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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들어오시라고요, 며느님 (79/100)


79. 들어오시라고요, 며느님
2023.03.02.



 


“윤, 은조 씨요?”

“네.”

간단하게 제 소개를 한 은조에게 원장 수녀님의 시선이 머물러 있었다. 반짝거리는 눈동자가 짙은 호기심을 품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군요.”

“……?”

“아! 마침 월요일은 별관 청소를 도와주시는 분들이 오시는 날이에요.”

“다행이네요, 제가 그분들 사이에 끼어도 될까요?”

“…….”

수녀님이 또 멈칫하시더니 눈만 껌벅거리신다. 예고도 없이 들이닥쳐서 무슨 일이라도 하고 싶다고 말하는 여자가 좀 이상해 보였을 수도 있겠지. 혹시 운 거 티 나나?


“……제가 너무 이른 시간에 왔죠?”

“어머, 나 좀 봐! 죄송해요. 일단 좀 앉으세요.”

“……네.”

은조는 수녀님이 가리킨 의자에 앉았다.


“너무 이른 건 아니고 30분 정도 여유가 있네요, 차 한 잔 드릴게요.”

“그…… 별관이라면, 보호가 끝난 친구들이 머무르는 곳이죠?”

“맞아요. 녹차 괜찮으시겠어요? 커피가 마침 떨어졌거든요.”

“네, 좋아요. 커피- 제가 이따 사다 놓을게요.”

“감사해요, 그런데 봉사하시는 분 중에 한분이 이미 가지고 오고 계세요.”

투박한 머그잔에 차례로 뜨거운 물이 채워졌다.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수녀님의 얼굴이 발그레하다.


“아, 그럼 뭐 다른 거 필요하신 거 있으면 알려주세요.”

“이렇게 와주신 것만으로도 너무 고마운걸요, 여기요.”

수녀님이 내민 잔을 받아든 은조는 저도 모르게 옅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제 이곳에 아는 이는 없지만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라서 그런지 흔들리던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는 것 같았다.


“커피보다 훨씬 좋아요, 감사합니다.”

다행이에요- 수녀님이 고개를 끄덕이셨다.

버스에서 내려 이곳까지 언덕길을 조금 올라오는 동안 은조는 주변을 찬찬히 살폈다. 당연한 거지만 참 많이 달라져 있었다.

아이들이 안전하게 다닐 수 있는 길도 충분히 확보되어 있었고 카페며 큰 편의점, 근사해 보이는 베이커리까지.

10년 전, 만 열 여덟이 된 은조는 같은 길 위에 멈춰 서서 눈물을 참았었다.

어디로 가서 어떻게 살아야하나 눈앞이 캄캄했고 또 버려진 기분이었었다.

그런데 이젠 해바라기 언덕 건물 뒤로 훌쩍 큰 건물이 서있다. 마치 동생을 지켜주는 큰 오빠처럼 듬직하게 말이다.


“별관이 생각보다 커서 놀랐어요.”

“……앞으로 자주 와요. 아니- 내 말은…… 너무, 반가워서…… 아휴, 내가 왜 이래. 별관이- 그러니까, 2인실 4인실 모두 합쳐서 방만 12개예요. 식당과 도서관이 따로 있고요. 이제 보호가 끝났다고 쫓기듯 이곳을 떠나는 아이는 없어요. 너무 감사한 일이에요.”

은조는 다시 소녀처럼 얼굴을 붉게 물들이시는 수녀님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감사함의 대상이 자신일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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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 이 분이 윤은조 씨래요!”

수녀님으로부터 은조의 이름을 들은 봉사자 하나가 다른 이들에게 외쳤다.

앞치마를 두르고 장갑을 끼는 등 제각기 분주하던 봉사자들의 시선이 일제히 은조에게 쏠렸다.


“정말이야? 그 윤은조?”

“할머니 아니었어요? 아가씨가 그 윤은조 씨 맞아요?”

“세상에…….”

“아니. 여태 어디서 뭘 하다 이제야 나타나셨대?”

“어디, 자세히 좀 보십시다.”

순식간에 아주머니들에게 둘러싸인 은조는 놀라서 큰 눈을 껌벅였지만 원장 수녀님은 그저 웃으셨다.


“자자, 여러분. 이 분은 지금 이 사태의 연유를 모르실 것 같으니까, 직접 보여드릴까요? 가시죠!”

 

.
.



“……!”

은조는 그것을 본 순간 얼어붙어버렸다.

보통 ‘머릿돌’이라고 불리는 그것. 건물의 설계자나 시공사, 준공일 등이 적혀 있는 그것을 눈여겨보는 이가 있을까. 내용이라고 해 봐야 다 거기서 거기니까.

그런데 은조가 본 그것은…….

[누군가의 보호와 기도가 필요한 이들을 위해-

20020620 윤은조]

대리석 위에 단정한 글씨로 새겨진 숫자와 이름…… 그것은 마치 비밀의 메시지 같았다. 물론, 남들이 보기에 말이다.

은조는 당연히 그 숫자의 의미를 알고 있다.

재하가 건넨 반지, 그 안에 작게 새겨 넣은 숫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똑똑히 들었었다.
 


[넌, 기억 안 나지? 우리가 처음 만난 날이야.]

 
그의 눈웃음은…… 간절함을 담고 있었다. 미국으로 같이 가자고 며칠째 그녀를 설득 중이었으니까.


‘……내, 반지.’

검은 강물이 삼켜버린 반지와 분홍색 손수건에 곱게 싸매서 가방에 넣었던 내 반지…….

또 엉켜버린 실타래처럼 머릿속이 뒤죽박죽이 되려던 찰나, 수녀님의 손길을 느꼈다.


“난 아까 은조 씨 이름 듣고 기절할 뻔 했어요. 사실 아이들에게 들어서 어떤 분인지 대충만 알고 있었거든요. 너무 반갑고, 고맙습니다.”

따듯한 손이 은조의 힘없는 손을 꼭 쥐고 토닥거렸다.


“……수녀님, 실은 저도 제 이름이 왜 여기 있는 건지…… 몰라요.”

“그야, 지어주신 분이 은조 씨 이름으로 기부하신 거니까요. 누군지는, 아시죠?”

짐작은 하고 있었다.

별관을 지은 사람이 그일 거라는 것을. 재하가 학교에 나타났을 무렵 아이들을 위한 건물이 세워지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후 슬쩍 물어본 적도 있었지만 재하는 그럴 때마다 말을 돌렸다.

분명 지나가는 말로 ‘별것도 아닌걸’이라고 한 것도 기억한다. 별것도 아닌 작은 건물 하나라서 내 이름을 새겼나.

하긴 이런 작은 빌딩에 ‘카일 알렉시스’라는 대단한 이름은 걸맞지 않는다.


“…….”

얼굴이 달아오른 은조에게 봉사자들의 질문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거 전설인데- 아니, 설화라고 해야 하나? 박 여사, 뭐라고 해야 돼?”

“전설은 뭐고 설화는 뭐여, 로맨스 아녀?”

“로맨슨지 뭔지는 돈을 대주신 남자분 신상을 알아야죠, 은조 씨? 말 좀 해줘요- 우리가 이제까지 얼마나 궁금해했는데요.”

“전에 누구야, 그 회계사 된 꼬맹이? 진영이! 그래, 진영이는 둘이 애인 사이라고 하던데 맞아요?”

“미국 양반이 지어줬다며? 어떤 사이래요? 미국 부자라고 하던데.”

뭐라고 말을 해야 하나 망설이던 은조는 급하게 손으로 입을 막았다.

가까이 다가온 봉사자 중 한 명에게서 나는 냄새, 익숙한 꽃향기. 섬유 유연제 같은 은은한 향기가 그녀의 속을 뒤집어 놓았기 때문이다.


“아니, 어디 불편해요? 얼굴이 창백…….”

“……읍.”

구역질을 하며 허리를 꺾은 순간 곁에 있던 수녀님이 그녀를 부축했다.


“이걸 어째! 기운이 없어 보이던데 무슨 봉사를 하시겠다고. 저한테 좀 기대세요.”

한순간에 환자가 돼 자리를 뜨던 은조는 뒤에서 들린 소리에 흠칫했다.


“입덧하네. 유부녀였어요? 아이고, 로맨스니 뭐니 괜한 소리를 했나 봐.”

 

***

수녀님에게 양해를 구한 은조는 바로 택시를 잡아탔다.

그런데 이번에는 택시 안에서 나는 냄새가 문제였다. 기사분이 씹고 있는 껌 냄새였다!

스물셋, 뉴욕에서 올라탔던 택시. 친절했던 기사. 그리고 그 껌 냄새……. 머리가 빙글빙글 돌고 세상이 빙글빙글 돌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닐 거야.”

 

.
.



“……제발.”

택시 안에서 중얼거리던 부정적이던 말은 어느새 간절한 바람으로 바뀌어 있었다.

산부인과 대기실에 앉아 있는 은조는 눈앞을 지나가는 배가 부른 여자들을 바라보았다. 꿈을 꾸는 기분이 되었다.

6년 전 그때, 그 병원 대기실에 앉아 있던 그날로 시간을 돌린 것 같았다.

다만 달라진 게 있다면. 지금은 간절하게 너무나 절실하게 임신이길 바란다는 점이었다.

영원히 서로를 지켜주고 사랑할…….


“내 아이…….”

 

 

***



“아가씨, 도착했습니다.”

수행비서의 말에 자동차 뒷좌석에서 졸고 있던 나나가 기지개를 켰다.


“에이- 짜증 나.”

지난 밤 그녀는 뉴욕에 있는 친구- 아니, 정보원과 긴 통화를 하느라 새벽에 겨우 잠들었다.

통화 내용은 당연히 뉴욕으로 돌아간 권재하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가 좀 화가 나서 이상한 결혼식을 준비한 건 이해하고 지나가기로 마음먹었다. 권재하를 차지하기 위해서라면 더한 것도 감당해야 한다고 일찌감치 마음먹은 그녀였으니까.

어쨌든 상황을 끼워 맞춰보니 윤은조와 찢어진 게 분명했다.

신이나서 냅다 샴페인 한 병을 비운 나나는 단잠을 청했지만 얼마못가 누군가 그녀의 어깨를 흔들었다.

그렇게 눈곱도 떼지 못하고 내려간 거실에서 아버지 왕덕진으로부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었다.


[……어디요?]

[시댁이라는 말 모르냐? 차 의원 댁 말이다.]

[……아빠, 지금 뭔 소릴 하는 거야? 결혼 파투 났잖아! 쫑 났다고!!]

[쫑같은 소리 하네. 너, 결혼식 전에 혼인신고 한 거 기억 나, 안 나?]

[차상윤 그 새- 걔가 없는데 뭔 시댁 같은 소리야!! 엄마 어디 있어? 엄마!!]

산발을 한 나나는 제 어미를 찾았지만 왕덕진은 보고 있는 신문에서 눈도 떼지 않았다.


[네 어미 출근했어, 중요한 회의가 있어서. 거, 잠 좀 깨고 어서 서둘러! 내가 아주 지긋지긋하다.]

[…….]

[너 그 얼굴만 봐도 나는 이제 진절머리가 나.]

[…….]

[딸X 하나 때문에 이 왕덕진이가 이게 무슨 꼴인지.]

혀를 찬 왕덕진은 권재하의 비서에게서 걸려 온 전화를 떠올렸다.

미국으로 돌아갈 예정인 권재하가 마지막으로 지시한 일이 나나의 결혼을 정상으로 돌려놓는 거라고 했다.

저를 ‘에드워드 강’이라고 소개한 놈은 권재하 못지않게 차갑고 용의주도했다.

대(大) DL 그룹의 회장을 위협하는데 일말의 주저함이 없는 게, 제 상관보다 더욱 질이 나쁜 놈임이 분명했다.
 


[작은 오해에서 비롯된 해프닝으로 곧 기사도 나갈 겁니다. 따님이 단정한 새색시로 보이면 하락한 주가도 곧 정상 궤도로 올라설 테고요, 안 그렇습니까, 회장님.]

 

.
.



[옷 단정하게 입고! 에비 말 들었어?]

2층으로 향하던 나나의 등 뒤에다 대고 왕덕진이 외친 소리였다.


“언제는 내가 단정하지 않았나?”

자동차에서 내려 대문 쪽으로 다가가는 나나는 짧은 스커트를 툭툭 털었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던 비서가 초인종을 눌렀다.


“헐, 뭐야? 차상윤 거지였어?”

수수한 2층 집을 훑은 나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들어오시랍니다.”

“엉?”

[들어오시라고요, 며느님.]

인터폰을 비집고 나온 목소리는 꽤 냉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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