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6. 왜 하필 지금 (76/100)


76. 왜 하필 지금
2023.02.20.


금요일 저녁, 집에 혼자 있는 은조는 청소기를 미는 중이었다.

선우와 민아의 결혼식이 4개월 뒤로 잡혔다.

뉴욕에서 살림을 차리는 이야기가 나온 이후 장소나 시간문제 등이 구체화되었고, 민아는 이래저래 선우의 부모님들과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가족과 친한 지인 몇을 초대하는 게 전부인, 간소한 결혼식은 뉴욕 시청에서 치러지게 되었다.

시청이라니. 은조는 최선우 다운 장소라고 생각했다.


[운이 되게 좋았대. 누가 마침 취소한 날짜가 있었다네. 원래 신청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반년 이상 기다리는 게 보통이라고 하더라고.]

민아는 선우가 고른 장소에 대만족을 표시했다. 영화에서 본 적이 있다며 아주 로맨틱하다고까지 말했다. 동생도 보여주기 식의 요란한 행사를 바라지 않는 것이다.

민아는 결혼식 전에 두어 번 정도 뉴욕에 가야 할 것 같다고도 말했다.

결혼에 대한 문제도 있지만 그녀가 다니고 싶은 학교 문제가 가장 컸다.

어차피 공부를 시작할 거면 미룰 이유가 없다는 동생의 생각에 은조도 찬성했다.

4개월…… 내년 봄에는 집에 혼자 있게 될까.

지금처럼 이렇게…….

결혼식이 예상보다 너무 빠르다.

하지만 민아의 마음을 무겁게 만들 생각이 없는 은조는 별다른 말을 보태지 않았다.

굳이 따지자면 은조의 모든 시름은 민아의 대리운전 사고로부터 시작된 것이지만…… 이제 전부 잘 끝났으니까.


“…….”

갑자기 멈춰 선 은조는 현관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별일 없겠지.
 


[혹시 몰라서 알려드립니다. 대표님은 논현동 댁으로 오셨습니다.]

 
강비서로부터 받은 그 메시지 이후, 재하에 대해 어떤 것도 보고 들은 내용이 없다.


“잘 있으니까 아무런 말이 없는 거겠지! 무슨 상관이라고…….”

당장 떠나라고, 잘 가라고 인사까지 정확하게 했다. 그리고 제 집으로 잘 갔다고 들었고.

그런데…… 마지막 초췌하던 그 몰골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가 않았다.


“……끝까지 정말.”

청소기를 제자리에 두고 주방으로 간 은조는 냉장고를 열었다.

처음이다. 민아랑 다온이 둘 다 없는 주말은.

일종의 예행연습인가. 혼자 살아보기 연습.

동생과 아이는 이번 주말을 남희 집에서 보내기로 했다. 남희의 강아지 ‘후추’에게 ‘또’ 반한 다온이는 릴리를 잊은 지 오래다.

이렇게…… 천천히, 아이가 놀라지 않게 고칠 부분은 고쳐야 한다.

입 안이 쓰다.

점심에 동료들과 찾은 중식당에서 짜장면을 맛있게 먹었는데.

또 짜장면 생각이 났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다온이가 짜장면을 먹고 아팠던 날이 생각났고…… 다시 초췌한 권재하.

그가 흘리던…… 눈물.

한참이나 멍하니 서 있던 은조는 흠칫 놀라 얼른 냉장고 문을 닫아버렸다.


“……왜 이래.”

요즘 부쩍 정신이 없고 마음도 뒤숭숭하고 입맛까지 최악이다.

물론 민아 앞에서는 티내지 않았다.

저나 다온이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싫지만 혹시라도 권재하를 들먹이면 정말 짜증 나니까.
 


[꼭 보내야 했어? 난 분명히 두 사람한테 아직도 뭔가 남았다고 느꼈어…… 언니 마음도 이해는 하지만…… 왠지 너무 아쉽고…… 슬퍼.]

 


“…….”

잠시 눈을 붙이고 먹고 싶은 것을 생각해 보기로 한 은조는 소파에 누웠다.

하지만 깜박 잠이 든 그녀의 눈에 이내 커다란 눈물방울이 달렸다.

보드랍고 여린 손이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넘겨준다. 은조는 엄마의 다리를 베고 누워 있었다.

엄마의 화장품 냄새가 옅게 느껴졌다!


“……엄마?”

[우리은조, 내 예쁜 딸.]

“엄마…… 흐흑…….”

서럽고 뜨거운 눈물을 후두두 떨어뜨린 은조는 몸을 잔뜩 웅크렸다.


“나…… 이제 어떡해?”

[뭐가 무섭다고 그래? 겁먹을 거 하나도 없어. 이제 항상 같이 있을 거야.]

……정말? 은조는 다시는 잃지 않으려는 듯 엄마의 치맛자락을 세게 움켜잡았다.


[정말이고 말고. 그러니까 아무 걱정 말고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자고. 알았지?]

응- 고개를 끄덕인 은조는 엄마 다리에 얼굴을 비볐다. 따듯한 체온이 느껴져서인지 불안했던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눈을 꾹 감은 은조는 은은한 엄마의 향기를 깊게 들이마셨다.


“근데…… 엄만 왜…… 그대로야? 난 이렇게 컸는데. 어른이 됐는데…….”

감사합니다……. 여전히 은조의 머리카락을 쓸어주는 엄마는 누군가에게 잔잔한 감사를 전했다. 진심이 담긴 보드라운 목소리였다.

은조의 눈에 다시 눈물이 고였다.


“……!”

반짝, 어둠 속에서 눈을 뜬 그녀는 축축해진 뺨을 손등으로 밀었다.

거짓말처럼, 거실에 엄마의 향기가 떠다니고 있었다.

커다래진 눈을 껌벅이며 깊은 숨을 들이마신 순간, 꼬르륵- 심한 허기를 느꼈다.

자리에서 일어선 은조는 집 안을 환하게 밝혔다. 그리고 제대로 된 저녁을 차려 먹었다. 마치 엄마와의 약속을 지키기라도 하는 것처럼.

.
.

다음 날 아침.

혼자 눈을 뜬 그녀는 침대에서 빠져나오자마자 욕실로 달려갔다.

한바탕 헛구역질을 한 은조는 거울 속 벌게진 얼굴을 바라보았다.

웬일로 늦은 시간에 꾸역꾸역 밥이 잘도 넘어가나 싶었다. 제대로 체했는지 뱃속이 난리다.

하지만 더 놀라운 일은 잠시 뒤에 벌어졌다.

당장 씻고 싶어진 그녀가 샤워기 아래에 선 순간, 챙그랑!


“……!!”

손가락에서 빠진 반지가 타일바닥에 부딪히며 만든 소리가 욕실에 울렸다.

맙소사! 드디어, 자유다!

기뻐하며 바닥에 떨어져 있던 반지를 세면대 위로 조심스럽게 옮겨 놓았지만.

또 다른 걱정의 시작일 뿐이었다.

어떻게 돌려주지? 그에게 줘야 하나? 직접? 아니. 강 비서님한테 연락할까? 하…… 그냥 민아랑 뉴욕으로 같이 갈까.

.
.

오후가 되어서야 다온이와 민아가 집으로 돌아왔다. 은조는 아이를 보자마자 입을 맞추고 뺨을 비볐다.


“다온이 재미있었어?”

“후추랑 노느라고 정신없었지, 뭐.”

“그랬어?”

“엄마, 우린 언제 강아지 입양해? 엄마는 거짓말쟁이야.”

“…….”

큰일이다. 이런 저런 이유를 줄줄이 가져다 대며 미뤘는데. 이제 강아지 입양보다 급하고 복잡한 일이 너무 많은데.

은조는 민아에게 도와 달라는 표정을 지었다.


“다온, 오늘은 이모랑 미국에서는 어떻게 강아지를 키우는지에 대해 공부하자.”

“밥 주고 산책 시키고 사랑해주면서 키우는 거야! 미국이라고 다르지 않아!”

영민한 아이는 어른들이 또 다른 핑계를 댄다고 생각했는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너 그렇게 똑똑한 녀석이, 이모가 계속 미국 얘기를 하는 이유는 왜 몰라?”

“민아야!”

은조가 민아를 향해 눈을 크게 떴다. 내내 부루퉁해 있더니 괜히 어린애를 상대로 목소리를 키운다.


“엄마, 이모가 아까는 영어학원에 다니라고 했어! 나 영어 학원 다녀야 해? 그럼 태권도는?”

은조 품으로 달려든 아이는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얼굴이다.


“다온아, 후추 사진 찍은 거 없어? 엄마도 후추 보고 싶어.”

민아를 향해 얼른 휴대폰이나 꺼내라는 표정을 지었는데.


“니가 엄마한테 후추 사진 보여줘. 이모는 머리 아파.”

휴대폰을 아이에게 건네준 민아는 휭하니 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
.

민아는 자신이 임신했다는 걸 알았다.

지난밤, 다온이를 재워준다며 같은 침대에 누운 남희가 얼마 전 자신이 꾼 꿈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아이가 생겼냐고.

당황한 민아는 아니라고 말했지만. 바로 아닌 게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을 고쳤다.


“……아, 정말. 내가 못 살아!”

생리가 늦어지는 걸 깨달은 건 불과 며칠 전이다.

민아는 멀찍이 던져둔 가방을 쏘아보았다. 집으로 들어오기 전 편의점에 들러 임신 테스트기를 샀다.

부모님들은 기대를 하는 눈치지만 기쁘지가 않다. 언니 때문에…… 마음이 아프다.

사고로 불임이 됐다는 이야기를 들은 지 얼마나 됐다고.


“……어떡해.”

 

***

월요일.

블랙스톤 파트너스 빌딩, 대표 집무실.

맞은편에 앉아있는 이원영 본부장을 바라보는 권재하의 눈빛은 담담하다.

방금 그에게 임시 대표직을 제안했다.

큰 동요 없이 찻잔을 들어 입술을 적시는 이원영을 바라보는 재하는 생각했다.

예상대로 아비보다 나은 아들이라고.

꽤 놀라운, 크게 반가운 소식일수 있는데 평정을 유지한다.


“좀 당황스럽습니다.”

“그러시겠죠. 하지만 저는 신중하게 생각해서 내린 결론입니다. 현 시점에서 JS를 맡겨도 무리가 없을 인물을 찾은 거죠. 회사에 애정을 갖고 있는 걸로 아는데 아닙니까?”

“글쎄요, 애정이 있다고 다 가능한 것은 아니니까요.”

그렇지, 잘 알지. 재하는 꼬고 있던 다리를 바꾸었다.

이원영. 그로 말할 것 같으면 윤은조의 리스트에 있던 남자다.

서울에 오자마자 그녀의 남자 관계에 대해 알아보느라 눈이 뒤집혔을 때.

좋게 말하면 아이이의 생부에 대해 알고 싶어서- 은조 주위의 남자라는 남자는 눈빛만 나눈 놈이라도 알아야 직성이 풀렸던 그때 받아본 리스트.

물론 일찌감치 일방적 단순 호감으로 열외였지만.


“…….”

두고 볼수록 괜찮은 인간이라는 사실에, 왜 또 심사가 뒤틀리는지. 빌어먹을.


“갑자기 돌아가기로 결정하신 이유를 여쭤 봐도 될까요.”

“지극히 개인적인 사정이 생겼을 뿐입니다.”

“혹시…… 윤은조 씨도 같이 가시나요?”

“…….”

“아, 실례가 되는 질문이었다면 취소하죠. 죄송합니다.”

다 식어버린 찻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재하는 시선을 창밖 멀리로 던졌다.


“아닙니다. 그녀와는 상관없는 일이에요. 그리고 사람들이 꽤 오해를 한 것 같은데.”

“……?”

멀리 가있던 건조한 눈빛이 이원영에게로 돌아오며 옅은 웃음기를 머금었다.


“뭐, 대단한 사이 그런 거 아닙니다.”

“…….”

“어릴 적, 작은 인연정도?”

권재하는 이원영에 대해 깊게 알아 봤다. 결론은 능력 성품, 심지어 사생활까지 합격점이었다.

사랑하는 여자가 생기면 평생 아껴줄 만한 인간.

제 피가 섞이지 않았어도 아이를 잘 키울 인성이 되는 잘난 자식…….

나는 지금 이원영에게, 대체 어떤 기회를 주고 있는 것일까.

재하는 일그러지는 눈가를 검지로 문질렀다.

그리고 왜 하필 지금.

고 녀석의 귀여운 목소리가 떠오르는 걸까.


‘엄마는 아저씨 좋아해요! 채린이도 가끔 저를 꼬집는데요, 그게 미워서 그러는 게 아니래요!’

그 말을 한 녀석은, 더 귀엽게 고개를 갸웃거렸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