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3. 뉴욕의 가을 (83/100)


83. 뉴욕의 가을
2023.03.16.



 
뉴욕이라고 서울과 다르지 않다.

선연한 빛으로 물든 가을은 바라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설레게도 만든다.

하지만 서울의 가을을 뒤로하고 떠나온 재하에게 그것은 그저 지난가을과 다를 게 없었다.

언제나처럼 왔다가 또 그렇게 저절로 스러져갈 어느 한 계절.


“…….”

갈색 벽돌로 지어진 고급 주택이 늘어선 그리니치 빌리지(Greenwich village). 한적한 골목길을 따라 약속 장소로 향하던 재하는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요 며칠 때때로 찌르듯 찾아오는 두통이 문제였다.

긴 바늘이 귀 뒤쪽을 쑤시는 것 같은 찌릿하고 기분 나쁜 통증이 왔다 사라지곤 했다.

여전한 수면 부족이 원인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괜찮아요?]

강아지와 산책 중인 나이 지긋한 신사가 곁에 멈추어 서며 물었다.


[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의 표시로 밝은 미소를 만든 재하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 뉴요커는 이내 사라졌다.


“…….”

불그스름하고 서늘한 가을바람을 깊게 들이마신 재하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니치 빌리지는 20세기 초반 미국 보헤미안(Bohemian) 문화의 정점이었던 곳으로, 유명한 예술가들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물론 지금은 예술가들의 작업실 대신 고급 숍들이 즐비하고 땅값은 치솟았지만 말이다.

재하는 차분하고 평화로운 분위기가 가득한 이곳에 여러 개의 빌딩을 소유했다.

그중 하나를 최근에 비우고 청소와 인테리어까지 마쳤다.

그리고 출판사 ‘봄’의 작은 간판을 건물 입구에 걸었다.

그날 진한 가을의 한가운데 단정하게 자리한 한글 ‘봄’을 바라보던 그는 아무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얼떨결에 봄을 맞이했다.

텅 비어버린 가슴속에 찬바람만 가득한 권재하에게 갑자기 봄이라니.

피식, 또 웃음이 나오는 순간 안주머니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에디]
 


“안 자고 뭐 해? 서울은 새벽이잖아.”

“전화하고 있는데요.”

“싱겁긴. 왜 이렇게 하루가 멀다 하고 전화를 하지? 매번 특별한 이유도 없으면서.”

“어디십니까, 또 자리를 비우셨길래 전화를 드렸죠. 당황스럽습니다, 대체 왜 출근을 안 하십니까?”

재하는 비공식적으로 회사 일에서 잠깐 손을 놓은 상태였다.


“출판사 이야기했잖아, 기억 안 나?”

“그쪽으로 출근을 하신다고요? 왜요?”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뒷머리를 문지르는 에디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제가 모르는 무슨 딴 이유가 있는 건 아닌가 해서 신경이 쓰이겠지.


“좋아, 솔직하게 말할게. 이제까지 일을 하면서 지겹다거나 힘이 든다고 느낀 적이 없었는데, 요즘 그랬어. 돈 냄새만 맡는 일이 지겨워. 아주 지루해, 재미가 없다고. 대답이 됐어?”

“아…… 그러시구나. 그럴 수 있죠.”

“고맙다, 이해해 줘서. 뭐 더 할 말은, 있고?”

“음- 아뇨. 그럼 볼일 잘 보시고,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좋을 대로.”

전화를 끊은 재하의 눈에 유명한 컵케이크 가게의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출판사 ‘봄’의 현 대표 박상아와 만나기로 한 장소였다.

.
.

커피를 한잔 막 받아 들고 돌아섰을 때, 가게 입구로 들어서며 활기차게 손을 흔드는 그녀를 발견했다.


“헤이, 카일!”

“오셨어요.”

“에? 겨우 커피만 마시려고요? 우와, 냄새 죽인다!”

이미 휘둥그런 눈으로 가게 안을 살피는 박상아는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저는 이거면 충분하지만 대표님은 얼마든지 고르세요. 직원들 가져다줄 것도 넉넉히 담으시고요.”

“와우! 넉넉히라면 한 50개쯤 담을지도 몰라요? 그래도 되, 겠죠?? 카일 부자잖아.”

윙크를 날린 그녀는 빠르게 컵케이크 진열대로 몸을 돌렸다.

재하보다 여섯 살 많은 박상아는 꽤 긍정적이고 에너지 넘치는 여성이다.

같은 한국인이라는 점도 있었지만 그녀는 활발하고 사교적인 성격으로 재하에게 친근하게 다가왔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의 카리스마에 압도당하고 주눅 들기 마련인데 박상아는 처음부터 그런 기색 없이 당당하고 자연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열정만 가지고 차린 출판사가 망하기 직전이었는데도 얼굴에서 미소가 그득했었다. 그래도 빚은 없다며.

은행 빚만 없었을 뿐이지 본인을 비롯해 직원들이 모두 무료 봉사를 하는 마당에 말이다.

그런데 이제 든든한 후원자 겸 조언자에 팔릴 만한 책을 내보겠다는 작가를 얻었으니 미소에 콧노래까지 더해졌다.

재하는 인간적으로 마음에 든 그녀에게서 사업가적인 자질을 끌어내 보기로 결심했다.

.
.



“에?? 하루에 한 권요? 누구에게 쫓겨요? 난 그런 기억 없는데.”

눅진한 초콜릿 덩어리가 잔뜩 들어 있는 케이크를 베어 문 박상아가 눈을 크게 떴다.

재하가 만들어야 할 책과 같은 부류의 책들을 섭렵 중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보여준 반응이다.


“아주 재미있으면 하루면 충분해요. 조금 지루하면 이틀? 많이 읽어야 잘 쓰는 거 아니에요?”

“어, 글쎄요. 뭐, 말릴 이유는 없지만 제가 생각하기에 재하 씨는 그냥 아는 것만 적어도 될 것 같은데.”

“매번 이렇게 남의 일 이야기하듯 이러시는 거 곤란합니다. 봄이면 뭐 합니까? 꽃이 피어야죠.”

재하가 한쪽 눈썹 끝을 치켜 올리자 박상아가 헤벌쭉 웃음을 웃었다.


“오~ 그 표현 멋져요! 하지만 권재하 씨야말로 매번 그렇게 특유의 매력적인 표정을 지으시는데- 곤란합니다. 내가 연애하자고 하면 어쩌려고.”

“설마요, 박 대표님이 관심 있는 남자한테 어떻게 하는지 다 봤는데, 무슨.”

“들켰나요?”

그녀는 자주 가던 식당 요리사에게 푹 빠져 있었다.


“이제 출판사가 이사를 했으니 만날 핑계도 없고 걱정입니다.”

“솔직하게 말하세요. 그쪽도 관심이 많아 보이던데.”

“그렇죠?? 근데, 나이가 영 걸려요.”

“비슷해 보입니다. 동양 여성은 보통 열 살 이상 어려 보이는 거 모르세요?”

“그런 의미로, 하나만 더 먹어도 되겠죠?”

의미 없는 질문을 한 그녀는 냉큼 케이크 하나를 또 집어 들었다.


“오픈 기념 파티 날짜는 정하셨습니까.”

“음, 이번 달 마지막 날. 금요일 어떠세요? 아무래도 권 대표님 말 듣고 보니까 하는 게 백번 옳지 싶어요. 뭣도 모르고 까불어서 죄송합니다.”

“좋습니다. 그렇게 알고 준비 시킬게요.”

“와우, 와우!”

재하에게 엄지를 치켜세워 보인 박상아가 종이 냅킨으로 입가를 문질렀다.


“이제 가볼까요.”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신 박상아가 내려놓았던 가방을 집었고 재하는 컵케이크 여러 개 담긴 상자를 들었다.

새롭고 근사한 사무실에서 처음으로 회의를 하는 날이다.

참, 그 회의라는 것도 재하에게는 꽤 흥미로웠다.

그저 제각기 아이디어를 내놓거나 모아온 자료를 보여주며 대화를 주고받는데- 담담하니 날씨 이야기를 나누는 수준이었다.

맹렬하게 부딪치는 송곳니와 발톱, 살기 어린 눈빛 등은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

따듯한 차와 다디단 주전부리가 있을 뿐.


“박 대표님, 제 호칭을 세 개로 번갈아 가며 쓰시는 거 아시죠?”

“싫어요? 권 대표님, 카일, 재하 씨- 뭐가 제일 좋아요? 고르세요, 인심 좀 쓰죠. 매번 얻어먹는 처지니까.”

“그냥 이름 부르세요.”

“카일?”

“아뇨, 재하.”

“오케이 미남 작가 겸 봄의 실세인 재하 씨.”

“이런, 오히려 두 개가 더 늘었네요.”

못 말리겠다는 듯 재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
.

컵케이크 가게에서 출판사까지는 걸어서 10분이면 충분한 거리였다.

공식적인 오픈 기념 파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걷던 중 재하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

박상아의 시선이 재하의 그것을 따라 움직였다.

건너편에서 도로를 넘어 다가온 남자의 표정은 재하만큼이나 놀란 것처럼 보였다.


“……안녕하세요!”

하지만 금세 표정이 부드러워진 남자는 먼저 손을 내밀었고, 재하가 그 손을 맞잡았다.


“오랜만입니다.”

다소 굳었던 재하의 얼굴도 바로 풀었다.


“저는 먼저 올라가 있겠습니다, 그거 이리 주세요.”

재하의 손에 들려있던 종이상자를 건네받은 박상아는 처음 본 이에게 가벼운 눈인사를 남기고 자리를 떴다.


“…….”

“뉴욕으로 돌아오셨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이런 우연이…….”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서 있는 최선우는 생각했다.

권재하가 먼저 알은 척을 하지 않았다면 그냥 지나쳤을지도 모르겠다고.


“네, 돌아온 지 좀 됐습니다.”

칼같이 주름이 잡힌 디자이너 슈트를 빼입은, 최선우가 아는 권재하가 아니었다.

브라운 컬러의 블레이저 안에 셔츠와 니트를 받쳐 입은 그는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날카롭고 지적인 눈빛은 여전했지만 바람에 흐트러진 앞머리는 낯설었다.


 

***

오후 2시 백화점 7층.

어느 브랜드 앞에 멈추어선 남희가 작은 마네킹이 입고 있는 옷을 가리켰다.


“어머! 너무 귀엽지 않니? 꿀벌 같겠다, 그렇지? 사자!”

“…….”

“…….”

이미 숍 안으로 들어가 버린 남희 뒤에서 민아와 은조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자매의 손에는 이미 여러 개의 종이가방이 들려 있었다.


“언니가 키운다고? 절대 그렇게 못할걸. 오히려 반짝이도 키워주신다고 달라 하실지 몰라, 조심해.”

민아의 농담에 은조는 픽 웃었다.


“얼른 가서 모셔와. 이미 너무 많이 샀어.”

아이고- 소리를 낸 민아가 숍 안으로 들어갔다.


“다온아, 할머니 나오시면 아이스크림 먹으러 가자.”

“엄마, 왜 할머니가 자꾸 아기 옷을 사? 응?”

다온이가 잡고 있는 손을 흔들며 물었지만 은조는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그러게.”

“아기가 몇 명인데, 으응? 반짝이가 몇 명이냐고! 나 동생 싫어!!”

제 몫의 장난감을 들고 있는 다온이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발을 굴렀다.


“어제는 말을 할 수 있으니 강아지보다 좋다고 하더니, 금세 마음이 바뀌었어?”

“반짝이는 몇 명이고 반짝이 아빠는 누구냐고!! 카일 아저씨야? 아저씨한테 전화할래! 응, 엄마?”

천천히 무릎을 접고 앉은 은조는 아이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다온이 미국은 지금 몇 시인지 알아?”

“서울보다 14시간 늦다고 이모가 알려줬어.”

“맞아, 거긴 아주 깜깜한 밤이야. 하지만…….”

웅- 아이가 귀엽게 고개를 끄덕였다.


“곧 엄마랑 이모랑 다온이랑 다 같이 뉴욕 갈 거야. 아마…… 아저씨도 만날 수 있을걸.”

와- 소리를 지른 아이가 은조의 목에 매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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