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10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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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27.
편안한 시간이 흘러갔다.
마지막으로 출근을 하던 날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같은 시간에 잠에서 깨어난 은조는 간단한 아침 식사를 했고 언제나처럼 단정하고 수수한 옷을 차려입었다.
같은 길을 비슷한 속도로 운전해 회사에 도착했다.
1층 카페에서 주문한 차를 기다리면서는 회사 정문과 로비, 안내데스크 등을 죽 둘러보았다.
장 팀장은 돌아오고 싶으면 언제든 연락을 하라고 했다.
“……글쎄.”
JS에서 보낸 지난 5년, 그녀는 모범생 중에 모범생이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제 시간에 출근했고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다.
“대추차 나왔습니다.”
“감사합니다.”
따끈한 잔을 받아들자 마자 은은한 생강향이 올라왔다.
대추차라니. 그것도 출근한 아침 회사에서, 머리 희끗한 임원들이 즐겨 마실법한 대추차를 본인이 마시게 될 줄은 몰랐다.
“……그런데 이렇게 됐네.”
역시 이런 식으로 회사를 그만두게 될 줄도 몰랐다. 마찬가지로 돌아오겠다는 생각 또한, 아직까지 한 번도 해본 적 없다.
그렇게 될지 어쩔지 모르는 게 앞으로의 일이니까.
결코 있을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일도 이렇게 일어났는데- 앞으로의 일을 어떻게 알겠는가.
이상하다. 이제까지의 윤은조를 보자면 보물 같은 아기를 지키기 위해 그 어느 때보다 철저하게 계획을 세우고 실천할 것 같은데.
뭘 믿고 이렇게 딴사람이 된 것처럼 느긋하게 구는지 모르겠다.
아가야, 네가 세상에 오자마자 나를 바꿔버리나 봐.
살며시 입꼬리를 당겨 미소를 짓던 은조의 눈에 이원영 대표가 들어왔다.
수행원 몇을 거느리고 임원들이 사용하는 엘리베이터가 있는 방향으로 향하는 그의 걸음은 빠르고 활기찼다.
“…….”
재하의 안목은 옳았다.
이원영은 시원한 바람이었다.
느리게 흘러가던 회사에 잠재력 충만한 젊은 대표는 새롭고 신선한 바람이 분명했다.
그의 취임이후 JS는 속력을 내고 있었다. 주저함 없이 넓은 바다로 나아가는 중이다.
안팎에서 의구심을 갖고 주시하던 시선들도 사그라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원영이 괜찮은 사람이라는 건 은조도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는 회장을 아버지로 둔 사람처럼 행동하지 않았다. 똑똑한데 겸손하기까지 하다.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해!”
자기가 뭐라고. 눈살을 찌푸린 은조는 양손으로 따듯한 잔을 감쌌다.
재하가 떠났다는 것을 안 그날.
혼자 야근을 하던 은조에게 차를 사들고 왔던 이원영. 비밀 이야기라도 있는 것처럼 은조의 맞은편에 자리하고 앉은 그가 들려준 말은 정말 놀라웠다.
아니, 화나고 짜증났다.
회사 대표직을 제안한 권재하를 만난 이야기. 거기까지는 별로 대수로울 것도 없고 왜 이런 이야기를 내개 하나, 싶었는데.
[은조 씨도 같이 미국으로 가냐고 제가 물었어요. 딱히 이유가있어서 물은 것은 아니고, 그냥 나도 모르게 나온 질문이었던 거 같아요. 내가 은조 씨한테 호감이 있어서 그랬을 수도 있고요.]
몰랐던 거 아니죠- 사람 좋은 웃음 앞에서 은조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권 대표님이 본인과 은조 씨의 관계를 부정하시더라고요. 그 얼굴이…… 뭐랄까…… 아닌 척 애쓰셨지만 괴로워 보였어요. 결론은 제가 끼어들 일은 아니지만, 아까 말했듯이 주제넘지만- 좋아요, 직설적으로 말하죠. 오늘 내내 은조 씨 얼굴을 보는데 그날 본 권 대표님 얼굴이 겹쳐지더라고요.]
이원영의 건넨 조심스러운 조언의 내용인 즉은, 자존심 때문에 소중한 사람을 놓치지 말라는 것이었다.
자상한 오빠 같은 조언에 대한 은조의 대답은 짧고 건조했었다.
[세상에 깨지는 인연은 많아요. 저라고 특별한 건 없습니다.]
하지만 은조는 알고 있었다. 그 순간에도 자신은 아닌 척 애쓰고 있다는 것을.
이원영의 눈을 피하는 은조는 비스듬하게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결코 치유될 수 없을 정도의 크고 깊은 상처에 대해 말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이제 다시는 권재하를 볼일이 없다고 믿었으니까.
그런데…… 이렇게 아기가 생겼고, 며칠 뒤 그가 있는 뉴욕으로 가게 되었다.
“…….”
은조는 얼른 따듯한 차를 한 모금 넘겼다.
재하를 다시 볼 생각만 해도 숨이 답답해지고 온몸이 굳어버리는 느낌이 들었다.
.
.
점심 식사 전 퇴근할 예정인 은조에게 동료들은 아쉬운 마음을 전했다.
서로의 건강과 안녕을 바라는 따듯한 인사의 말들도 다른 보통의 날처럼 차분하게 오고갔다.
작은 선물도 몇 개 받았는데, 제법 큰 종이가방을 건넨 최장미는 ‘꼭, 혼자 보세요.’라고 속삭이더니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송별회도 거절하시고 너무하세요.”
“장미 씨 은근 구식이야, 알아? 무슨 송별회야, 심심하면 놀러 온다고 했잖아. 근데 얼마나 대단한 게 들어있기에 혼자 보래?”
“어어- 안돼요! 꼭 혼자 보셔야 된다고요!”
옥신각신 장난을 치는 두 사람에게 다가온 장 팀장은 봉투를 내밀었다.
“이건 까까 사 먹으라고. 장미 씨 말대로 생략된 송별회 비용이라고 생각해도 되고.”
“선배님, 우리 그 봉투- 그거 열어 봐요! 팀장님이 까까 용돈 얼마나 쓰셨나 봐요.”
“얼마든지.”
장 팀장은 말리지 않았고, 봉투 안에서 나온 금액을 본 디자인팀 모두가 입을 떡 벌렸다.
“이런 게 진짜 플렉스지.”
팀장의 말에 여기저기서 휴직을 원한다는 소리가 나왔다.
사무실은 웃음소리로 가득 채워졌다.
***
“대박…….”
설거지를 하던 민아가 물을 틀어놓은 채 현관 앞에 있는 캐리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오후 5시에 비행기에 오를 세 사람의 짐이 담긴 두 개의 큰 캐리어였다.
“이민아, 정신 안 차릴래?”
“…….”
다온이와 과일을 먹던 은조가 목소리를 높였지만 들리지도 않는지 그대로다.
늦은 점심 식사를 마친 세 사람은 시간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공항까지는 병현의 수행비서가 데려다줄 예정이었다.
“민아야!!”
“이모! 물은 아껴야 하는 거야!”
다온이까지 합세하고 나서야 수돗물을 잠근 민아가 고무장갑을 벗었다. 하지만 마른행주를 집어 들며 또 같은 말을 했다.
“……생각할수록 대박이다.”
“엄마, 이모가 꿈꾸는 것 같아서 그러는 거랬어. 나도 너무 신나! 채린이한테도 자랑했어, 비행기 탄다고.”
“그랬어? 채린이가 뭐래?”
“음…… 채린이는 또 타고 싶지 않다고 했어. 움직이지 못하고 의자에만 앉아있어야 해서 힘들었대. 엄마 근데 우리는 네 명이잖아? 그럼 돈 얼마야? 되게 비싼 거지?”
다온이의 시선이 최장미가 선물한 아기 용품에 머물러있다.
어떻게 알았는지 후배가 마련한 선물은 아주 작은 신생아 신발부터 인형에게나 입힐법한 앙증맞은 크기의 옷까지 그 내용이 다양했다. 성별에 상관없는 색깔과 디자인이 꽤나 신경 쓴 티가 났다.
“윤다온, 우리가 타는 비행기는 제니스 할머니 거라고 했잖아.”
두 사람 곁으로 다가와 앉은 민아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응, 그럼 돈 안내도 돼?”
“당연하지. 그리고 너는 비행기 안에서 뛰어다녀도 될 거야. 물론 기장 아저씨가 허락해야 하지만. 역시 대박!”
“……?”
아이가 정말이냐는 눈빛으로 은조를 바라보았다.
“뛰어다니는 건 좀 위험할 것 같지만 다른 비행기보다 넓고 편할 거야. 버스보다 엄마 차가 편하지? 그런 거처럼.”
“엄마 차보다 카일 아저씨 차가 더 크고 좋은데.”
“……그렇지.”
기, 승, 전, 카일- 다온이는 여행을 앞두고 부쩍 재하의 이름을 들먹였다.
은조는 재빨리 다온이의 관심을 끌만한 질문을 했다.
“비행기에는 조종하시는 분 말고 다른 분들도 계실거야. 처음 보면 어떻게 인사한다고 했지?”
“헬로우, 나이스 투 밋 츄.”
심드렁하게 말한 아이의 머리를 민아가 쓰다듬었다.
“언니 그런 수준 낮은 질문이 말이 돼? 그렇지, 다온아? 우리 강아지 얼마나 영어를 잘하는데. 음- 물 말고 주스를 주세요- 해 봐.”
“플리즈 기브 미 주스! 낫 워터! 나 주스도 싫어!”
“졸리구나, 우리 다온이.”
“안 졸려! 아임 낫 슬리피!! 이모 미워, 영어 안 해!”
“대박!”
아이는 잠이 오는 게 맞고, 민아는 마냥 신이 나 있었다. 아웅다웅하는 둘을 남겨둔 은조는 빈 접시를 들고 주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장시간 비워두게 될 집의 안팎을 다시 한번 꼼꼼하게 살폈다.
아직 뉴욕에 도착한 것도 아닌데 애가 바짝바짝 타들어가는 기분이었다.
***
약 3시간 후, 김포비즈니스항공센터(SGBAC).
민아의 말대로 ‘일반인들은 평생 갈 일 없는’ 그곳에 은조의 가족이 도착했다.
기업인이나 세계적인 스타들이 이용할 만한 전용 수속 시설을 갖춘 최신식 터미널은 인천 국제공항과는 사뭇 달랐다.
여행객들을 위한 곳이 아닌 만큼 썰렁하다 싶을 정도로 한산했고 출국 심사를 마치는 데는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탑승구를 막 빠져 나온 세 식구에게 낯선 이들이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윤은조 씨 맞으시죠? 가족 분들이시고요.”
한국인으로 보이는 여성이 은조에게 다가오며 환하게 웃었다.
“반갑습니다. 저는 통역을 도와드릴 김서연입니다.”
“안녕하세요.”
김서연은 얼떨떨한 표정의 은조에게 자연스럽게 소개를 시작했다.
“이쪽 분이 기장 미스터 뉴먼, 여기는 부기장 미스터 크루즈, 승무원인 미세스 아바스, 그리고……,”
제일 뒤쪽에 서있던 노 신사가 앞으로 나오며 손을 내밀었다.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크리스 보머라고 합니다.]
“헬로우, 나이스 투 밋 츄, 미스터.”
입이 닫힌 자매를 제치고 당당하게 인사를 건넨 다온이가 보머 씨의 손까지 잡았다.
[네가 다온이구나, 귀엽고 똑똑하다더니 제니스 말이 딱 맞네. 반갑다.]
“……?”
“제니스 할머니가 다온이는 귀엽고 똑똑한 아이라고 말했어요. 보머 씨가 그 말에 동의한다고 하셨고요.”
통역을 맡은 이가 빠르게 내용을 전달하자 영민한 아이는 바로 상황을 이해했다.
“카일 아저씨를 만나려면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지 물어 봐 주세요!”
은조가 말리기도 전에 김서연이 기장에게 질문을 했고 바로 답이 돌아왔다.
[If there's nothing unusual, about 10 hours?]
10시간…….
어지러움을 느낀 은조는 민아의 팔을 붙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