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비행기를 띄워서 모셔와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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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비행기를 띄워서 모셔와야겠지
2023.03.06.
[들어오시라고요, 며느님.]
“……!”
덜컥- 묵직한 나무 대문의 잠금 장치가 풀렸다.
나나는 잠시 멍한 얼굴로 수행비서를 바라보았지만 그가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저는 그럼 캐리어를……."
자동차로 다시 돌아가는 그를 보며 얼굴을 잔뜩 구긴 나나는 대문을 밀었다.
"……."
제 집과 비교하면 반의 반의 반도 안 되는 작은 정원이 눈에 들어왔다.
"차상윤 개뿔도 없으면서 오지게 폼만 잡은 거 맞네."
나무며 꽃이며 작은 화분들까지 지나치게 깔끔하게 다듬어지고 정리된 정원을 보던 나나는 한마다 더 보탰다.
"초장부터 참 정 떨어져."
허리에 양손을 올리고 혀를 차는데 현관문이 열렸다.
"헐."
이게 무슨 황당한 시추에이션이야- 나나는 제 눈을 의심했다.
이혜정은 방금 한복 카탈로그 촬영을 마친 모델처럼 보였다. 어깨에 자수가 놓인 은회색 저고리와 다홍색 치마. 쪽진 머리까지. 미쳤다.
"방금 그게 인사예요, 며느님?"
"……네?"
"헐."
"……?"
"헐- 그게 처음 시댁에 와서 시어머니를 보고 하는 인사냐고 물었어요, 며느님."
"아, 아뇨. 혼잣말이죠! 감, 탄사?"
"……."
차림새만큼이나 우아하게 고개를 끄덕인 이혜정이 자리에 그대로 서있다.
아, 씨- 어쩌라는 거야? 나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껌벅거렸지만 독심술을 하는 재주는 없었다.
눈꼬리를 올린 이혜정이 작게 한숨을 내쉬는 것이 보였다.
"쉽지 않을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인사법 정도는 사부인이 가르쳐 보낼 줄 알았는데."
쯧쯧쯧- 이혜정이 대놓고 면전에서 혀를 차자 나나의 얼굴이 더욱 우그러졌다. 이제껏 누구도 저한테 이런 대접을 한 사람은 없었다. 물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오기는 왔지만 이혜정을 시어머니로 인정할 필요도 못 느꼈다. 빨리 이 지겨운 쇼를 끝내고 뉴욕으로 가야 한다는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했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빤빤한 나나의 인사에, 흥- 작게 콧소리를 낸 이혜정이 다시 우아한 표정을 만들었다.
"들어오세요, 며느님."
현관문 안으로 사라진 이혜정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나나는 손에 들고 있던 휴대폰을 내려다 보았다.
"에이- 찍어둘걸. 아쉽다."
.
.
"네에??"
코딱지만 한 방으로 안내된 것도 기가 막힐 노릇인데 뭘 입어?
"새색시가 당연히 한복을 입어야지 뭘 놀라고 그래요? 이거 최규옥 디자이너 작품이에요, 입고 있는 옷이 품위 있으면 행동은 자연스럽게 품위를 갖추는 거 알고 있죠, 며느님? 오늘 입고 온 그런 옷은, 좋아 보이지만 당분간 입을 일이 없지 않을까 싶어요.”
귀에서 피가 난다는 말을 장난으로만 썼었는데.
나나는 정말 귀에서 피가 흐르는 느낌이 들었다. 손을 올려 귓가를 문질러보았지만 멀쩡하다.
피라도 흘리면 핑계로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은데.
'시X. 그놈의 며느님, 며느님, 며느님.'
욕을 삼킨 나나는 억지로 미소를 만들었다.
"어머니. 그런데 차상- 상윤 오빠는……."
"며느님! 그 호칭부터 제대로 하지 않으면 내가…… 아휴, 머리야. 얘 아가, 내가 혈압이 좀 높단다."
"저도 혈압은 높은 편인데요?"
"……."
입이 한일자로 굳어진 이혜정을 바라보던 나나는 어깨를 한 번 들썩였다. 그리고 스스럼없이 재킷을 벗어 한복이 놓여있는 침대 위로 던졌다.
휙, 등을 돌린 이혜정이 방을 나가버렸다.
"얘 아가, 내가 혈압이 좀 높단다~ 웃기셔! 그래서 뭐? 어쩌라고?"
신경질적으로 블라우스 단추를 풀어버린 나나는 금세 속옷 차림이 되었다.
호피 무늬 속옷만 걸친 그녀는 한참이나 침대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희고 고운 속옷들을 들여다보았다.
적삼, 속치마, 단속곳, 버선 등이었지만 그녀가 알 리 없다. 아니, 관심이 없다.
명품 옷을 제외하고 그녀가 아는 옷이라는 것은 아름다운 색깔의 레오타드와 워머, 타이즈나 포인트 슈즈가 전부다.
누구도 감히 왕나나에게 입기 싫은 것을 걸치라고 한 적은 없었다.
"아 씨- 뭐가 이렇게 많아……."
뭐부터 어떻게 꿰어 입어야할지 고민하던 그녀는 하품을 크게 했다. 낯선 세상에 던져졌지만 쏟아지는 잠은 정말이지 참을 수 없었다.
촌스러워- 아주 작은 꽃무늬가 있는 이불을 툭툭 건드려 본 나나는 잠시만 침대 위에서 쉬기로 결정했다.
한 것도 없는데 정말 피곤한 아침이었다.
***
"혹시, 원치 않은 임신인가요?"
의사는 너무 놀란 얼굴이 분명한 은조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니요! 아니에요……."
뭐라고 표현이 안 될 정도로 놀랍고…… 어떻게 이런 일이 생겼는지 믿어지지도 않았다.
"괜찮아요, 은조 씨?"
"네, 그럼요. 너무 기뻐서…… 믿을 수가 없어서 그래요. 죄송해요."
"죄송할 것 없어요. 서두를 것도 없고요."
"선생님, 사실 저는……."
은조는 자신이 겪은 일에 대해 이야기했다.
6년 전, 뉴욕에서 겪은 사고와 응급실에서 수술을 거부하다 염증으로 한쪽 난소를 잃은 일.
남은 한 개의 난소도 제 역할을 거의 못 해 앞으로 임신이 될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다는 불임진단을 받은 일. 생리는 불규칙했고 안 하는 달도 많았던 점. 그래서 자신은 이제 아이를 영원히 못 가질 줄 알았다고.
"불임(infertiltiy)’이라는 말과 ‘임신 불능(sterility)’이라는 말은 뜻이 다른데요. 임신 불능은 쉽게 말해서 자궁이 없거나, 치명적인 구조적 결함 등 현대 의학으로는 도저히 임신이 불가능하다고 판정된 경우를 의미해요."
친절한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는 은조는 어느새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네.”
"의사들이 말하는 의학용어로서의 불임과 일반인들이 이해하는 통상적인 불임에는 큰 차이가 있어요. 대부분 ‘임신 못 한다’로 받아들이니까요. 아무래도 뜻이 애매한 단어가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경우라고 봐야 할 거예요. 하지만 의사 입장에서는 의학적 정의상 불임이라는 결과를 정확하게 알려주는 게 맞거든요."
선우도 비슷한 말을 했었다. 의학적 정의가 그렇다는 거지, 누구도 섣부르게 단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하지만 깊은 절망에 빠진 그녀에게 그 말은 그저 의미 없는 위로로 들렸던 것이다.
"설명이 길어졌는데, 어쨌든 은조 씨에게는 그 어려운 행운이 찾아온 거예요. 다시 한번 축하해요, 산모가 너무 기뻐해서 저도 기분이 좋네요."
“……감사합니다.”
눈물을 훔치는 은조는 웃고 있었다.
***
이틀 뒤, 은조는 휴직을 결정했다.
아무도 모르게 혼자서 유난을 떨기로 작정한 것이다.
반드시 아이를 지키겠다는 생각, 오로지 아이에게만 집중하겠다는 생각이 확고했다.
그리고 윤은조 인생 처음으로 실컷 자고 실컷 놀고 적게 일하기로 마음먹었다.
.
.
조심스럽게 임신 사실과 휴직 결정을 민아에게 털어놓던 밤.
은조의 말을 가만히 듣고만 있던 민아가 갑자기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언니…… 실은 나도 아기를 가졌어.”
“뭐? 그걸 왜 이제 말해! 선우 씨는 알아?”
“아직…… 흐흑.”
“당장 알려! 어른들께도 알려드리고, 얼마나 좋아하시겠어!”
“언니는? 권재하 씨 아이 맞잖아. 알릴 거지?”
민아는 아이 아빠 없이 출산을 하는 게 어떤 건지 알고 있다. 언니가 곁에 있어 줬지만 언니가 권재하 씨 없이 출산하게 만들 수 없었다. 절대로.
“알려야지, 하지만 당장은 아냐. 지금은 그냥 온전히 내 아기야. 내 전부고 나 자체야. 알리는 게 급할 것 없어.”
“또 딴 여자랑 약혼이라도 하면 어쩌려고? 당장 알려!”
은조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뭐. 나는 아기만 있어도 세상을 얻은 거나 마찬가진걸.”
“뭐? 진심이야? 안 돼! 내가 그렇게 못해!”
“뭘 네가 그렇게 못해?”
민아는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자꾸 웃기만 하는 은조에게 눈을 흘겼다.
“그러지 마! 나 불안하게 하지 말라고, 나도 임산부야!”
“알았어, 적당할 때 말할게. 그만 좀 해.”
급하게 서두르다가 전에 어떤 일을 당했는데. 아이가 무엇보다 우선이야.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아.
민아의 눈물 자국을 문질러 준 은조는 얼마 전 꿈에서 본 엄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
한편, 은조의 메일을 떠올린 제니스는 한숨을 쉬었다.
반지를 돌려주고 싶어 하는 그녀. 뉴욕으로 돌아 온 재하의 분위기. 모든 게 부정적인 사인을 보내고 있었다.
“재하, 너 최근에 웃은 적이 한 번도 없어. 알고 있어?”
"글쎄요, 웃을 일이 있어야 말이죠. 할머니는 치료를 미루시고 있잖아요. 게다가 저를 갑자기 ‘재하’라고 부르시고. 참, 제가 작은 출판사를 하나 산 건 아시죠? 그 문제 때문에 골치가 아팠어요, 며칠.”
오랜만에 늦은 아침 식사를 함께한 두 사람은 햇살이 잘 드는 거실에서 홍차를 마시는 중이었다.
"작가를 찾느라고 애쓴다고 들었어."
"실은 적당한 사람을 찾았어요. 결정에 시간이 좀 걸릴 뿐이죠."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재하는 주위를 맴도는 따듯하고 근사한 베르가모트 향기를 들이마셨다.
새롭고 작고, 흥미로운 사업의 시작. 그것은 뉴욕으로 돌아오던 비행기에서 읽은 기사에서 시작되었다.
한국 문화와 전통을 소개하고 한국 문학을 출간하는 출판사는 파산 위기에 처해 있었다.
재하는 좋은 기업을 살리기로 마음먹었다. 더욱 바빠지기로 결심했다.
자꾸 손을 내미는 절망을 외면하기 위해서였다.
"누군지 궁금하구나, 네가 출판을 맡을 첫 작가가. 어떤 책이지?"
"작가는 저고, 돈 버는 방법에 대해 쓸 예정이에요.”
이제야 보기 좋은 미소를 만든 손자를 향해 제니스가 환하게 웃었다.
"카일! 역시 나를 놀라게 만드는구나, 멋져!"
"너무 기대하지 마세요. 회사의 운명을 남에게 맡길 수 없어서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이에요. 한정판이 될 거고요.”
“한정판이라면 더 끌리는 법이지!”
제니스가 장난스럽게 눈썹을 찡긋거렸다.
.
.
그날 저녁, 제니스는 두 가지 결정을 내렸다.
하나는 주치의가 권한 신약 치료를 받기로 한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은조에게 줬던 반지를 돌려받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꼭 돌려주고 싶다고 하니까, 가지고 오라고 해야겠다. 그렇지, 릴리?”
그녀는 품 안에서 잠든 강아지를 쓰다듬었다.
“그러려면, 내 비행기를 띄워서 모셔와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