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love affair_애정행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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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love affair_애정행각
2023.03.23.
뉴욕 첼시에 위치한 재하의 집은 6층짜리 콘도(condo)다.
1900년도에 지어진 건물로 멋진 외관은 물론 약 200평에 달하는 큰 규모를 자랑한다.
지상 1층과 지하 1층에는 세계적인 명품 브랜드 H의 뉴욕 지점이 있고 그 위로 4개 층은 세입자들이 거주, 맨 위층을 건물주인 재하가 사용하고 있었다.
그 집에 머무르는 특별한 이유는 없다.
그저 제니스의 아파트와 회사 빌딩이 위치한 미드 맨해튼(Midtown Manhattan)과 가까운 거리여서 편한 정도다.
“…….”
새벽 1시, 보던 책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선 재하는 아직 잠들지 않은 도시를 내려다보았다.
첼시는 넓고 조용하면서도 활기 넘치는 동네다.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노인들과 예술을 즐기는 젊은이들이 공존한다. 고급스러운 레스토랑 및 바(bar)가 넘쳐나고 갤러리(gallery)들이 즐비해 늘 북적인다.
임대수익은 물론, 건물의 가치가 무서울 정도로 치솟는 구조다.
그래도- 최선우를 만난 그리니치 빌리지에 비하면 아직 멀었다.
“하…….”
가까스로 잊은 척하고 지냈는데.
억지로 모른척하고 웃어도 보면서 지냈는데.
창가에서 등을 돌린 재하는 빠른 걸음으로 서재를 벗어났다.
어스름한 거실을 지나 주방까지 한걸음에 다다른 그는 순식간에 위스키 병을 꺼내고 빈 잔을 찾아냈다.
“…….”
오늘은 책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게 전부 이틀 전에 본 최선우 때문이다.
망할……. 위스키를 단숨에 들이켠 재하는 그날을 떠올렸다.
[……안녕하세요!]
여전히 긍정적이고 밝은 에너지가 넘치는 그는…… 아니, 굳이 서민처럼 여전히 수수한 티를 팍팍 내고 있는 그를, 뉴욕에서도 최고로 비싼 건물들이 넘치는 부촌에서 만난 것이다.
[뉴욕으로 돌아오셨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이런 우연이…….]
[네, 돌아온 지 좀 됐습니다.]
컵케이크가 담긴 상자를 들고 총총히 사라지는 박상아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재하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무슨 말을 더해야 하나 이대로 작별 인사나 전하려던 찰나,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여긴 정말 집값이 어마어마하네요.]
뒷머리를 문지르는 선우의 뺨이 상기되어 있었다.
흐트러진 머리를 넘긴 재하는 굳이 냉담하게 굴 필요는 없다고 느꼈다.
[집을 알아보십니까, 병원과 가까운 곳에 사신다고 전에 들은 걸 기억하는데요.]
[……아, 그게.]
대답을 듣자고 꺼낸 이야기는 아니니까- 무표정한 재하는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그리고 명함 하나를 선우에게 건넸다.
[친분이 있는 중개업잡니다. 살만한 집을 어이없는 가격에 구할 수 있도록 도와드릴 겁니다.]
잠시 부동산 중개업자의 이름과 전화번호가 적힌 명함을 들여다보던 선우가 입을 열었다.
[……저희 결혼 날짜가 잡혔거든요. 그리고 병원과는 거리가 좀 있지만…… 민아와 태어날 아기를 좋은 환경에서 지내게 하고 싶어서요.]
[……!]
[네, 아기가 생겼습니다. 부모님께 작정하고 손을 벌려보려고 했는데…… 다시 생각해 보려고요.]
그가 또 뒷머리를 문지르며 어색하게 웃었다.
[……축하합니다.]
그 말을 하는데 모래를 삼키는 것처럼 목 안이 따끔거렸다. 눈물도 찔끔 나올 것 같았다.
은조는 어땠을까. 좋아했겠지, 동생이 아기를 가졌으니 기뻐했을 거야.
……아프지는 않았을까. 가슴이…… 무너졌겠지.
[아, 다온이는 잘 있습니다. 은조 씨도 잘 있고요.]
[……네.]
[이거, 감사합니다. 일단 연락은 한번 해봐야겠네요. 그럼.]
[네, 또 뵙죠.]
그저 형식적으로 고개를 까딱이며 한말, 또 보자는 그 말은 거의 이루어질 확률이 없다고 생각했다.
“…….”
좁은 뉴욕에서 그날처럼 우연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런 우연도 그 한 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길 바란 재하였지만 부동산 중개업자에게 전화를 넣어 뒀다.
그의 빌딩 중에 혹시 비어있거나 곧 비어질 예정이 있는 곳을 알아보고 적당한 곳을 서너 곳 추렸다.
그리고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선우라는 남자에게 내어주라고 지시했다. 물론 적당한 이유를 들려주고 건물주에 대해서는 비밀로 하라는 지시도 잊지 않았다.
그 정도는 다온이를 생각해서라도 해줄 수 있는 아주 작은 호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전화를 끊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은조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민아가 선우 씨랑 결혼하면 두 사람이 다온이를 키워야 한다고 생각해. 처음에는 아이가 혼란을 겪겠지만…… 그래도 민아가 생모고, 선우 씨는 정말 좋은 아빠가 될 거니까.]
그 말을 하던 은조의 얼굴. 목소리는…….
아무렇지 않은척 ‘축하합니다.’를 쥐어 짜내던 저의 그것과 똑같았었다.
“윤은 조, 바보같이…… 정말로 그럴 건 아니지. 그러면 넌 못 살아.”
다시 채운 술잔을 단숨에 비워버린 재하는 이를 악물었다. 어쩌지…… 은조를 어떡하면 좋지.
식탁의자의 등받이를 움켜잡은 손이 가늘게 떨렸다.
최선우만큼이나 잘난 놈, 네게 관심이 많은 놈이 네 근처에 있잖아.
이원영 정도면…… 너도 다온이도…….
이제 덜덜 떨리는 손이 술병을 잡았고 빈 잔은 바로 호박색 액체로 가득 채워졌다.
***
다온이를 재운 밤.
은조와 민아는 노트북을 앞에 놓고 뉴욕에 관한 정보를 모으고 정리를 했다.
볼일만 보고 바로 서울로 돌아오려던 민아의 계획은 전면적으로 수정되었다.
어차피 세 식구가 모두 같이 가기로 했으니 서두를 이유도 없고, 선우가 신혼집을 함께 보자는 이야기를 꺼냈기 때문이다.
“나 여기도 가보고 싶어! 러브 어페어(love affair)? 어쩜 케이크가 이렇게 예쁘지? 언니, 러브 어페어가 무슨 뜻이야?”
“그냥 애정행각이라는 뜻이야. 여기 부자 동네네…… 오래되고 아름다운 건축물들이 많고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은퇴한 노인들이나 성공한 예술가들이 모여 사는 조용한 동네. 진정한 뉴욕의 감성을 보여주는…… 집값이 어마어마하대! 선우 씨가 이런 동네에 집을 얻겠다고 했단 말이야?”
“우리 엄마 아빠도 부자잖아. 카드 주신 거 보고도 몰라? 집도 좋은데 얻어주시나 봐.”
말은 그렇게, 뻔뻔하게 한 민아가 코를 찡긋거리며 눈을 빠르게 껌벅거렸다.
“왜? 양심에 찔려? 너, 우니??”
“응. 양심에도 찔리고 눈물도 좀 나네.”
“……잘 놀다가, 갑자기 왜. 그러지 마.”
금세 빨개진 민아의 코끝을 본 은조는 동생의 등을 토닥거렸다.
“언니, 내가 속이 없어서 시부모님한테 엄마 아빠 소리가 잘 나와. 근데…… 그래도, 진짜 우리 엄마 생각도 자주 해.”
“…….”
“엄마가, 착하게 살다 갔나 봐. 그러니까 우리가 이렇게 복을 받지, 그렇지?”
“그래, 맞아. 특히 나.”
은조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번졌다.
“엄마는 얼굴도 예쁘고 전생엔 나라도 구했나 봐. 너무- 고맙다. 보고도 싶고.”
“이따 잠들기 전에 사진 봐. 언니한테 온 것처럼 네 꿈에도 오시라고 기도해 봐, 응?”
“칫, 엄마는 언니 꿈에만 찾아가서 다정하게 굴고.”
“너 지금 얼굴 다온이랑 똑같아! 와, 신기할 정도네.”
“언니! 놀리지 마!”
“그리고 이민아, 너는 속이 없는 게 아니고 다정하고 붙임성이 좋은 거야.”
“그렇지?”
급속도로 가라앉았던 기분이 다시 원 위치로 돌아왔는지 민아가 씩 웃어 보였다.
“응, 네가 나보다 낫다.”
활짝 웃은 은조가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았다.
뉴욕은 지금 아침이다.
“언니, 약속 있어? 수상하게 시간은 왜 자꾸 확인해?”
“수상하긴…… 선우 씨가 다시 전화한다고 한 거 아냐?”
“밤새 병원에 있었으니까. 이제 퇴근할 때쯤 됐는데…….”
드르르- 드르르- 민아가 때마침 진동하는 휴대폰을 들어 보여 줬다.
[♥오빠♥]
“귀신이다, 그렇지?”
“그럼, 통화해.”
자리에서 일어선 은조가 급하게 제 방으로 쏙 들어가는 모습에 민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
.
이쯤이면 제니스가 잠에서 깨어났을 시간이다.
내내 뉴욕의 아침을 기다리던 은조는 방안을 서성거렸다.
아직 납작한 아랫배를 손으로 쓸어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가야지. 가긴 가는데…….
“하…….”
재하를 볼 생각을 하면 도저히 마음이 가라앉지 않는다.
이제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다가도 다시 화가 솟구치는 것도 같고…… 그래도 어쨌든 아기 아빠니까…….
“아빠니까, 뭐? 어쩌라고? 내 아기야! 아무도 못 건드려! 절대!!”
그래도 아기가 생겼다고 알려주는 게 맞으니까.
알려만 주는 거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그럼 제니스한테는 어떡하지? 아시면 좋아하실 텐데. 더, 살고 싶은 이유가 될지도 모르잖아.
설마 법적으로 뭐 그런 이야기를 꺼내지는 않겠지. 그건 권재하도 못하는 거니까.
“후…….”
심한 감정 기복을 겪는 것이 민아만은 아니었다. 은조도 임산부이기는 마찬가지니까.
침대 앞 푹신한 러그 위에 앉은 은조는 휴대폰을 열었다.
Rrrr- Rrrr-
[은조야!]
[안녕하세요, 제니스.]
[응, 좋은 아침- 아니 서울은 밤이지! 여행 준비는 잘 돼가고?]
[네 그것 때문에요, 그 비행기……??]
은조는 어느 틈에 방안으로 들어와 있는 민아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입모양으로 ‘왜?’를 보여 줬지만 역시 눈을 동그랗게 만든 민아가 옆에 앉으며 전화기에 제 귀를 댔다.
[비행기? 당연히 너랑 민아, 다온이만을 위해 대기 중이지, 당장 띄울 수도 있어.]
놀라서 입을 떡 벌린 민아가 은조에게 더욱 바짝 붙었다.
[제니스, 죄송한데 제가 잠시 후에…….]
"헬로, 제니스! 디스이즈 민아!! 나이스…… 헙.”
당장 나가! 눈을 치켜뜬 은조가 민아의 입을 막았지만.
흥, 중이 제 머리 못 깍지. 나도 낄래! 그 손을 뿌리치는 민아의 힘이 더 셌다.
[오오! 민아도 있었어?]
“나이스 투 밋 츄! 제니스! 이츠 마이 플레저!!!"
미쳐…… 동생의 영어 실력 앞에서 은조는 울상이 되었다.
[나도 반가워, 민아도 비행기에 대해서 알고 있지? 여기는 이미 모든 준비를 끝냈어. 너희들이 편한 날짜랑 시간을 알려 주면 바로 출발 하거야. 나는 정말 기대하고 있단다.]
"예스!!! 예스!! 아임 루킹 포어드 투 잇, 투!"
복권이라도 당첨된 것 같은 얼굴로 콩글리시를 쏟아내는 민아.
언제 켜진지 모르겠는 휴대폰 스피커를 통해 호탕한 제니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 밤, 부끄러움은 온전히 은조의 몫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