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돌아온 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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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돌아온 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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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돌아온 남편
2023.03.20.
“아저씨도 만나고 릴리도 만나는 거야?”
“……응.”
“와아~ 신난다!”
은조는 환해진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며 흐리게 웃었다.
요즘 변덕스러운 다온이의 마음을 달래는 일이 은조의 주된 임무였다.
지금 좋아진 기분이 언제 또 틀어져서 방금 전처럼 ‘동생은 싫다’고 심통을 부릴지 모를 일이다.
찬찬히 알아듣게 동생이 생겼다는 사실을 알려줬지만, 6살 어린애가 엄마와 이모가 동시에 아기를 가졌다는 사실을 쉽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리 없다.
받아들이기는커녕 순수한 아이답게 사랑과 관심을 빼앗겼다고 생각하는 눈치다.
‘아기들’의 아빠에 대해서 묻는 건 당연하다. 그다음 수순으로 제 아빠에 대해서 묻고.
얼마나 눈치가 빠른지 민아의 배를 가리키며 아기 아빠가 의사 아저씨냐고 묻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은조는 애가 탔다. 안 그래도 아빠의 부재(不在)가 아이를 주눅 들게 할까 봐 항상 조심스러웠는데 이제 더는 미룰 수 없다.
“……그렇게 좋아?”
“응!! 너무 좋아!”
초등학교 입학 전에는 호적을 정리해야 한다. 선우가 다온이의 아빠가 되는 건 이제 당연한 일이다.
갑자기 바뀌는 상황에 아이가 놀라지 않게, 그것만 신경 쓰면 된다.
물론 민아와 다온이 없이 서울에 혼자 남을 자신을 생각하면 두렵기도 하지만……. 그럴 때마다 은조는 되뇌었다.
절대 혼자가 아니라고. 아기가 태어날 거라고.
“우리 강아지가 좋아해서 엄마도 너무 좋아. 사랑해.”
“나도 사랑해, 엄마.”
다온이가 은조의 뺨에 쪽, 쪽 소리 나게 입술을 맞추었다.
“아이~ 질투 나네~.”
숍에서 나온 남희의 목소리가 밝았다. 양손에는 역시나 쇼핑백이 들려 있다.
어쩔 수 없었다는 표정을 짓는 민아가 어깨를 들썩였다.
.
.
“쌍둥이도 아닌데- 그리고 아직 성별도 모르잖아요.”
민아의 손에는 노란색과 검은색 줄무늬가 귀여운 베이비 오버롤 두 벌이 들려 있었다.
은조는 미소를 지었다. 정말 아기에게 입히면 꿀벌 같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 누가 요즘 성별 따라서 옷을 입혀? 그리고 쌍둥이나 다름없지 뭐, 안 그래? 얘들아, 엄마는 이미 카페에도 가입했다!”
“서, 설마, 맘- 카페는 아니죠??”
“딩동댕~!”
“엄마, 그건 좀…….”
“봐, 너도 나를 엄마라고 부르면서 왜? 뭐가 문제야?”
놀라서 입이 벌어진 민아와 다르게 남희는 신나 죽겠다는 표정이다.
그런 둘을 바라보는 은조는 가슴이 찡할 정도로 행복했다.
남희는 진짜 엄마다. 민아의 멋쟁이 엄마.
내내 다온이를 놓아줘야 한다는 생각에 가슴이 답답했던 게 사실이지만 은조는 진심으로 환하게 웃었다.
나는 아기가 있잖아. 전부 괜찮아.
“다온아, 엄마의 엄마는 영어로 뭐야?”
“할머니? 그랜마!”
남희가 떠주는 아이스크림을 받아먹는 다온이가 야무지게 대답했다. 언제 심통을 부렸냐는 듯 천연덕스럽다.
“참, 비행기 시간이랑 좌석을 다시 잡을 건데 미리 알려줄 거 없어? 민아는 큰 문제 없을 것 같은데 은조는 아직 불편한 거 많잖아. 물론 개별식이 나오기는 하지만 아무것도 못 먹을까 봐 걱정이네…… 식사라든가 그 외에 특별히 원하는 거 있으면 알려 줘.”
“그래, 언니. 나는 옷도 비행기에 있는 거 별로거든, 우리 입던 거로 챙겨가자.”
“아, 그 얘기를 드린다는 게…….”
은조는 일단 비행기 티켓을 제니스가 보내 줄 거라고만 이야기해 뒀다.
뉴욕을 가는 건 맞지만, 제니스의 호의를 흔쾌하게 받아주고도 싶지만.
아직 전용 비행기까지는 아니었다.
***
점심시간, 혼자 조용하게 식사를 하는 에디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측근을 통해 얻어낸 정보에 의하면. 뭐, 거기까지 가지 않아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재하는 여전히 잠을 못 잔다고 했다.
[무엇에도 흥미가 없는 듯 시큰둥한 눈빛이시고 제가 본 바에 의하면 커피와 담배, 샐러드나 단백질 음료로 연명하시는 게 분명합니다.]
다행히 술은 입에 대지 않는 모양이지만 밤낮으로 종일 책을 보거나 간혹 글을 끄적거린다고도 전했다.
“그래서…… 결국…….”
그 애들 장난 같은, 손바닥 만 한 출판사를 돌보느라고 회사를 안 나간다고?
그래- 잠시 딴짓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야. 그는 여전히 힘든 시간을 겪고 있는 거라고. 뭔가 새롭고 다른…….
“……장난감? 그래, 장난감이지.”
권재하의 삶은 그 자체가 모두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가끔 스스로를 돈 냄새나 좇는 사냥개에 비유하며 자조했지만 남들이 보기에 그의 삶은 완벽 그 자체였다.
신이 잘 빚어 놓은 것같이 아름다운 외모, 탁월한 지적 능력과 그 수준에 맞는 높은 학벌.
타고난 듯 고매한 품위는 알렉시스라는 명문가(名門家)에 걸맞았다.
사업가적 기질은 또 어떠한가.
제 실력을 바탕으로 만들어 놓는 성과가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그에 따른 부와 명예, 일반인들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호화롭고 풍족한 삶.
그게 권재하, 카일 알렉시스의 삶이었다.
그런데- 그냥 다, 필요 없어졌다?
[좋아, 솔직하게 말할게. 이제까지 일을 하면서 지겹다거나 힘이 든다고 느낀 적이 없었는데, 요즘 그랬어. 돈 냄새만 맡는 일이 지겨워. 아주 지루해, 재미가 없다고. 대답이 됐어?]
회사는 그가 없어도 굴러가게끔 조치가 되어있지만…….
제니스의 일도 그렇고, 모든 상황이 재하를 코너로 모는 것 같아서 마음이 무거웠다.
밥은 먹는 둥 마는 둥 고민에 빠져 있던 에디는 빨리 서울에서의 일을 마무리 짓고 재하 곁으로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다시 식사에 집중하려던 찰나, 식탁 위 휴대폰 화면이 반짝거렸다.
[나나]
잠깐 전화기를 바라보던 에디는 다시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오빠! 나야, 나나.]
“왜 속삭이는데?”
[나 어딘지 알 거 아냐? 아무튼 갑자기 전화해서 미안해, 근데 내가 사정이 좀 급해서…….]
급하겠지, 급할 거다. 궁금하고 애가 타고 미치겠지. 왕나나의 목소리는 이제껏 들어본 적 없는 빛을 띠고 있었다.
“나중에 다시 해라. 점심 식사 중이었어.”
[아니, 안 돼! 제발 끊지 마! 내가 너무 답답해서 그래! 재하 오빠한테는 도저히 무서워서 못 하겠고…….]
“나는 만만하고?”
[아냐! 무슨 말을 그렇게 섭섭하게 해? 오빠, 있잖아. 혹시…….]
[오빠? 오빠라니, 누구니?]
수화기를 타고 넘어온 다른 누군가의 음성. 그게 이혜정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에디는 아무 말 없이 바로 종료 버튼을 눌렀다.
그들의 전쟁에 단 0.1초도 내어줄 생각이 없었다.
.
.
나나는 팔짱을 낀 채 침실 문가에 서 있는 이혜정을 바라보았다.
“노크 같은 거, 하실 줄 모르세요?”
똑, 똑. 빤빤한 얼굴의 이혜정이 어쩌겠냐는 듯 이제 와 문을 누 번 두드렸다.
“누구냐고, 물었잖니?”
“친구예요, 친구.”
이미 끊어진 전화를 내려다보던 나나는 손을 뒤로 숨겼다.
“오빠라고 부르는 걸 내가 분명히 들었는데 친구라고? 너 아주 거짓말이 일상인 애구나.”
“……네??”
“들은 거보다 더하고 예상한 거보다 지독해. 여러 가지 면에서 말이야.”
표독스러운 눈빛으로 저를 위아래로 훑는 이혜정을 향해 나나도 눈을 치떴다.
“무슨 거짓말을 했다고 일상이 어쩌니 독하니- 아휴, 됐고요! 오빠 맞는다고요, 차. 상. 윤. 오빠! 됐어요, 마음에 드세요, 이제??”
“이것 봐라.”
“…….”
끓어오르는 화를 참는 나나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소리 없는 욕을 굴리는 입술이 달싹거렸다.
“이리 내.”
“……?”
“휴대폰 달라고, 당장!”
“내 휴대폰을 왜요!”
“나는 며느리까지 꼴사나운 짓 하고 다니는 꼴은 못 본다. 당장 못 내놔!”
“며느리까지?? 꼴사나운 짓이라뇨!! 아악!!”
비명을 지른 나나는 아이처럼 몸을 흔들며 발을 굴렀다. 이 집 안에 더 있다가는, 이혜정을 더 상대하다가는 정말 미쳐버릴 것 같은 심정이 되었다.
“이 미친…… 당장 못 내놔!!”
나나는 눈이 뒤집혀 덤비는 이혜정을 밀어냈다.
“그러니까!! 내가 누구처럼 배우자 두고 딴짓이라도 하고 있다? 하!! 그런 소설을 쓰시는 거예요, 지금? 아아!! 아파요! 손 놓으시라고요!! 뭐 눈엔 뭐만 보인다더니 정말 미쳤…….”
“야!!! 너 누구한테 말을 그따위로 해!!”
“……!”
차상윤이었다.
어디서 갑자기 나타나서는 꼴에 제 어미를 두둔하는지 나나를 향해 윽박을 질렀다. 이제 보니 그 눈이 딱 이혜정과 닮았다.
“계집애가 어쩜 이렇게 1도 안 변하냐? 지금 네가 처한 상황이 똥인지 된장인지 아직도 모르지?”
“어, 언제 왔……!!”
이혜정이 순식간에 나나의 손에 들려 있던 휴대폰을 빼앗아 갔다.
“어디다 몰래 전화를 하는데 오빠, 오빠 하더라. 누구냐니까 너래!”
의기양양한 이혜정이 공중에 삿대질을 해가며 열을 올렸다.
바람피우는 남편을 평생 어쩌지 못한 그녀가 이제 죄 없는 며느리에게 화풀이를 하는 꼴이다.
나나는 막장 드라마 같은 상황에 말문이 막혔다.
“누구랑 통화를 하든가 말든가 내버려 두세요. 쟤가 오빠라고 부르는 자식들이 어디 한둘이래야 말이죠. 배고파요, 엄마. 밥 차려주신다더니 여긴 왜 올라와서…… 어어? 뭐야, 이게? 내 방이 왜 이 모양이야??”
“뭐? 오빠라고 부르는 놈들이 한둘이 아니라고?”
“아, 엄마! 내 방 꼴이 왜 이러냐고요??”
차상윤은 신혼 방으로 꾸며진 제 방을 바라보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특히 꽃무늬가 잔잔한 침구를 본 얼굴은 벌레라도 씹은 것처럼 우그러졌다.
그러게 누가 들어오래, 병X아- 평소 같으면 벌써 나갔을 말을 간신히 삼킨 나나는 이혜정 손에 들린 제 휴대폰만 바라보았다.
“…….”
“아들, 마음에 안 들어? 엄마가 좀 엔틱하게- 그 뭐더라- 아! 레트로 감성! 그걸로 꾸며 본다고 꾸몄는데 싫으면 다시 바꾸고.”
“엄마! 레트로고 나발이고 무슨 신혼 방이 필요한데?”
“……?”
“나 쟤랑 방 같이 못써! 안 쓴다고요!!”
“응?? 아니 그럼 각방을 쓰겠다고? 아니 상윤아, 아들…….”
잠깐 나나를 흘겨본 이혜정이 상윤의 등을 떠밀었다.
“내려가서 얘기하자, 밥부터 먹으면서 천천히. 얼굴이 그냥 까칠해서는…… 얘, 그런데- 싫어도 애는 하나 낳아야 하지 않니?”
멀어지는 이혜정의 목소리에 나나는 눈앞이 캄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