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돌아간 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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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돌아간 준비
2023.02.16.
6년 전, 그날도 나나는 취미이자 특기인 쇼핑 중이었다.
장소는 당연히 언젠가 제 소유가 될 DL 백화점.
현대 무용을 전공한 그녀는 사업이나 경영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관심도 없었다.
그저 제 부모가 그룹의 주인이라는 이유로, 백화점을 달라고 조르곤 했다.
백화점 ‘사업’도 아닌 그냥 ‘백화점’의 주인이 되고 싶다는 생각에서였다.
언제나처럼 친구 두어 명을 거느리고 명품 브랜드를 기웃거리던 왕나나의 눈에 그의 모습이 들어왔다.
[……재하 오빠?]
그가 막 빠져나온 곳은 아무나 들어가지도 못하는 고가의 주얼리 브랜드숍이었다.
친구들에게 들고 있던 쇼핑백을 넘긴 그녀는 곧장 그 매장의 출입문을 열어젖혔다.
[아이고, 공주님 이틀 만에 또 오셨…….]
[됐고요. 방금 나간 남자, 권재하라고 내가 아는 사람이에요.]
[네?]
마침 그룹 총수의 고명딸을 맞이하게 된 총 지배인이 얼떨떨한 표정을 짓자 왕나나가 알아서 움직였다.
VIP 룸으로 먼저 들어간 그녀는 곧 따라 들어온 지배인에게 다짜고짜 따지듯 말했다.
[여자 꺼 사갔죠? 어떤 거? 목걸이? 반지?]
[……네?]
[나도 사겠다고, 같은 거.]
자리에 선채로 팔짱을 낀 그녀가 으르듯 요구했고, 눈치 빠른 지배인은 재빨리 직전의 손님이 고른 반지와 같은 모델을 대령했다.
[이, 이건…….]
반지를 본 왕나나의 얼굴이 우그러졌다.
[네. 최신상, 이터니티 컬렉션입니다. 콘셉트가 영원히 서로를 벗어날 수 없는 달콤한…….]
[아! 시끄럽고, 혹시…… 각인 같은 거, 했어요?]
[네, 그분은 프러포즈 링으로……!]
[아악!!!]
꽥 소리를 지른 나나는 들고 있던 작은 백을 바닥에 패대기쳤다.
그리고 얼마간 대리석 바닥을 구둣발로 구르며 얼굴과 어울리지 않는 험한 욕지거리를 뱉었다.
더 황당한 것은 그 이후 그녀의 주문이었는데.
[똑같은 거, 나도 만들어 줘요.]
[……네?]
[후…… 지배인님 잘 들어요. 딱 한 번만 더 말할 거니까. 그 다이아몬드 반지! 같은 치수! 같은 각인! 나도 똑같은 거 가져야겠다고요!!!]
[하지만, 그건 그 손님만의 개인적인…….]
[아아아악!!!]
DL 공주 왕나나의 비명소리에 시니어 매니저 두 명이 동시에 룸 안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보름 뒤, 나나는 윤은조가 권재하에게 받았을 게 분명한 반지를 손에 쥐었다.
안쪽에 새겨진 의미를 알 수 없는 숫자나, 반지의 사이즈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그 반지가 어떤 역할을 하게 될지도 당시에는 예상조차 못 했다.
그저 마른 들판에 번지는 불길같이 걷잡을 수 없는 질투심에 휩싸여 저지른 짓이었다.
권재하가- 제가 아닌 다른 여자와 결혼을 약속한다는 현실을 절대 인정할 수 없었다.
[그 거지 같은 X한테 이런 게 어울리기나 해? 내가, 반드시 찢어놓을 테니까 두고 봐.]
***
6년이란 시간이 흐른 현재.
당시 왕나나의 비명 소리에 VIP룸으로 들어왔던 시니어 매니저 박모 씨가 숍의 총 지배인이 되어 있었다.
[물론 큰 잘못입니다. 같은 디자인의 반지를 만드는 일은 있어도…… 개인적인 의미가 있는 각인(刻印)까지는…… 정말 죄송합니다. 저는 그때 상관의 행동을 막을 힘이 없었습니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왕나나 양은 거액의 뒷돈까지 제안했고…… 돈보다 더 큰 협박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DL 백화점 명품관 ‘폴린’의 현 지배인이 강 비서 앞에서 머리를 조아렸다.
전임자(前任者)를 대신해 사과한 그는 조심스럽게 다른 이야기도 덧붙였는데, 당사자인 전 지배인 김모 씨가 지난해 사망했다는 말이었다.
옳지 못한 행동에 대해 책임져야 할 두 명 중 하나는 세상에 없다는 얘기였다.
남은 것은 왕나나뿐이다.
.
.
문제의 반지에 대해 알게 된 날, 늦은 밤.
강비서는 스카이라운지 ‘Sol’에서 연경을 만났다.
연경은 말도 없이 위스키 석 잔을 연거푸 마셔버린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오늘 너답지 않은 거 알아?”
“나다운 게 뭔데?”
그가 또 잔을 가득 채웠다.
“무슨 일 있어? 아니, 권재하한테 무슨 일이 있구나?”
“응.”
“응? 겨우 그거야?”
어깨를 달싹인 연경은 과일 안주가 담긴 접시를 살폈다. 그리고 작은 포크로 멜론을 콕 찍어 그에게 건넸다.
“자- 빨리 말해.”
“…….”
안주를 챙겨주는 연경의 행동이 싫지 않은 강 비서는 슬쩍 눈동자를 굴렸다.
불과 몇 시간 전에 백화점 명품관, 주얼리 매장에서 권재하 흉내를 낸 이야기를 해야 하나. 아니면…….
“일단 시작해 봐.”
“헉.”
“그래. 넌 내 손바닥 안이잖아. 귀여워해 줄게, 어서 털어놔 봐. 어차피 나 아니면 어디 가서 임금님 귀가 당나귀 귀라고…….”
“오케이! 그래, 알았다고!”
항복한 강 비서를 향해 씩, 웃은 연경이 양손으로 턱을 괴었다.
“그게, 그러니까…….”
어디서부터 시작을 해야 하나. 잠깐 고민한 강 비서는 왕나나의 결혼식 이야기부터 꺼냈다.
권재하가 왜 그런 유치한 시나리오를 짜고 실행에 옮겨야만 했는지.
이후 그의 상태, 브랜든의 방문 등등…….
“어쨌든 결론은, 하나뿐이어야 할 프러포즈 반지가 두 개였다는 거야.”
“진짜는 브랜든이 가지고 왔다? 그럼 가짜는?”
“형이- 하…… 내가 미쳐.”
“……?”
“한강에 던졌대. 윤은조 씨 코앞에서 보란 듯이.”
“대박- 남자들이란.”
쯧쯧쯧- 혀를 찬 연경이 고개까지 가로저었다.
“뭐? 허세라고? 형은 내내 가짜 반지를 보면서 아파했어!”
“그래서 보란 듯 한강에 던지면 뭐가 좀 낫고?”
“됐어! 이젠 내가 용서 못해! 그 계집애를 그냥…….”
강비서의 두 주먹이 허공에서 부들부들 떨렸다.
“난 걔 처음부터 별로였어. 권재하 앞에서만 다른 애처럼 군다고 오래전에 내가 했던 말, 기억 안 나지? 아무튼 그런 짓은 그냥 별로라고 하기에는 좀- 부족하다. 물론 그 애 입장에서는 ‘사랑한 게 죄냐’겠지만…… 흠- 죄, 맞네.”
“그러니까. 고걸 어떡하지?”
“……아.”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연경이 갑자기 깔깔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왜 그래?”
“있잖아. 그 도망간 신랑- 차대성 의원 아들.”
“차상윤? 그 인간이 왜?”
“와…… 재미있네.”
“대체 뭐냐고! 같이 좀 재미있자!”
“그게- 이혜정이라고 차대성 와이프에 대한 이야기가 있어. 우리 쪽, 그러니까 인테리어 디자이너들 사이에서는 요주의 인물로 소문이 자자하대. 나는 최근에 알았고.”
“……?”
“친한 선배가 있는데 나처럼 소문에 대해서 몰랐던 거야. 봄에 그 집 인테리어를 맡았다고 좋아했는데- 일이 끝날 때쯤 몸무게가, 무려! 4킬로나 빠져 있었어! 하하하, 아이고 배야.”
연경이 이제 배를 잡고 웃었다.
“이연경 너 뭔 소릴 하는 거야?”
“신랑은 어쩌면 왕나나뿐 아니라 제 엄마한테서 도망친 건지도 몰라.”
“점점 더 못 알아듣겠네!”
못 알아듣겠다는 강 비서를 향해 도리어 연경이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신랑을 다시 데려다 놔! 왜 왕나나를 제 집에 편하게 둬? 그게 복수야? 겨우??”
“……!”
“그래! 이혜정은 정말 최-악의 시엄마가 될 거야. 내가 200% 약속할 수 있어!”
연경이 새끼손가락을 내밀었고.
그 의미가 뭐든 간에 강 비서는 냉큼 제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이연경. 난 정말- 매우 네가 좋아.”
“흥. 보는 눈은 있어서.”
왕나나의 앞날이 결정된 순간이었다.
***
재하는 며칠째 새벽같이 출근하고 자정이 다 되어서야 겨우 집에 들어갔다.
술은 입에 대지 않았지만 잠은 하루 서너 시간이 전부였다.
식사도 대충 때우고 온종일 서류에 파묻혀 지냈다.
[돌아가. 너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로.]
미친 듯이 일을 하는 와중에도 문득문득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잠깐 눈을 꾹 감았다 뜬 재하는 들고 있던 펜을 내려놓았다. 뒷목이 뻣뻣했다.
“…….”
[제니스가…… 암이, 재발했어.]
가늘게 떨리는 노인의 목소리에서 아픔이 느껴졌다.
-할아버지, 숨을 깊게 쉬세요.
[그래, 난 괜찮아. 좀 겁먹었을 뿐이야.]
-어느 정도에요? 닥터 페이튼은 뭐라고 해요? 아니, 제가 직접 알아보죠.
[카일, 제니스는 이전보다 나이가 들었어. 또 항암치료를 받는 것에 대해 긍정적이지 않아.]
-의학은 6년 전보다 훨씬 발달 했어요. 할머니는 나이보다 건강하신 편이고요.
[그녀의 마음이 문제야. 곱게 죽는 것도 의미 있다고 말하는 걸 듣는데, 내가 그만…….]
-최대한 빠르게 갈게요. 쉽게 포기하시는걸 보고만 있지 않을 겁니다. 걱정 마세요.
[그래. 미안하구나. 사실 제니스는 너에게 말하지 말라고 했단다. 당장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니라고 하면서 두고 보자는데…….]
-잘하셨어요. 제가 당연히 알아야죠.
[비행기 스케줄을 비워두마.]
-네.
“…….”
어느새 빌딩 사이로 숨어드는 해를 바라보던 재하는 의자에 깊게 몸을 묻었다.
똑. 똑.
“네.”
종이 상자를 든 강 비서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
.
“점심 겸 저녁인데 겨우 샌드위치로 되시겠어요?”
“충분해, 맛있다. 여기 제대로 만드네.”
“…….”
“에디, 내 일은 거의 끝났어. 곧 돌아간다는 말이야.”
“…….”
“몇 가지는 네가 마무리를 지어줘야겠어.”
“네. 마무리 잘 짓고 곧 따라 가겠습니다.”
“그건, 고민해 봐.”
“네?”
“너, 서울에 있고 싶잖아.”
“그건…… 그냥 그러면 어떨까 해서 드렸던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고민해 보라고. 에드워드 강 넌 뉴욕대 경영학 박사야. 이제껏 나 때문에 실력을 낭비했어.”
“대표님!”
“이제 그렇게 부르는 것도 얼마 안 남았다. 나는 네가 예전의 꿈대로 강단(講壇)에 섰으면 좋겠어.”
“…….”
“S대 박 총장님, 지난번에 한 번 뵌 적 있지? 실은 내 마음대로 약속을 잡았어. 이번 주 금요일.”
“대표님!”
“인사 정도만 해두라는 뜻이야.”
“왜 이러십니까? 다신 안 볼 것도 아닌데…….”
“아, 그리고. 월요일 오전 회의 취소해. 대신 JS 개발팀 이원영 본부장 좀 불러들여.”
“……설마.”
“맞아. 임시 대표 자리.”
“왜 이 본부장입니까?”
“그러게- 왜 하필 그여야 할까?”
강 비서의 무거운 질문을 장난처럼 받은 재하가 오랜만에 보기 좋게 웃었다.
하지만 강 비서는 보았다. 슬픔을 감춘 그의 두 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