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빨리 만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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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빨리 만나고 싶어요
2023.03.13.
[……다른, 미스터 알렉시스도 잘 있죠?]
재하의 안부를 묻는 은조의 목소리는 잔잔했다.
하지만 거울 너머로 보이는 슬픈 얼굴을 바라보며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내 얼굴이 왜…… 저 모양이야? 바보같이.
상대방이 볼 수 없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재하는, 글쎄…… 잘 지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해. 새로운 일을 시도해 보는 중이고 나름대로 아무렇지 않은 척하니까.]
[…….]
[내가 너무 솔직했나?]
[……아니에요.]
[은조는? 건강하게 잘 지냈고?]
[저는 괜찮았어요. 개인적으로…… 기쁜 일도 있었고요.]
저도 모르게 나오는 대로 말을 해버린 은조는 아차 싶었다. 그 기쁜 일이라는 것이 임신이고, 재하가 아이의 아빠인데- 어쩌자고.
[귀염둥이 다온이는? 둘 다 너무 보고 싶구나! 난 가끔 다온이의 웃음소리를 떠올리곤 했어. 물론 시무룩한 표정이 훨씬 사랑스럽지만 말이야.]
[다온이도 잘 지내요, 릴리를 많이 보고 싶어 했어요.]
[보러오려무나!]
[……네?]
[은조야, 음- 놀라지 말고 들어. 내가, 음- 암이 재발했어.]
[네??]
[저런, 놀랄 것 없다고 말했잖니. 운 좋게도 정기검진에서 발견했어.]
[……제니스.]
[아마 카일이 급하게 돌아온 이유가 나 때문이 아니었나 싶어. 슬픈 눈을 하고 웃지 않는 걸 보면 절반은 너 때문인 것 같고.]
하하하- 마치 별일 아니라는 듯 제니스는 유쾌한 웃음소리를 냈지만 은조는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
[반지는 어쩌다 빠졌지? 한참 전에 카일과 통화했던 일이 생각나는구나. 네 손가락에서 빠지지 않는 반지 이야기를 하면서 우린 꽤 즐거워했거든. 네가 주인인 게 분명하다고 말했었는데.]
[편지에도 적었지만 반지는 돌려 드리고 싶어요. 그보다 제니스…… 그…….]
은조는 애꿎은 입술만 잘근잘근 씹어댔다. 어떤 식으로, 어떤 단어들로 안타까운 상황에 대해 위로를 전해야 할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아무리 고가(高價)라고 해도 이 시점에 반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은조야, 나를 위해 시간을 좀 내어주면 안 되겠니? 단 며칠이라도 좋아. 당연히 비행기를 보내마.]
[……네?]
비행기 티켓을 보낸다는 이야기인가?
[너와 다온이를 다시 보기 위해서라면 내 비행기를 당장이라도 띄울 수 있어.]
[……제니스.]
[아니, 말을 바꿔야겠다. 나는 단지 그 반지만을 태우기 위해서라도 비행기를 뜨게 할 생각이 있어. 그러니 어차피 뜨는 비행기에…….]
빠르게 쏟아내던 말을 갑자기 멈춘 제니스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돌려 말하는 건 나랑 안 맞는구나, 힘드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비행기 하나 띄우는 건 사실 나한테는 일도 아니라는 거야. 하지만 네 입장에서는 부담을 느낄 수도 있는 일이겠지. 미안하구나.]
[사과하실 것 없어요. 다만…… 제게 시간을 좀 주세요.]
시간을 달라니- 꺼내놓고도 민망한 말이었다. 유방암의 재발이 무엇을 말하는지 정도는 알고 있다. 1분 1초가 아까운 건 제니스 알렉시스 그녀인데.
[세상에!! 긍정이구나? 맞지?]
[네, 사실은 동생이 이번 달 말에 약혼자를 보러 뉴욕에 갈 예정이에요.]
[알지! 민아의 의사 약혼자 말이지? 그럼 셋이 같이 오면 되겠구나! 세상에!! 너무 기뻐!!]
[제가 당장 약속을…….]
[오오- 당연하지! 당장 약속을 하라는 것은 절대 아니야! 부담 가질 필요 없단다.]
[…….]
난감해진 은조는 손끝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지금 수화기 너머에 있는 여자. 그녀, 제니스 알렉시스가 누구인가. 친부가 만든 작은 금융회사인 블랙스톤 파트너스를 미국을 넘어 국제 금융시장의 선두주자로 만든 장본인이다.
남편 카일 알렉시스가 전면에 서 있지만 뛰어난 지략으로 모든 실질적 권한을 갖고 있는 그녀는 사업가 중에 사업가다.
은조는 시릴 정도로 파란 그녀의 눈동자를 떠올렸다. 권재하와 그녀는 닮았다.
[그리고 만약- 네가 원하지 않는다면…… 재하에게는 말하지 않으마.]
급격하게 어두워지는 제니스가 말투에는 절대 그러고 싶지 않다는 뜻을 정확하게 담겨 있었다.
짧은 순간이지만, 노련한 여장부 제니스는 떼를 쓰는 아이처럼 느껴졌다. 은조는 소리 없이 웃어버리고 말았다.
[가게 된다면 그도 만나야죠.]
[그렇지? 죽을 때까지 안 볼 것도 아니고! 음- 내가 ‘죽을 때’라는 말을 하는 게 좀 우습네. 그렇지?]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저는 기사를 읽었어요! 제니스가 어떻게 암을 이겨 내셨는지, 같은 병과 싸우는 여성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달했는지 알아요!]
[그래? 고맙구나! 은조야, 만약 다시 만나게 된다면 한 번 더 요리를 해달라고 부탁해도 될까? 불고기 말이야.]
[물론이에요.]
.
.
“…….”
그 밤 은조는 잠들기 전에 인정했다. 결국 약속을 했다는 것을.
제니스가 보낼 비행기를 타고 뉴욕으로 가서, 불고기까지 해주기로 한 것이다.
저를 본 재하가 어떤 얼굴을 할지, 아이를 가졌다는 말은 또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하느라 잠이 오질 않았다.
***
휴직 절차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최대한 빠르게 쉬고 싶다는 은조의 뜻에 따라 업무상의 인수인계가 급속도로 이루어졌다.
맡고 있었던 일을 최장미에게 거의 넘겨준 은조는 신입사원을 뽑는 시기까지 기다리지 않아도 되었다.
이제 근무를 열흘 정도 남겨둔 상태에서 은조는 동료들의 소소한 작업을 거들며 여유롭게 시간을 보냈다.
실은 임신 사실을 아는 장 팀장의 배려였다.
“5년 내내 영혼까지 바쳐 일한 거 내가 제일 잘 알잖아. 나는 네가 이런 식으로- 편하게 몇 달 더 출근했으면 좋겠는데.”
“놀면서 월급만 받아 가라고요?”
“성격상 안 되겠지? 아무튼 고집은. 너 똑같은 아이 낳아서 겪어 봐야 해. 다온이는 고집쟁이는 아니잖아, 안 그래?”
뜨끈한 순대국의 국물을 연신 입으로 가져가는 은조가 고개를 끄덕였다.
“맛있냐? 천천히 먹어. 심하게 까칠해지길래 상사병이라도 난 줄 알았더니. 입덧이라니. 하여간 윤은조.”
너털웃음을 웃은 장 팀장이 깍두기가 담긴 그릇을 은조 앞으로 밀었다.
휴직 통보와 임신 사실 고백 이후 언니 같은 장 팀장은 정말 친언니처럼 변했다. 당분간 점심은 둘이만 먹자며 은조의 입맛을 돌게 할 만한 맛집으로 데리고 다녔다.
“이상해요, 전에 왔을 때는 분명히 이 집 순대국 별로였거든요. 깍두기 맛으로 그냥저냥 먹었는데.”
“몇 주라고 했지?”
“11주요.”
“아기가 착한가보다, 입덧 일찌감치 끝나는 여자들도 많아. 곧 아들인지 딸인지 알겠다.”
“…….”
분주하게 움직이던 은조의 손이 멈추었다.
“떨리지? 다온이 있으니까 딸이면 좋을 것 같다. 아냐?”
“모르겠어요. 아니, 상관없어요. 그냥…… 건강하길 바라고 빨리 만나고 싶어요.”
눈가가 촉촉해진 은조를 바라보던 장 팀장이 어서 먹으라는 손짓을 했다.
“빨리 만나면 쓰나, 제 시간 꽉 채우고 나와야지.”
“……네.”
“천천히 다 먹고 새로 생긴 케이크 집도 들르자.”
“저 돼지 만들려고 작정하신 것 같아요.”
“아이고, 네가 먹으면 얼마나 먹는다고? 내가 훨씬 더 먹잖아!”
“아무튼 케이크는 제가 살 거예요.”
“됐어요, 곧 백수 주제에. 아껴 둬.”
쫀득한 순대를 오물거리던 은조는 고개를 끄덕이며 생글거렸다.
***
한편, 시어머니 이혜정으로부터 SNS 활동 중단 명령을 받은 나나는 당장 이성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게 다가 아니야! 요리 수업에 동양화 수업을 들으래!! 무슨 신사임당 코스프레도 아니고 대체 뭐냐고! 나 돌아버리겠어, 엄마!!”
[일단 시키는 대로 흉내만이라도 내봐, 우는소리 그만하고 응?]
“우는소리라니? 엄마는 여태 내 말을 어디로 들었어? 제정신이 아냐! 우리 집을 등에 업고 영부인이 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니까!! 영부인! 하!!”
[그거야 두고 봐야 하는 이야기고.]
이미 예상하고 있던 이성자는 놀라지 않았다.
직접 정치를 하는 차대성보다 오히려 이혜정이 야심가라는 것은 상견례가 이루어지기 전 알아낸 정보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엄마, 내가 차상윤 걔한테 들은 이야기가 얼만데, 차대성은…….”
[나나야! 내가 다 듣기 불편하구나! 어쨌든 그 집 며느리가 됐으니 호칭은 제대로 해야지.]
“알았어! 그래!! 여기, 이 시아버지에 대해 들은 이야기를 종합해 보자면! 절대 그런 자리에 오를 인물이 아니셔! 됐어?? 엄마도 다 알지? 다 알아봤을 거 아냐? 시어머니- 으으- 대단하신 이혜정 여사는 남편이 하고 다니는 짓- 아니, 하고 다니시는 일을 다, 전부- 알면서도 그런 소리를 하는 거라고! 제정신이야, 그게?”
나나의 말은 차대성의 바람기를 두고 하는 소리였다. 실제로 상윤은 비밀이라며 나나에게 배다른 동생에 대해 말한 적도 있었다.
[……나나야.]
“응?”
[엄마 말 잘 들어.]
“엄마아~ 나 언제까지 여기 있어야 돼, 응? 결혼은 그렇다 쳐, 왜 내가 이런 집구석에 저런 여자랑…….”
[혼전 계약서가 있어.]
“뭐? 뭐가, 있다고??”
[결혼 생활 시 규칙, 이혼 시 재산 분할 등…….]
“누가 그런 걸 만들었어!! 규칙? 재산 분할?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너야말로 대체 권재하 그 사람한테 무슨 잘못을 했길래. 이런 꼴을…….]
나나는 제 어미가 내쉬는 한숨 소리를 들었다.
“…….”
그리고 처음으로 ‘권재하’ 그 세 글자에 심장이 쪼그라들며 눈물이 날 것 같은 심정이 되었다.
오빠가 어떻게 이래…….
[신랑이 사라져버려서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돌아왔다니 어쩌겠니.]
“…….”
[재산 약정까지 포함된 계약서야. 자녀의 양육은 물론 이혼 시 위자료도 정했어.]
“……자녀? 위자료? 어, 얼마?”
차상윤과 ‘자녀’나 ‘위자료’라는 단어로 엮이게 되다니. 작은방이 빙글빙글 돌았다.
이제껏 우습게 여기던 상황이 갑자기 소름 끼치는 악몽처럼 느껴졌다.
어떻게 깨어나지…….
이미 귀에서 멀어진 전화기에서 나오는 이성자의 목소리와 1층에서 며느리를 찾는 이혜정의 찢어지는 음성이 엉켰다.
하지만 침대에 주저앉은 나나에게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