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반짝반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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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반짝반짝
2023.03.09.
[아, 글쎄- 며칠 있다 들어갈게요!]
“야!! 너 엊그제도 그렇게 말했잖아! 당장 안 들어오면 내가 아주 그냥…….”
아들 상윤과 통화를 하던 이혜정은 슬쩍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바라보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아주 그냥 뭐요?]
“아휴, 내가 어쩌다가 너 같은 걸 낳아서…… 며느리라고 들인 건 또 어떻고.”
매일 늦잠이나 처자는 나나를 겨우 참고 있는 건 다 아들 놈 때문이었다.
식장에서 도망을 가 부모를 개망신 시키더니 무슨 돈이 있는지 하와이에서 신선놀음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이제 그만 잘난 사돈이고 나발이고 포기하려던 찰나, 상윤이 귀국했으며 며느리도 집으로 들어온다는 전갈을 받았다.
도대체 이놈의 결혼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지만, 이혜정의 가장 큰 관심은 오로지 DL 그룹을 등에 업는 것뿐이었다.
그녀가 감히 마음 속 깊이 일국의 영부인(令夫人) 자리를 품었다는 사실은 남편 차대성만이 알고 있다.
[엄마, 일단 나나 그 계집애나 한번 사람 비슷하게 만들어 보시든가요. 그럼 바로 들어갈 테니까. 아휴- 내가 엄마에 그거까지 있는 집에 들어갈 생각만 해도…….]
“야, 이 개X의 새X야!! 찢어진 입이라고 말 함부로 하지! 엄마에 그거? 그래, 말 잘했다. 그게! 저, 저- 2층에서 처 자빠져 자고 있는 그게! 사람 속을 얼마나 박박 긁어대는지 알기나 해?”
[언제는 좋아서 펄쩍 뛰시더니. DL 외동딸이 웬 말이냐며 박수까지 치셨잖아요.]
“누가 알았어!! 저 정도까지 덜떨어지고 등신인 줄 누가 생각이나 했냐고!!!”
[제가 말씀드렸었죠, 각오 단단히 하시라고요. 아실만큼 아시는 분이 보고 싶은 부분만 보려고 하시더니.]
“아니, 처음 온 날부터 아주 내 속을 뒤집어 놓으려고 작정을 한 거 같아, 저게. 옷 갈아입으라고 내 그 비싼 한복까지 직접 대령했더니, 글쎄…… 아휴, 골치야. 그냥 하는 짓이 어디서 보고 배운 것 없이 자랐어도 그렇게는 못 한다.”
[같은 말 또 시작이시네. 하…….]
상윤이 땅이 꺼지게 한숨을 내쉬었지만 이혜정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천둥벌거숭이 같은 게 제 집에서나 하던 짓을 해대는데, 저 자고 싶으면 자고 밥도 먹고 싶을 때 먹고 위아래도 없고…… 헙.”
혜정이 놀라 손에 쥐고 있던 전화기를 떨어뜨렸다.
언제부터 듣고 있었던 건지 잠옷 차림의 나나가 계단 위에 서 있었다.
“얘, 너 아버님 계시면 어쩌려고- 아니 아버님이 안 계셔도 그렇지, 옷차림이 그게…….”
“그래서 지금 일어났잖아요, 어. 머. 니. 아버님 출근하시고 나서요.”
‘어머니’라는 단어를 뱉어내듯 힘을 줘서 말한 나나가 계단을 내려왔다.
“차상윤 어디래요? 상수동? 합정동인가, 그 방송국 다니는 계집애 집에 있다고 알고 있는데.”
“뭐어?? 차상윤? 그게 무슨 되먹지 못한 말본새야?”
“그럼, 저도 개X의 새X라고 불러드려요? 어. 머. 니? 하~암~.”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소파에 털썩 주저앉은 나나가 아줌마를 찾았다.
“아주머니!! 좀 이따 배달 올 거예요. 받아서 2층으로 가져다줘요.”
“……너, 또?”
“네, 말씀드렸잖아요. 이 집 음식은 제 입맛에 안 맞는다고요. 샌드위치하고 커피 먹으려고요. 뭐 대단한 것도 아닌데 얼굴 좀 펴세요.”
“…….”
말간 얼굴로 꼬박꼬박 대꾸도 잘하는 며느리를 바라보는 이혜정이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나나는 그런 혜정을 향해 경멸의 눈초리를 숨기지 않았다. 여전히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모양이 제대로 돈 여자처럼 보인다고 생각했다.
‘차상윤 대단하네. 이런 데서 어떻게 살아남았대?’
그가 좀 안쓰럽고 아주 약간은 이해가 가기도 했다.
“아, 배고파.”
“얘, 아가. 이건 나중에 말하려고 했는데. 미리 알려주마.”
힐끗 주방 쪽을 살핀 이혜정이 비밀이야기라도 나눌 생각인지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네? 미리요??”
그게 뭐든 시작도 하기 전이지만, 나나는 듣기 싫다는 투로 말끝을 한껏 높였다.
“내가 일부러 널 괴롭히는 것 같니? 내가 왜? 뭐 때문에?”
“헐.”
“그놈의 헐!”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이려던 이혜정은 이를 악물었다.
“닥치고 잘 들어. 네 시아버지가 다음 대선(大選)에 나가실 거야!”
“네? 어딜요?”
나나가 이번에는 진심으로 놀라서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 놀랍지? 잘 생각해 보거라, 그럼 나는 뭐가 되고, 너는 또 뭐가 되는지.”
“맙. 소. 사.”
“뭐??”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똑같은 시선으로 서로를 빤히 쳐다보았다.
‘미쳤네.’
‘미친X.’
***
은조는 살면서 본인이 운이 좋다고 생각한 적이 별로 없었다.
높은 성적이나 좋은 학교, 장학금과 직장 등 대부분은 낙오되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와 피나는 노력의 결과물이었다.
그래도 생각해 보라면, 짧은 생이 끝났다고 믿은 절망의 순간에 동생을 찾은 것. 그 동생에게서 귀한 다온이를 얻은 것.
그리고 첫 직장에서 만난 인간적이고 능력 있는 선배와 동료들…… 그 정도.
“그런데…… 이렇게.”
납작한 아랫배 위에 손을 올려둔 은조는 4분으로 맞추어놓은 타이머의 숫자가 변하는 모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매일 아침 내리던 커피 대신 홍차를 우리는 중이었다.
“언니 물 넉넉히 넣었지? 차는 여릴수록 몸에 좋대.”
다온이에게 아침을 먹이는 민아가 말했다.
“……응.”
다른 병원에 가 볼까……? 은조는 점점 더 붉어지는 유리 주전자로 시선을 옮겼다.
“언니?”
“그래, 네 몫까지…… 넉넉히 넣었어.”
“일어나지 마자 그 생고생을 하고도 또 의심을 하시네. 내가 뭐가 되냐고.”
“……응?”
“저 봐. 미치겠다, 정말.”
민아가 못 말리겠다는 듯 눈알을 굴렸다.
자꾸 본인의 임신사실을 의심하는 은조를 수시로 일깨워줘야 하는 게 요 며칠 민아의 중요한 일과였다.
띠르르- 띠르르- 마침 울린 알람을 끈 은조가 작게 따졌다.
“뭐가? 내가 너더러 뭐라고 했어?”
“그렇잖아, 언니는 온몸으로 음음했다고 난린데, 나는 음음했어도 너무 멀쩡하니까. 그런데 부정은 또 언니가 해. 대체 테스트기를 몇 개나 더 써야 그만둘래?”
“……뭘 그만둬.”
투명한 잔에 붉은 홍차를 쪼르륵 따르는 은조가 시치미를 뗐다.
“음음한 게 진짜인가 의심하는 거지, 뭐긴 뭐야! 병원을 가자, 차라리.”
“에잉!!”
갑자기 다온이가 숟가락을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넌 또 왜?”
민아에게서 불퉁한 목소리가 나왔고 은조는 차를 따르던 손을 멈추었다.
다온이의 얼굴에 불만이 한 가득이다.
“왜 매일 나 모르게 얘기해!!”
“……?”
“엄마랑 이모랑 매일 음음한 거 이야기하잖아!! 나만 빼고 비밀 얘기하는 거 다 알아!!”
“대박. 윤다온…… 그건 있잖아…….”
“몰라! 미워!! 밥 안 먹어!”
바로 식탁 의자에서 내려온 아이가 쪼르르 달려가더니 제 방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어떡해!”
“뭘 어떡해, 내버려 둬. 눈치가 백단인데 우리가 하루 이틀 음음-했어야지. 콩만 한 게 눈빛이 그냥- 아휴, 무서워라.”
지쳤다는 표정을 지은 민아도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이제 솔직하게 알려줘야겠다.”
“동생이 둘이나 생긴다고? 하-하-.”
하-하- 민아가 영혼 없는 헛웃음을 웃었다.
은조는 찻잔을 들고 동생 곁으로 다가가 앉았다. 민아가 임신을 마냥 기뻐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은조는 알고 있었다.
‘또 결혼 전’이라는 말도 했고, 공부를 더 하고 싶은데 본인이 망쳤다는 이야기도 얼핏 했다.
“민아야, 너는 낳기만 해. 언니가 다 키울 거야. 너 공부하는데 지장 없고…….”
“말은 고마운데, 언니가 둘씩이나 어떻게 다 키워? 그리고 대신 키워 주겠다고, 맡겨만 달라고 이미 나서신 분들이 계셔요!”
픽, 웃은 민아가 다시 숟가락을 들었다.
“하긴 선우 씨 부모님들이 우리보다 더 잘 키우실 것 같지? 선우 씨 보면 말이야, 안 그래?”
은조가 빙긋 웃었다. 진심이었다.
“그나저나, 앞으로 미운 일곱 살 윤다온을 어쩌지. 강아지 타령도 지치는데…… 아휴, 골치야.”
난 언니 없었으면 나쁜 엄마가 됐을 거야- 민아가 아주 작게 속삭였다.
“그런데 정말 밥 못 먹겠어? 대책을 마련해야지 안 되겠다…… 참!”
민아가 카디건 주머니에서 무엇인가를 꺼내 내밀었다.
“……카드? 이게 뭐야?”
“아빠가 줬어. 대박이지? 언니가 가지고 있어, 사고 싶은 거 뭐든 사. 특히 먹고 싶은 거, 비싼 과일 같은 거?”
“…….”
눈앞에 놓인 프리미엄 신용카드를 바라보는 은조의 눈이 휘둥그렇다. 연회비가 어마어마하다고 들은 적이 있는 카드였다.
“놀랐어? 감동했어? 한도액이 얼만지 알려 줄까 말까. 언니야, 우리 엄마 아빠가 나한테 하는 거 듣고 보면 언니도 당장 반짝이 아빠한테…….”
“됐어. 나, 이거 정말 쓴다?”
동생 손에 있던 카드를 쏙 뽑아간 은조의 눈빛에 힘이 들어갔다.
그만하라는 뜻이다.
반짝이는 은조의 아기를 말한다. 그러니 반짝이의 아빠는 당연히 권재하다.
민아는 틈만 나면 반짝이- 반짝이- 반짝이 아빠-를 찾아댔다.
은조가 꾼 파란색 다이아몬드 꿈 때문에 지어진 아기의 태명은 ‘음음’ 못지않게 다온이를 노엽게 만든 단어였을 수도 있다.
몇 번이나 반짝이가 혹시 강아지냐고 물었지만 은조도 민아도 입을 닫고 딴소리를 했으니 말이다.
***
[00*-**25-**781*8]
휴대폰 화면에 뜬 긴 발신자 번호를 본 것은 이틀 후였다.
잠깐 욕조에 몸을 담그고 나온 은조가 거의 마른 머리카락을 빗질하고 있던 때였다.
밤 열시가 안 된 시간이었다.
“여보세요?”
[hello, 은조?]
국제 전화의 주인공은 예상대로 제니스 알렉시스였다.
[안녕하세요, 제니스!]
[내가 혹시 자는 걸 깨운 건가? 서울은 밤이잖아.]
[아니에요, 이제 겨우 9시 40분인걸요. 잘 지내셨죠? 미스터 알렉시스도 안녕하신가요?]
[어떤 미스터 알렉시스?]
[아…… 음-.]
[이런! 긴장하지 않아도 돼. 당연히 내 남편에 대해 물은 거 알지.]
밝고 상냥한 제니스의 웃음소리 때문인가.
[……다른, 미스터 알렉시스도 잘 있죠?]
재하의 안부를 묻는 은조의 목소리는 잔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