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어떡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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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어떡해
2023.02.27.
그가.
떠났다…….
신약 개발 본부의 이원영 본부장이 JS Pharm의 신임 대표로 선임된 날.
은조는 재하가 뉴욕으로 돌아간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직원들은 이원영이 회사를 맡은 것에 대해 반기는 분위기였다. 무엇보다 전임자가 약속했던 대로 구조조정에 대한 계획이 없다는 것이 희소식이었다.
아무렇지 않아야 하는데…….
왜 이래……. 은조는 울렁거리는 속 때문에 가끔 숨을 참았다. 모니터 안에 있는 커서를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지만 일을 한다고 볼 수도 없었다.
허탈하고, 뭐라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깊게 가라앉는 마음. 그것을 어쩌지 못한 그녀는 그렇게 시간을 허투루 보내고 말았다.
결과는 야근. 집중도 안 되는 상태지만 다음날까지 처리해야 할 일이 있었다.
누군가 책상에 올려두고 간 초코우유가 눈에 들어왔다. 점심을 깨지락거렸던 그녀에게 남긴 작은 위로일 것이다.
동료들의 걱정 혹은 호기심 가득한 눈빛이 내내 그녀를 따라다녔다.
“…….”
혹시 민아와 뉴욕 갈 일이 생길까 아끼려던 월차를 당장 금요일로 잡았다. 얼마간 피곤할 게 뻔하다.
눈치껏 질문은 하지 말아 줬으면 좋으련만, 생각하며 우유의 뚜껑을 비튼 순간 신임대표를 발견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은조는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노크 했는데, 은조 씨가 못 들었어요.”
“네? 아…… 네.”
사람 좋은 미소를 짓는 그가 들고 온 것을 내밀었다.
“유자차예요, 내 거 사다가 은조 씨도 아직 남아 있는 게 생각나서요.”
“감사합니다.”
잠시 유리벽들 사이로 보이는 몇몇의 직원들을 둘러보던 그가 뒷머리를 문질렀다.
“잠깐 앉아도 될까요? 제가 주제넘은 말을 조금 해야 할 것 같은데, 서서 하기가 뭐해서요.”
“……?”
“은조 씨는 그냥 본인 자리에 앉아요. 나는- 여기 앉으면 되겠네요.”
“…….”
그가 동료 직원의 의자를 빼서 앉는 모습을 은조는 둥그런 눈으로 바라보았다.
***
금요일 아침.
평소 출근하는 것처럼 같은 시간 비슷한 차림으로 집을 나선 은조는 버스를 탔다.
이유도 목적도 없이 해바라기 언덕으로 가는 버스에 올라탄 그녀는 자리에 앉자마자 창문을 조금 열었다.
노랗고 붉은 가을 냄새…….
늦여름과 작별 인사를 하는 초가을 바람 냄새.
8년 전, 그가 다시 나타났던 그때와 비슷한 향기가…… 콧등을 시큰하게 만들었다.
카일 J. 알렉시스- 알고 봤더니 권재하.
1학년 2학기, 은조는 갑자기 등장한 그 대단하신 존재를 피해 다니느라 바빴다.
그런데 어떻게 알아냈는지 그가 그녀의 비밀 아지트에 수시로 나타났다. 커피까지 사 들고.
은조는 매번 놀란 눈으로 주위를 살폈다.
나무들 사이에 은밀하게 자리하고 있는 벤치였지만 누구 눈에 띄기라도 한다면 곤란해질 게 분명했다.
[뭐해, 받아. 커피 마시는 게 범죄야?]
[너랑 마시면 범죄나 진배없어.]
큭큭, 남의 속도 모르면서 친한 척, 재미있다는 듯 거리낌 없이 웃었다.
은조는 동그란 눈을 치켜떴다.
귀신같이 알고, ‘또’ 따듯한 커피를 들고 나타난 그를 올려다보며 입술만 잘근잘근 씹었다.
어느새 웃음기가 가신 잘생긴 얼굴이 한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다.
[나, 너무 뜨거워.]
[뭐……?]
검은 벨벳처럼 그 빛이 촘촘하고 깊은 남자의 눈이 그녀의 입술 위에 머물러 있었다.
노골적으로, 터질 것처럼 짓이겨지고 있는 입술 위에 착 달라붙어 움직일 줄 모른다.
[……뜨겁다고. 몹시.]
[너…… 마, 말, 원래- 항상, 이런 식이야? 아님 나한테만 이래?]
[아마, 너한테만.]
[묘하게 다의적이고 암시인 거 알지? 나 불편하게 만들려고 의도한 거라면 성공했으니까 그만해.]
큭큭- 바로 짓궂은 웃음소리를 낸 재하가 들고 있던 종이컵을 그녀 옆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벤치 끝에 걸터앉더니 역시나 긴 다리를 꼬고, 깍지 낀 두 손을 느긋하게 머리 뒤에 뒀다.
은조는 찌푸린 얼굴로 그가 내려놓은 테이크아웃 커피잔을 바라보았다.
[한가하면…… 여자 친구랑 데이트나 하든가.]
[그건 그거고.]
관심 없다는 듯 재하가 발끝을 까딱까딱 흔들었다.
[이제 보고 싶지 않다고 분명히 말했던 거 같은데. 특히 여기서는. 여긴 내 공간이야!]
그래? 자세를 바꾸며 몸을 튼 그가 은조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벤치의 등받이 위로 길게 뻗은 팔의 끝, 큼직하고 섬세한 손가락의 끝이 당장이라도 어깨를 건드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미 의자 끄트머리에 붙어 앉아 있던 은조는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
[굳이 소유권 어쩌고 따지자면, 내 공간에 가까워.]
[……뭐?]
[숀 알렉시스, 기억하지? 대단하신 내 양아버지가 쓸데없이 또 기부금을 엄청 뿌렸거든.]
[…….]
팔을 접어 턱을 괸 재하는 느릿한 시선으로 은조의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훑었다.
[……난 겨우 두 과목 듣는데.]
[그, 그러니까! 넌 이미 미국에서 공부 할 만큼 했잖아. 굳이 네가 차지한 그 자리가 누군가에겐 절실했을 수도 있었어. 그러니까…… 아마.]
말 잘하네- 나른하게 잠긴 목소리, 내리깐 눈 아래로 그림자를 드리운 긴 속눈썹.
그 위로 짙고 가지런한 눈썹과 날카롭게 솟아오른 콧대까지.
이제 모두가 찬양하는, 곱상하다 못해 아름답기까지 한 그 얼굴을 훑고 있는 것은 은조의 눈이었다.
웃음기를 머금은 입술이 빙긋, 보기 좋게 휘어졌다.
[그래서? 다 봤으면 더 지껄여 봐.]
흠칫, 놀란 은조는 얼른 시선을 거두어 버렸다.
[그냥, 난…… 좀 혼자 있고 싶다는 얘기야.]
[굳이 여기서? 내가 또 나타날지도 모르는데 어쩌려고 와, 있. 었. 어?]
[됐어. 너랑 말장난할 기분 아냐. 잘난 네가 날 좀 봐주면 어때. 나 애먹이고 놀려서 너한테 득이 될 게 뭐야.]
[…….]
[지난번에 네가 운운한 그 옛정을 생각해서라도 말이야!]
잠잠하다- 휙 고개를 돌려보니 지그시 감은 눈이 보였다.
[권재하! 내 말 들었어?]
[…….]
[권재하! 안 들려!]
[들었어. 아주 잘.]
[그런데!]
[그거 다 마시면 가지 말라고 붙들어도 갈게.]
[가지 말라고 붙들 일은 없어, 절대.]
[과연?]
[…….]
반짝, 열린 그의 눈과 자신의 눈이 마주친 순간 은조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왜 갑자기 심장이 쿵쾅거리고 차가운 것을 뒤집어쓴 것처럼 으스스 떨리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마셔, 식으면 맛없어.]
팅- 머릿속에서 팽팽하던 실이 끊어지는 것 같은 소리가 들리더니 ‘피할 수 없을 거야’라는 속삭임 연달아 들렸다.
귀신이라도 씌었나. 이게 무슨 가당치 않은- 은조는 고개를 세게 가로저었다. 너무 화가 난 나머지 머리가 어떻게 된 모양이다.
확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느끼며 커피로 손을 뻗은 순간,
툭- 손과 부딪친 종이컵이 바닥으로 엎어져 버렸다.
순식간에 사방으로 튄 커피 방울들.
재하가 입고 있던 연한 베이지색 팬츠의 발목 부분과 고급스러운 갈색 로퍼에 여러 개의 검은 점이 생겨버렸다.
[어떡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은조는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우왕좌왕했다.
어쩔 줄 몰라 하며 작은 손을 재하에게 대려다 말고, 다시 내밀다 거두는 동작을 반복했다.
큽- 그가 또 짓궂게 웃었다.
[뭘 어떡해, 너야말로 운동화 그거 하날 텐데 어떡해.]
[아…… 음, 더 있어. 구두도 있고…….]
하하하- 주름이 잘 잡힌 바지와 명품 로퍼를 버린 남자가 허공을 향해 소리 내어 웃었다.
[윤은조. 아무리 봐도 넌 아홉 살 때랑 달라진 게 하나도 없다.]
[칭찬이야- 뭐야. 아무튼, 이제 이런 거 하지 마. 나 너무 불편해.]
[이런 거? 뭐? 네 꽁무니 따라다니는 거?]
뭐? 갈팡질팡 길을 잃고 엉망이 된 주변을 헤매던 다갈색 눈동자가 크게 벌어졌다.
[무슨 헛소리야? 네가 언제 내 꽁무니를 따라다녔다고, 너 그 무용과 신입생…… 그 애 사귀는 거 온 학교가 다 아는데!]
[잘도 아네.]
시큰둥하게 받아친 재하는 은조의 눈동자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옛날보다 더 옅어져 있었다. 아니, 석양의 오렌지 핑크빛이 묻어났기 때문인가.
[너랑 얽혀서 남들 입에 오르내리기 싫어, 안 그래도 나…… 피곤하고 힘들어.]
[…….]
살랑거리는 바람 안에 낙엽 냄새가 있었고 그녀가 쓰러뜨린 커피의 향기도 진하게 배어 있었다.
어디선가 나타난 하얀 나비가 나풀나풀 날개를 나부끼며 그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재하의 검고 깊은 눈동자 안에서 잔잔한 파장이 일었다.
[윤은조.]
[이런 얘기까지 하고 싶지 않지만 주 수입원을 잃었어. 네가 보태지 않아도 머리가 너무 아파.]
[누가 피곤하게 살래.]
[…….]
[공부는 좀 하는지 모르겠지만 너 영 멍청해.]
[뭐? 말 다했어? 나한테 혼나고 싶어?]
[설마. 다른 거 하자.]
[권재하!]
[오빠라고 불러 봐.]
[이…… 미친-.]
[왜? 예전엔 오빠 오빠- 입에 달고 살았잖아. 이거 해줘, 저거 해줘. 심지어 안아줘, 뽀뽀-.]
[갈래!]
자리에서 일어서려던 은조의 손목을 재하가 낚아챘다.
[같이 살자.]
[……뭐? 방금 뭐라고 했어?]
[뭘 놀라, 같이 자자고 한 것도 아니고 그냥 같이 살자는데.]
[…….]
[난 너무 영악해 빠져서 방이 네 개나 있는 아파트에 살아. 아, 이미 알고 있지? 이놈의 학교에 내 사생활이나 캐고 다니는 병신들이 차고 넘치니 모르려도 모를 수가 없잖아.]
[그, 그거야 네가 워낙…….]
[잘나서. 알아. 됐고, 계산은 네가 해 봐. 교통비, 오며 가며 버리는 시간 등등.]
[…….]
[참, 식사도 제공이야. 냉장고에 묵혔다 버리는 게 못해도 네 한 달 식비의 세배는 될걸.]
[뭐라고? 너 정말…….]
주먹을 불끈 쥔 은조는 결국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놈의 고집. 이제 세상이건 현실이건 타협 좀 하자. 응?]
[너처럼?]
[그래 나처럼. 난 열 살에 한걸. 넌 왜 여태 붙들고 애를 쓰는데?]
말을 마치자마자 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간다.]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기는 그는 은조의 시야에서 금세 멀어졌다.
“…….”
차창 밖으로 움직이는 물체들의 모양이 부옇게 변해 있었지만 은조는 몰랐다.
힐끗거리는 옆 사람을 느끼고 나서야 차갑게 젖은 뺨을 손으로 훔쳤다.
아침 출근 버스에서 우는 여자.
은조는 제 모습에 쓴웃음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