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너무너무 보고 싶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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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너무너무 보고 싶었어요
2023.04.03.
“은조야, 괜찮아…… 진정해.”
아기도 아닌 다온이를 한 팔로 안은 재하가 다른 한 손을 뻗었다.
놀란 것도 잠시, 그는 이미 침착하고 부드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 막혔던 숨길이 열리며 뻣뻣하게 굳었던 몸이 풀리는 것을 느낀 그때,
"아저씨! 흐아아앙- 보고 싶었어요."
재하의 목에 바짝 매달린 다온이가 울음을 터트렸다.
“그래, 동구리. 아저씨도 보고 싶었어.”
“…….”
“잘 지내는지…… 너무 궁금했어. 많이…… 보고 싶었고.”
진심이야…… 보고 싶었어. 다정하게 아이를 달래는 재하의 시선은 은조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왜- 흐앙, 말도 안 하고 이사 갔어요. 으아아앙-.”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그만 울어 응?”
큼직한 손이 부드럽게 아이의 등을 토닥였다.
칭얼거리며 더욱 재하에게 달라붙는 아이는 온몸으로 그리움과 섭섭함, 사랑을 표현하고 있었다.
제 감정을 어디까지 보여줘야 할지, 그것에 상대는 또 어떻게 반응할지, 재고 따지기는커녕 일말의 망설임조차 없는 것이다.
은조는 그런 아이가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10시간 동안 자신이 했던 온갖 생각들은 다 부질없는 것이다.
그래도…….
뾰족하게 올라가는 은조의 눈이 재하의 옆으로 다가온 여성에게 향했다.
이번엔 금발이 아니고 동양 여자다.
“아, 이쪽은…….”
“와! 네가 다온이구나! 사진보다 훨씬 귀여워요!”
사진, 보다?? 이제 은조의 눈은 더 커질 수 없을 정도로 커진데다 한껏 사나운 빛까지 띄고 있었다.
살짝 누그러지려 했던 마음에 다시 원망이 번졌다. 유치하대도 어쩔 수 없었다. 절대 먼저 입을 열지 않겠다는 듯 입을 앙다물었다.
애틋함 가득한 재하의 눈빛이 그런 은조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은조야, 여긴 박상아 씨라고, 같이 일하는 분이야.”
“안녕하세요, 박상압니다.”
골이 난 아이 같은 얼굴의 은조에게 박상아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온화한 표정이 꼭 선생님 같았다.
“윤은조라고 합니다. 참고로 저는 권재하 씨와 낫띵- 아무런 사이도 아니고요.”
새침한 인사에 괜한 소리까지 덧붙인 은조는 박상아의 손을 잠깐 잡았다 놓았다.
그리고 당황한 빛이 역력한 재하에게 따가운 눈길을 보냈다. 낫띵- 설마 잊은 건 아니지? 흥.
그렇게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은지 3분이나 지났으려나.
“아저씨, 너무너무 보고 싶었어요.”
눈물이 잦아들었는지 다온이가 또 시작을 했다.
재하만 들으라는 듯 그의 귀에 대고 속삭인다고 하는 소리가 아주 잘 들렸다.
“윤다온, 그만해. 이제 내려와.”
켕긴다는 게 이럴 때 쓰는 말인가. 다온이가 진심 어린 그리움을 고백할 때마다 은조는 제 뺨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괜찮아, 전혀 안 무거운걸.”
다정한 재하의 목소리에 다온이의 작은 양팔에 힘이 들어가는 게 보였다. 녀석은 이제 은조를 아예 없는 사람 취급했다.
“다온아, 엄마한테 와야지.”
“아저씨랑 살 거야!! 아기 싫어! 동생은 필요 없다고!!”
“……!”
“엄마 미워! 으아아앙-.”
놀란 은조가 손으로 입을 막았지만-
“동생 생겼구나? 질투하나 보네요! 아휴~ 귀여워라!”
모르고 그랬겠지만- 귀신같이 정곡을 찌른 박상아 덕분에 식은땀이 솟았다.
“다온이 너무 귀엽네, 재하 씨, 얼른 같이 살겠다고 해요! 뭐야, 그 표정은?”
“……저야, 백번 천번도 더 같이 살고 싶죠.”
“정말이에요??”
반짝 고개를 든 다온이가 훌쩍거리며 물었다.
“……응, 정말이야.”
은조를 바라보는 재하의 눈빛에 간절함이 담겨 있었다.
맙소사. 대체 이 상황은 무엇인가. 아이를 사이에 두고 어른 둘이 대체 무얼 하고 있는 거지.
은조는 뜨거워진 이마를 손등으로 문질렀다.
“제가 시원한 음료랑 케이크를 좀 가져올게요.”
박상아가 눈치 있게 자리를 피했다. 멀어지는 그녀의 등을 바라보는 은조는 마른침을 삼켰다.
목이 바짝바짝 타들어가는 건 맞다.
아무것도 모르는 재하는 다시 울먹이는 다온이를 바닥에 내려놓더니 꼭 끌어안았다.
“그런데 아기가 왜 싫어? 동생 생기면 다온이가 씩씩하게 지켜줘야지, 안 그래?”
“싫어요!! 반짝이도 능그미도 다 싫어!! 엄마는 매일, 흐응…… 아기 생각만 하고 이제 다온이는…….”
“아, 아가! 다온아, 이리 와. 엄마한테 와, 응?”
“……아기 생겼다는 얘기 들었어.”
다온이의 눈물을 닦아주는 재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뭐? 뭘, 들었다고?”
“최선우. 얼마 전에 우연히 만났거든.”
“……!”
큰 숨을 들이마신 은조는 주위를 살폈다. 다리에 힘이 풀려 좀 앉고 싶었다. 아니면 이만 가게를 나가거나.
“다온아, 우리 그만 이모한테 가볼까?”
아니-아니- 아이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난감하다. 조용하고 침착하게- 아무렇지 않게 임신 사실을 알리려고 마음먹었는데. 이러다가는…….
“그게…… 저녁에 제니스랑, 아, 우리 오는 거 모르고 있었구나, 제니스가 알려준 줄 알았어…….”
“…….”
재하가 접었던 무릎을 펴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은조는 다시 들이마신 숨을 그대로 가슴에 가두었다.
남자의 눈은 여전히 깊고 검고, 아름다웠다.
그 눈이 숨겨진 무엇을 파헤치려는 듯 잠잠하게 은조를 더듬었다.
“……왜? 이제라도 알았으면 됐지, 뭐. 아무튼 저녁을, 저녁 식사를 같이할 건데 굳이 여기서 이렇게…….”
피할 겨를도 없이 불쑥 다가온 손이 은조의 뺨에 붙어 있던 머리카락을 슥- 밀어냈다.
“……!”
“은조야, 너 되게 창백해.”
“아, 아니…….”
반박부터 하려던 은조의 손목을 재하가 붙들었다.
“저쪽에 앉자.”
.
.
은조는 약 5분 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박상아가 가져온 음료와 케이크를 먹는 다온이를 바라보며 눈만 껌벅거리는 게 전부였다.
그런 그녀에게 차가운 물까지 건넨 박상아는 근처에 있는 사무실 이야기를 했다.
출판사, 봄.
그리고 은인(恩人)…… 은인? 은혜를 베풀었다고?
차가운 물이 들어가자 머리가 제대로 작동을 시작했다. 어떤 그림 뒤에 숨은 또 다른 은인이 보였다.
아니, 어떤 좋은 집인가.
“…….”
“제가 주책맞게 말이 좀 많았죠?”
“아니에요! 이거- 물이랑 케이크 감사해요.”
내내 불퉁하게 굴던 자신이 부끄러워진 은조는 표정에 미안함을 담았다.
“에이~ 겨우 이 정도 가지고 뭘요. 나중에 또 봬요. 그땐 은조 씨가 재미있는 이야기 많이 들려줘요. 자- 귀여운 다온, 다 울었으면 아줌마한테 인사해 줄래? 미국식으로.”
양 팔을 벌린 박상아에게 다온이가 쏙 안겼다.
언제 봤다고, 고얀 녀석…….
아이의 머리에 소리 나게 입을 맞춘 박상아는 이내 가게를 떠났다.
“여기 케이크 맛있어, 한 입이라도 먹어 봐. 얼굴이 왜 그 모양이야.”
“내 얼굴이 어때서? 그런 말 하는 본인은? 얼굴이 어떤 형편인지 몰라?”
“나야 뭐…….”
머쓱한 표정의 재하가 턱을 문지른다.
“설마 아직도 잠을 못 자는…….”
가방 안에서 울리는 전화벨 소리 때문에 말을 마치지 못했다. 민아였다.
“잠깐만, 전화 좀 받고 올게. 응, 민아야!”
“…….”
창가 쪽으로 가버리는 은조를 재하의 시선이 좇았다.
“이모는 이제 미국에 살 거래요.”
“……그래야겠지.”
“반짝이도 데려가면 좋은데. 나랑 엄마랑 아저씨랑 셋이 살게요. 근데 릴리는 같이 살아도 좋겠다.”
불만을 담은 아이의 표정이 귀엽다. 딱 은조의 그 표정이다.
“천천히 먹어. 주스도 좀 마시고.”
“네.”
다정한 재하의 손이 아이 입가에 묻은 빵 부스러기를 떼어주었다.
“그런데 반짝이는 누구고 능그미는 누구야?”
“능금. 사과요! 이모 아기요!”
“음, 그렇구나. 그럼 반짝이는?”
“엄마 배! 요기!”
아이의 작은 손이 제 배를 톡톡 두드렸다.
“내 동생이요. 칫, 나는 동생 필요 없는데.”
“……?”
“엄마랑 이모는 맨날 아기들 이야기만 해요. 내가 잠자는 줄 알고 그러는데 다 들었어요.”
“……아기, 들?”
“능금이는 여자 아기라고 했고 반짝이는 아직 모른대요. 근데 이모가 자꾸 아들이라고 엄마한테 막 우겼어요. 정말 싫어!”
“……!”
“반짝이랑 능금이는 장난감이랑 옷도 되게 많아요. 쌍둥이처럼 똑같은 거요.”
“이모는 능금이, 엄마는…….”
“반짝이! 뱃속에 있을 때 부르는 이름이요.”
“…….”
재하의 시선이 천천히 통화 중인 은조에게로 향했다.
멀찍이 서 있는 그녀가 다시 도끼눈으로 저를 바라보았지만 머릿속이 온통 하얘서 어떤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마침 통화를 마친 그녀가 방금 불만을 터트리던 다온이와 똑같은 얼굴을 하고 다가온다.
“……윤은조.”
“왜! 어떻게 이래? 그 집, 우리 민아가 살 집! 명함 줬다며? 맞아??”
“자, 잠깐만.”
자리에서 일어선 재하가 은조에게 손을 뻗었다.
“어떻게 매번! 뒤에서 은혜를 베푸냐고 묻잖아! 해바라기 언덕에! 빌딩에는 왜 내 이름을 새겼어? 누가 좋아한다고!”
“진정해. 내가 잘못했으니까 일단 좀 앉자, 응?”
“우리 민아랑 선우 씨가 거지야? 누가 적선 해 달래? 그럼, 그렇게, 멋대로 돈이나 뿌리면…… 본인이 착한 인간 같고 만족스럽고 그래? 맞아?”
“…….”
흥분한 은조 눈에 가게 안의 사람들은 들어오지 않았다.
“네가 뭔데…… 대체 뭐라고…… 나를 다른 남자한테…… 그 건방지고 거만한 태도는 죽을 때까지 바뀌지 않을 거야. 너는, 사과해야 돼! 이원영 씨한테도- 나한테도!”
“사과할게. 미안해, 잘못했어. 그러니 제발 마음을 가라 앉혀. 아- 아기가…….”
“……?”
“은조야, 너…….”
이제야 새하얀 재하의 얼굴이 들어왔다.
아기? 설마…….
“엄마, 내가 아저씨한테 말했어! 반짝이도 이모가 데려갔으면 좋겠다고.”
“……은조야, 너…….”
재하는 파르르 떨리는 은조의 아랫입술을 바라보았다.
“그, 그래!! 나 임신했어! 아이가 생겼다고! 벌써 13주야! 곧 배도 나올 거라고! 나쁜 놈아!”
그녀의 외침에 가게 전체가 얼어붙었다.
숨죽인 손님들과 직원들, 모두가 두 사람의 다음 행동을 기다렸다.
한국말을 알아들을 리 없었지만- 그건, 꼭 설명이 붙지 않아도 그냥 저절로, 다 아는 거니까.
그리고 드디어,
남자가 천천히 여자를 제 품으로 끌어당긴 순간.
여자가 서러운 울음을 터드린 순간.
여기저기서 낮은 안도의 한숨이 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