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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보고 싶어 (87/100)


87. 보고 싶어
2023.03.30.



 


“괜찮아 언니?”

민아는 비틀거린 은조의 안색을 살폈다.


“괜찮아, 좀 어지러워서…….”

“얼굴이 창백하세요. 일단 탑승하시죠, 나오지 않으셨지만 기내엔 의사 선생님과 간호사분도 계십니다.”

“……의사요?”

잘못 들었나 싶어 물었지만 짧게 네-라고 대답한 김서연은 탑승을 서둘렀다.

기장과 부기장이 앞장섰고 승무원들이 그 뒤를 따랐다. 김서연과 이야기를 주고받던 보머 씨가 상황을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자, 우리도 움직일까요.]

점잖은 태도로 길을 안내하는 그가 느리고 정중하게 덧붙였다.


[미스 윤, 의사와 간호사는 항상 탑승한답니다. 특별한 게 아니니 놀라실 것 없습니다.]

[……그렇군요.]

걸음을 옮기던 은조는 노신사를 향해 미소 지었다.


[오히려 저의 비행기 탑승이 특별한 케이스라면 믿으시겠습니까?]

[……특별한 케이스라면, 어떤……?]

제니스와 동년배로 보이는 그가 이 비행의 총책임자라는 것은 느낌으로 알았지만 방금 한 말은 정확하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역시 김서연이 빠르게 제 역할을 했다.


“보머 씨는 퇴근이 아니고서는 제니스의 집을 떠나는 일이 거의 없으세요. 이번 비행은 아주 특별한 케이스가 맞습니다. 은조 씨와 가족 분들을 최고로 편하게 모시고 싶은 제니스의 마음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네,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아요.”

“언니, 한눈에 봐도 포스가 장난 아니신데. 베테랑 중에 베테랑이신가 봐. 그렇지?”

“응, 그런 것 같아.”

“네, 맞아요. 여러 면에서 제니스와 카일이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시는 분이세요.”

한마디로 제니스는 아끼고 믿는 최측근을 자신 대신 보낸 것이다.

딱 봐도 노련함이 넘쳐나는 그는 한국어도 다 알아듣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
.



“와~!”

“……대박.”

민아와 다온이는 기쁨과 흥분을 감추지 않았다.

재하를 마주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마음이 무거운 은조만 다른 세상에 있었다.


[일단, 편하게 앉으시죠. 이륙 준비는 얼마 걸리지 않습니다.]

보머 씨의 말이 끝나자마자 두 명의 승무원이 차례대로 스팀타월과 물을 가져왔다.

은은한 장미향이 나는 따뜻한 타월에 손을 문지르자 마음이 조금 안정되는 기분이 들었다.

은조는 되지도 않은 영어에 손짓 발짓까지 섞어가며 스스럼없이 보머 씨와 이야기를 나누는 민아와 다온이를 바라보았다.

스스럼없이 동네 할아버지 대하듯 하는데 노신사는 전혀 불편한 기색이 없다. 그들만큼이나 상황을 즐기는 모양이다.

혼자만 비밀스럽게 애를 태우던 은조는 비행기가 뜨면서 다온이와 민아가 지른 환호성에 잠깐 현실로 돌아왔었다.

이후 어디서도 받아본 적 없는 고상하고 기품이 있는 서비스들이 줄줄이 이어졌지만 은조는 결국 침실 칸을 차지하고 누워버렸다.

마치 깊게 잠이 든 밤바다의 한가운데 누운 것 같았다.

침대가 부드럽게 흔들릴 때마다…….

권재하. 권, 재하. 그 세 글자가 은조의 몸을 가볍게 띄우기도, 아래로 부드럽게 잡아당기기도 했다.

울렁거렸다. 잠은 오지 않았다.

아이가 생겼어. 당연히 아이 아빠는…….

나 임신했어. 그렇다고 달라지는 건 없지만…….

놀라지 말고 들어. 나 임신 13주야, 곧 배도 나올 거야!

나쁜 놈…….


“……지금 아기는, 키가 7cm 정도고 몸무게는 20g 정도 된대……. 소리도 들을 줄 알고 몸도 움직인다고…….”

“……언니? 누구랑 얘기해?”

놀라서 고개를 드니 다 안다는 듯 싱긋 웃는 민아의 얼굴이 있었다.


“왜!! 놀랐잖아!”

“안 자고 있었네? 보머 씨가 언니 잠들었나 좀 봐달라고 해서. 뭐 좀 먹을래? 안 출출해?”

싫어- 누워있는 은조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뭐 다른 거 필요한 거 없어?”

“음악. 음악 좀 듣게 이어폰 가져다줘. 안 보여.”

“오케이 아이 갓 잇. 다 잘 될 거야, 너무 긴장하지 마. 반짝이 힘들어. 응?”

민아는 은조가 덮고 있는 담요를 목 아래까지 올려주고 나갔다.

그리고 잠시 뒤 나타난 승무원이 은조가 음악을 들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특별히 듣고 싶은 음악이 있으면 말씀하세요, 찾아드릴게요.]

[……드뷔시.]

정말 그러고 싶지 않았는데.

달빛을 찾는 은조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다. 눈물이 촉촉하게 배어 있었다.

이내 잔잔한 선율이 부드럽게 가슴을 파고들었지만 재하가 그리던 그것과 달랐다.


“…….”

눈을 감은 은조는 그날 밤 집 안을 가득 메웠던 나비의 날갯짓을 떠올렸다.

재하가 그리던 파랗고 긴 달빛의 장막과 아름다운 얼굴에 번지던 흐릿한 미소…….

그리고…… 달빛보다 감미롭던 그 눈빛.

내가 가고 있어, 우리 아기와 함께.

6년 전 그때처럼 말이야.

이젠 안 그럴 줄 알았는데…… 다를 줄 알았는데.

여전히 두렵고 떨려.

그리고 네가,


“……보고 싶어.”

아주 느린 걸음으로 달빛 위를 걷던 그녀의 뺨 위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



"돈이 많으면 좋긴 좋다. 그렇지, 언니?"

비현실적인 비행을 마치고 공항에 대기 중이던 고급 SUV에 오르며 민아가 한 소리다.

자동차는 잠이 든 다온이를 눕히고 보머 씨까지 태우고도 공간이 남을 정도로 넓었다.

긴 비행시간과 시차 때문에 은조도 민아도 조금 지친 상태였다. 일단 호텔에 체크인을 하고 쉬는 시간을 가질 예정이었다.

비행시간에 내내 깨어있던 민아는 좌석에 기대자마자 바로 눈을 감았다. 다온이도 젖혀진 좌석에서 편안하게 잠들어 있었다.


[미스 윤, 편하게 쉬세요, 호텔까지 족히 한 시간은 걸립니다.]

[네, 보머 씨도 좀 쉬세요. 저는 비행 내내 거의 누워 있었잖아요.]

[긴장하신 것처럼 보입니다.]

[……조금이요.]

[내내 흐리더니 오늘은 날씨가 아주 화창합니다. 좋은 일이 기다릴 것 같아요.]

흐린 미소로 고개를 끄덕인 은조는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이국의 도시를 바라보았다.

세계에서 가장 트렌디한 도시, 여행자들의 로망. 하지만 6년 전이나 지금이니 똑같다.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물론 지금은 그때처럼 길을 잃을까 봐 걱정하지는 않아도 되지만…….

결국은 마주쳐야 할 남자를 생각하면 그때보다 더 애가 타들어가는 기분이다.

그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
.

호텔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2시였다.


[간단한 요깃거리를 방으로 주문했습니다. 그럼, 저녁 식사 전에 모시러 오겠습니다.]

베테랑 집사는 뉴욕의 최고급 호텔 스위트에 은조의 가족을 남기고 떠났다.

지친 기색도 흐트러진 모습도 없이 꼿꼿한 그는 제니스가 치료를 받고 있는 병원으로 간다고 했다.

짐을 대충 푼 민아는 호텔의 화려함에 대해 떠드는 대신 빠른 샤워를 마치고 가지고 온 옷 중에서 예쁜 것을 골라 입었다.

곧 선우가 호텔에 도착할 것이다.


"같이 가자. 언니가 집을 봐 줘야지."

"내가 미국의 집을 본다고 뭐 알겠어? 둘이 집 둘러보는 동안 다온이랑 근처 구경할게."

오랜만에 만나는 선우와 민아의 행복한 시간에 끼어들 생각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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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온아, 잘 지냈어?"

"안녕하세요."

반색을 하는 선우에 비해 다온이는 시큰둥하게 배꼽인사를 했다.

또 재하 이야기를 꺼낼까 봐 불안한 은조는 서둘러 동생 커플과 차에 올랐다.

운전을 하며 그리니치 빌리지에 있는 집에 대해 이야기하는 선우는 조금 들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충분히 이해가 간다. 사랑하는 여자와 아기, 거기에 근사한 집까지. 누군들 행복에 넘치지 않겠는가.


"선우 씨 이렇게 말 많이 하는 거 처음 봤어요. 행복해 죽겠죠?"

은조의 농담 섞인 핀잔에 선우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운이 좋았어요, 아니 우리 능금이가 운이 좋은가 봐요."

능금이는 민아 아기의 태명이다.

은조는 옆에 얌전하게 앉아 차창 밖을 바라보는 다온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능금이란 태명은 당연히 태몽을 꾼 남희가 지었는데 김춘수 시인의 시 제목에서 따왔다고 했다.

아무튼 반짝이와 능금이-라는 말은 다온이가 요즘 제일 싫어하는 말이다.

은조가 아이의 머리에 입술을 누르자 아이는 은조의 팔에 머리를 기댔다.


"강아지, 엄마랑 맛있는 거 먹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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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우 역시 같이 움직이자고 했지만 은조는 거절했다.


“이렇게 날씨가 좋은데? 우리는 거리 구경하고 아이스크림도 먹을 거야.”

민아와 선우, 둘은 얼마나 할 말이 많고 서로를 안아주고 싶겠는가.

당장이 아니어도 앞으로 가족 모두가 함께할 시간은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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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온이의 손을 잡고 걸은 지 10분이나 지났을까. 은조는 걸음을 멈추었다.

핑크색의 커다란 컵케이크 모형이 눈에 들어왔다.

방금 전까지 짙은 낙엽 냄새를 느끼고 있었는데- 마치 마법처럼 달콤한 향기가 주위에 가득했다.


"엄마, 케이크야!"

다온이가 은조의 손을 잡아끌었다.

귀여운 간판을 건 가게의 이름은 ‘러브 어페어’였다.

입구에 이르러서야 민아가 꼭 가보자고 한 컵케이크 가게라는 것이 기억났다.

하지만 아이는 은조의 손을 잡아끌었고 마침 가게를 나오던 남성은 둘을 위해 문을 잡아주고 있었다.

가방을 열고 지갑을 찾으며 안으로 들어서던 은조는,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순식간에 얼어버리고 말았다.


“……!”

뒤돌아서 있지만.

누군지 한눈에 알아보았다.

권재하.

그가 있었다.

예민해진 은조의 코는 이미 특유의 매력적이고 남성적인 그의 체취를 느끼고 있었다.

아니, 느낀다고 착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 순간 자체가 가짜처럼 느껴지니 말이다.


"……."

“……엄마?”

그 남자가 곁의 여자에게 커피가 든 잔을 건네며 웃는다.

손으로 빗어 넘긴 듯한 머리카락은 자연스럽게 흐트러져 있었다.

겉모습은 6년 전 그날과 달랐지만. 그 미소는…… 똑같다!

다른 여자를 향해 근사한 미소를 만든 권재하를 바라보던 은조는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온몸에서 힘이 빠지며 아이와 함께라는 사실도 잊어버렸다.

밖으로, 그가 없는 곳으로, 안 보이는 곳으로 달아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아저씨? 카일 아저씨!!"

반쯤 놓아버린 힘없는 손을 뿌리친 것은 다온이였다.

아이가 그를 향해 돌진했다.

마치 잃어버렸던 주인을 만난 강아지처럼 빠르게.


“…….”

그렇게 은조는 재하의 품에 안기는 다온이의 모습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아이를 번쩍 안아 올린 그가 천천히 다가왔다.


“……은조야.”

고개를 가로젓는 은조는 저도 모르게 뒤로 한걸음 더 물러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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