 모르는 게 분명했다.


 
그날이, 그 순간에 시작이었고…… 영원할 줄 알았는데.


“이렇게 끝났네.”

무표정의 재하는 반지를 안주머니 깊숙이 넣었다.

***

매우 신사적이고 교양 있으며, 여간해서 흥분하지 않는 남자 에디 강.

권재하의 비서로서는 물론이고 누구에게나 친절한 그가 최근 며칠 가면을 쓰고 살았다.

수시로 치미는 화를 억누르며 평소처럼 잔잔한 미소로 모두를 대했는데, 화가 난 이유는 당연히 망할 반지와 심증뿐인 악질, 왕나나였다.

사람을 농락해도 유분수지.


“매가 부족해. 더 맞아도 정신을 차릴까 말까겠지. 걸리기만 해 봐, 작살을 내줄 테니.”

브랜든이 다녀가고 날벼락이 떨어지는 줄 알았지만 권재하는 이상했다.

화는커녕 그간의 모든 일이 있지도 않았던 것처럼 묵묵히 일에만 몰두했다.

텅 빈 눈을 하고 색깔도 향기로 없는 하루하루를 만들어갔다.

그래서 강 비서는 결심했다.

직접 문제의 반지를 추적하기로. 물증을 잡아서 더 혹독한 매를 들기로.

.
.

그 ‘혹독한 매’에 대해서 생각하는 강 비서는 지금 커피를 홀짝이는 중이다.

장소는 DL 백화점 명품관, VIP 룸.

하이엔드 쥬얼리 브랜드 ‘폴린’은 서울에서도 유일하게 이곳에만 입점해 있다.

이미 파악한 바에 따르면 2016년에 시니어 매니저였던 직원이 현재 총 지배인이 되어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마침 나타난 지배인이 고개를 숙였을 때 강 비서는 누구처럼 고개를 얕게 끄덕여보였다.


“앉으시죠. 얘기가 길어질 것 같은데.”

목소리도 누구 못지않게 거만했다.

***

늦은 밤.

전화기를 쥔 김남희는 여느 중년의 여인처럼 수다를 즐기는 중이었다.

은조와 저녁 식사를 함께한 날 그녀는 장문(長文)의 메일을 미국의 친구에게 보냈다.

그리고 오늘, 그 친구로부터 전화를 받은 것이다.

통화 상대는 권재하의 조모(祖母). 미국에서도 알아주는 재벌가의 여왕 제니스 알렉시스(Janis Alexis)였다.


[전에도 말했지만 남희는 정말 재치 있어요. 작가라서 그런가, 영어를 잘해서 그런가, 매번 느끼는 건데 대화가 즐거워요.]

[다행이에요, 나만 신난 게 아니어서요.]

남희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다.


[그런데, 서울은 지금 새벽이죠? 2시? 내가 남희를 너무 오래 붙들고 있는 거죠?]

[아니에요! 새벽은 맞지만 전 이 시간에 보통 깨어있어요. 뉴욕은 오후 1시죠?]

[맞아요. 그런데 남희- 시간도 늦었으니, 이제 그 ‘태몽’이라는 것에 대해서 솔직하게 말해 줘요.]

[눈치 챌 줄 알았어요. 그게 아무래도 조심스러운 부분이라…….]

말끝을 흐린 남희는 제니스가 큰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를 들었다.


[오, 이런…… 내 생각이 맞는 거죠? 세상에!]

[제니스, 단언할 수는 없어요. 당신이 아기를 얼마나 바라는지 너무 잘 알아서- 사실 나는 좀 걱정도 돼요.]

재하와 은조의 상황을 모르는 남희는 메일에 태몽에 대해 적었다.

자연스럽게 주제를 꺼냈고, 돌려 말한다고 했는데. 역시 제니스는 바로 알아챈 것이다.

메일을 보내고 아차 하는 마음도 들었지만 제가 꾼 꿈은 분명히 태몽이었다.

남희는 품에 안았던 그 새빨갛고 탐스러운 사과의 모양을 잊을 수가 없었다.


[제니스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대부분 여자들은 식사를 잘 못 하죠. 은조가 그러더라고요.]

[그래서요? 그녀가 입덧(morning sickness)을 하던가요?]

[오, 제니스. 그건 아니에요. 하…… 이게 우리만의 상사이면 어쩌죠.]

[괜찮아요. 어서 본 대로 이야기해 줘요.]

제니스는 이미 손자를 품에 안은 것처럼 들떠 있었고, 남희는 다시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새콤한 레몬 셔벗을 맛있게 싹 먹었어요. 물론……??!!]

이런!! 갑자기 그 새콤한 셔벗을 두 개나 먹은 민아가 떠올랐다.


[제니스, 일단 두고 보기로 해요. 정말 미안한데 내가 좀 성급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남희, 작가로서의 육감에 갑자기 자신이 없어졌나요?]

하하하- 호탕한 웃음소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들렸다. 하긴- 제니스 알렉시스가 이런 일로 영향을 받으면 또 얼마나 받겠는가.


[뭐, 둘 다 젊고 건강하니 아이야 곧 생기겠죠.]

[그럼 더 바랄 게 없죠. 그런데- 남희, 우리 친구 맞죠?]

[……제니스 무슨 일이 있군요?]

[남희 혼자만 알고 있어요. 실은…….]

 

.
.

한편, 침실에 누워서 통화 중인 아내 제니스를 바라보는 카일.

방해하지 말라는 아내의 손짓에 방을 나온 그 역시 전화기를 들었다.

제니스의 부탁 때문에 망설였지만 이제 손자에게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할아버지!]

[카일, 자는 걸 깨웠니?]

[아니에요. 봐야 할 서류가 많아서요. 말씀하세요, 할머니는 잘 계시죠?]

듬직한 손자의 목소리를 들은 노인은 목소리를 떨고 말았다.


[카일…… 뉴욕으로 돌아와 주렴, 최대한 빠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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