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길어야 10시간
(77/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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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길어야 10시간
2023.02.23.
며칠 만에 가을이 부쩍 깊어졌다.
민아는 따듯하게 데운 우유 세 잔에 코코아를 적당히 탔다. 스푼으로 두세 번 휘휘 저어주자 진한 초콜릿색으로 바뀐 우유에서 달콤한 향기가 올라왔다.
“이모.”
은조에게 기대어 반은 졸고 있는 다온이가 빨리 달라고 손짓을 했다.
“네~ 갑니다.”
민아는 요령껏 머그 세 개를 양손에 나눠 잡았다.
거실의 조명은 은은하고 티브이 볼륨은 아주 작아 오히려 잠을 불러올 것 같은 분위기다. 민아가 건네는 잔을 받아든 은조와 다온이가 꼭 닮은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
“고맙습니다.”
“네에~ 조심해서 천천히 드세요.”
다온이의 다리 근처 바닥에 앉은 민아는 문득 아주 평화롭고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복인지 다온이때도 그러더니 이번에도 입덧은커녕 몸도 마음도 활기 그 자체다.
‘언니한테 쉽게 말만 할 수 있다면 정말 최곤데…….’
권재하 씨가 떠난 이후 은조는 꽤 우울해 보였다. 물론 본인은 절대 아니라고 하겠지만 보는 입장에서는 여간 무기력해 보이는 게 아니었다.
그런 언니에게 ‘나 임신 했어’라는 말이 쉽게 나오면 그게 비정상이지. 민아는 힐끗 딴생각에 빠진 얼굴을 한 은조를 바라보았다.
“좋아하는 데 대체 왜…….”
“뭐?”
보이는 것도 없는 시커먼 창밖을 바라보던 은조가 민아의 혼잣말에 바로 반응했다.
“아냐. 그냥 혼잣말 좀 했어. 답답해서.”
“니가 뭐가 답답해서. 복에 겨워서 아주…….”
“그래, 복에 겨운 김에 얘기할게. 이번 달 말에 뉴욕에 잠깐 다녀올 거야, 한 3일 정도면 돼.”
“알았어.”
“알았어? 그게 다야? 왜 가는지 안 물어? 다온이는 누가 봐?”
“그래, 복에 겨운 동생아- 물어 줄게. 학교 때문에 가는 거야, 선우 씨가 보고 싶어서 가는 거야? 어느 쪽이든 다온이 걱정은 말고.”
놀리는 투로 말한 은조가 생글거렸다.
“둘 다야! 됐어? 그리고 어떻게 다온이 걱정을 안 해? 그냥 셋이 같이 가. 실은 그 얘기를 하려던 거야.”
“이모, 나도 가도 돼? 와!!”
응? 따듯한 거 먹이고 재우려고 했는데. 대뜸 저도 가겠다고 나선 다온이의 목소리가 또랑또랑하다.
“다온이도 뉴욕, 갈래?”
“응! 릴리도 만나고 카일 아저씨도 만날래!”
헐- 민아가 은조를 바라보며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아이에게는 진작 재하가 미국으로 돌아갔다고 말했다. 가족이 거기에 있으니까, 갔다고.
“다온이, 괜찮겠어? 3일 동안 엄마 안 봐도 돼?”
은조는 구슬릴 생각이었겠지만 아이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쉽게 말했다.
“이모가 셋이 가자고 했잖아, 엄마도 같이 가면 되지!”
“아…… 엄마는 회사 가야 하는데? 우리 강아지도 어린이집 가야 하잖아.”
“……웅?”
바로 실망한 것 같은 표정을 지은 아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회사를 어떡하고 어린이집을 어떡하지- 궁리를 하느라 눈알을 굴리는 귀여운 다온이.
은조는 그런 아이의 머리카락을 쓸어주었다. 어차피 겪어야 할 일이 슬슬 다가오고 있었다.
“……민아야 다온이 데리고 다녀와. 그게 좋겠다.”
“와!!!”
“윤다온, 엄마는 미국에 가보라는 거지, 릴리나 카일 얘기를 하는 게 아냐. 미국은 한국의 몇 배라고 했어?”
“98배.”
“그래, 거의 100 배야! 엄청 넓은 거지. 릴리가 사는데랑 이모가 가는 곳은 너무 멀어.”
흠흠- 아이의 순수한 소망에 마음에도 없는 재를 뿌리느라 애를 쓰는 민아다. 은조도 아무 말 없이 컵에 코를 박고 후후 미지근한 우유를 입으로 불었다.
“할머니가 뉴욕에 놀러 오라고 했는데? 엄마가 말해줬잖아, 할머니가 영어로 했던 말, 응?”
당혹함을 숨기지 못한 은조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영특한 건 알고 있지만 가끔 필요 이상 기억력이 비상해서 애를 먹인다.
“다, 다온아, 있잖아~.”
민아는 은조를 바라보는 작은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 제 쪽으로 돌렸다. 이잉- 아이가 불만스러운 듯 도리질을 한다.
“우리 다온이 이다음에 커서 선우 아저씨처럼 의사 되는 거 어때?”
“아니, 난 카일 아저씨처럼 부자가 될 거야! 람보르기니를 운전할 거라고!”
아이가 거실 끝에 있는 노란색 장난감 자동차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대박! 하하- 넌 참, 똑똑한 녀석이야.”
은조를 바라보는 민아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
.
새벽, 침대에 누운 은조는 작은 종이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제니스가 준 명함이다. 휴대폰 번호는 물론 집 전화번호, 이메일 주소에 심지어 개인 비서의 연락처까지 적혀 있었다.
[언제든 연락 줘요. 그저 뉴욕 날씨가 궁금해서라도 상관없어요, 진심이에요.]
명함을 건네던 제니스의 에너지가 지금도 느껴지는 것 같았다. 생기 넘치는 목소리와 몸짓, 나이가 일흔이 넘었음에도 아름답다는 표현이 딱 맞았다.
여자로서 아름다운 것은 물론이고. 뭐랄까…… 인간으로서- 인생에 대해, 삶에 대해 자신감 넘치고 당당한 모습이 매우 아름다워 보였다.
제니스가 반지를 보내고 돌아간 후 은조는 그녀에 대한 기사를 여러 개 찾아보았다.
회사를 업계 최고의 자리까지 올려놓은 일은 거의 신화에 가까웠다. 하지만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기사는 그녀가 암을 선고받고, 이겨낸 과정에 대한 이야기였다.
삶에 대한 열정과 용기가 보통 사람들의 그것과 달랐다.
“나도 그렇게 멋지게 나이 들고 싶다.”
어느새 침대 옆 테이블 서랍에서 꺼낸 반지를 만지작거리던 은조는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전화를 해? 메일을 보내? 급한 건 아니니까- 아니, 급하지. 급하지만…….
아무래도 메일이 편하다.
이불 밖으로 나온 은조는 카디건을 걸치고 노트북이 있는 화장대 앞으로 갔다.
***
뉴욕, 맨해튼.
어퍼 웨스트사이드(Upper West Side)에 위치한 ‘101 Amsterdam’.
제니스 알렉시스(Janice Alexis)의 펜트하우스는 언제나처럼 싱그러운 꽃향기로 가득했다.
그녀의 개인비서 애슐리 애덤스는 방금 선책을 마치고 돌아온 강아지 네 마리의 간식을 직접 챙겨주었다.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았지만 주인만큼이나 강아지들을 아끼는 그녀가 기꺼이 하는 일 중 하나였다.
이제 제니스의 메일함을 열고 분류 작업을 해야 할 순서다.
Rrrrr.
막 노트북을 열었을 때, 책상 위에 올려 둔 세 개의 휴대폰 중 하나가 진동했다.
[안녕하세요, 애슐리 아담습니다.]
[애슐리, 나 케이트예요. 제니스의 전화기가 꺼져있던데 무슨 일이죠?]
[안심하세요, 카일과 제니스는 지금 병원에 있어요. 상담 중일 거예요.]
제니스의 친구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갑자기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도 아닌데 내가 이래요. 미안해요, 애슐리.]
[괜찮아요, 충분히 이해해요. 당분간 그녀의 전화기가 꺼져있는 일이 종종 있을 거예요. 놀라지 마시고 지금처럼 제게 전화를 주세요.]
[제니스의 상태는 어때요? 내가 혹시 모르는 것이 있으면 알려줘요. 암이 재발했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녀는 전과 마찬가지로 이겨내야 해요!]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하지만 제니스가 결정을 하겠죠. 최선의 결정을 할 거라고 믿어요.]
[알지만 불안해서…….]
[재발이어도 조기에 발견했고 예전보다 치료할 수 있는 방법도 많다고 들었어요. 내가 보기엔 케이트야말로 기운 내야 할 것 같아요.]
위로의 말을 몇 마디 더 건넨 애슐리는 전화를 끊고 바로 이메일을 열었다.
주로 회사 일과 상관 있는 메일들이 들어오는 계정부터 시작해 분류 작업에 들어갔다.
급한 것들, 덜 급한 것들, 그리고 답장이 필요 없는 것들 순이다.
한동안 메일의 분류 작업을 하던 애슐리에게로 강아지 하나가 다가왔다. 낑낑거리는 게 놀아달라거나 안아달라는 소리다.
[릴리, 너도 힘들지? 이리 온.]
강아지를 무릎 위에 올린 애슐리는 다음 메일을 클릭했다.
[Hello, Mrs. Alexis]
Eunjo……? 처음 보는 발신인 이름이었다.
[어떻게 지내세요, 저는…… 누구지?]
***
W 호텔 3601.
늦은 밤, 재하는 처음 서울에 왔던 날처럼 같은 호텔 같은 룸에 있었다.
파자마 바지에 가운만 걸친 그는 통창 아래로 넓게 펼쳐진 도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약 24시간 전 간단한 가방 하나만 챙긴 그는 빌라를 나왔다.
바로 남은 짐을 정리해 줄 사람들이 들어가는 모습을 뒤로하고 차의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 6시간 전에는 블랙스톤 파트너스의 전용기가 뉴욕 존 F. 케네디 국제공항을 이륙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이제 서울에서의 시간은 길어야 10시간 정도 남았다.
차가운 물을 한 모금 넘긴 재하는 쓴웃음을 웃었다.
그 새벽에 미친놈처럼 경찰서로 달려가지 않았다면…….
아니, 그때……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던 너를…… 그냥 한 번 안아줄걸. 괜찮다고 말해줄걸.
너무 보고 싶어서 서울까지 왔고. 단 1분도 참을 수 없어서 달려갔으면서…….
“덜떨어진 놈.”
변한 게 하나도 없는 어리석고 미련한 새끼. 결국 이따위로 끝을 맺는구나.
패배감. 상실감, 무력감……. 어느 게 제일 큰지 모르겠다.
아…… 절망이구나.
다시는. 살아서 다시는, 널 볼 수 없을 거라는 절망감.
“…….”
천천히 몸을 돌린 그는 출입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제, 6년 전처럼 헛된 망상도 떠오르지 않았다.
은조가…… 저 문을 열고 들어올 일 같은 건 절대 없으니까.
오랫동안 너를 미워하고 원망하는 마음으로 살았는데.
어쩌면 다시 널 안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로 숨을 쉬었는데.
결국 널 안고도 내가 이렇게, 철저하게 망쳤구나.
“…….”
은조야…… 내가, 앞으로…… 사람처럼 살 수는 있을까.
***
12시간 후, 인천 국제공항.
권재하를 태운 블랙스톤 파트너스의 전용기가 막 상공으로 이륙했을 때, 입국장으로 들어선 한 사람.
차상윤. 살집이 제법 붙은 그의 얼굴은 건강해 보이는 구리빛이었다.
눌러쓴 야구모자 아래로 걸치고 있던 선글라스를 벗은 그는 마중 나온 사람도 없는 입국장을 두리번거렸다.
“젠장, 장난하나? 내보낼 때는 언제고, 잘 사는 사람을 갑자기 왜 또 들어오라고 난리야?”
제대로 짜증이 난 그는 시간을 확인했다.
당장 들어오라고 했지, 당장 ‘집으로’ 오라고 한 건 아니니까.
씩, 웃은 그는 택시 승강장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