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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나, 버리지 마 (89/100)


89. 나, 버리지 마
2023.04.06.



 


“미안해……. 정말 미안해, 내가 전부 잘못했어. 서울로 전화해서 저쪽에도 사과할게. 응? 용서해 줘, 제발…….”

재하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꿈은 아닌지, 앞에 있는 게 정말 윤은조가 맞는지, 확인하는 손길은 조심스러우면서도 조급했다.

긴 머리카락이며 가녀린 어깨. 자그마한 몸에서 전해지는 온기와 달큼한 살 냄새. 정말 너구나…….


“은조야…….”

“흐흑…… 싫어, 너 미워…….”

흐느끼던 은조가 툭, 툭 재하의 가슴을 때렸다. 그러고는 다시 그 품에 얼굴을 묻는다.

밉다고, 싫다고 말하는 그녀도 어쩔 수 없었다. 익숙한 남자의 체취에서 깊은 안정감을 느꼈다.


“그래그래, 그럼 천천히 해. 대신…… 울지 마.”

“흐으흑…….”

“……엄마, 울지 마.”

아- 다온이! 재킷의 끝을 잡아 흔드는 아이가 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맑고 순수한 눈동자에 걱정이 가득하다.

재하의 품에서 벗어난 은조는 얼른 아이를 보듬어 안았다.


“미안해, 아가……. 엄마 이제 안 울어.”

“……은조야 그런데 정말이야? 정말로 아, 아…….”

이제야 확인하고 싶어진 그 사실. 초조한 표정의 재하는 ‘아기’라는 단어를 쉽게 입에 담지도 못했다.


“아이참, 엄마 배 속에 반짝이가 자고 있다니까요! 이미 깼을 거예요! 그러면 또 구역질하는데. 괜찮아, 엄마?”

“괜찮아, 그리고 반짝이는 아직 코- 자고 있어.”

눈을 치켜뜬 은조는 창백해진 재하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뜻밖이고 우연한 재회. 내내 생각하고 계산해 두었던 침착하고 어른스러운 상황과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다.

눈치를 주는 사람은 없지만, 간혹 이해한다는 듯 미소를 보여주는 사람도 있지만…… 호기심 어린 얼굴들이 아직 그들을 힐끔거렸다.

남들은 다 아는데 정작 본인들은 자각 못하는 행위. 다투는 척 사랑하는 마음을 드러내며 벌이는 ‘애정행각’.

비로소 얼굴이 뜨거워진 은조는 반쯤 넋이 나간 재하의 소매를 잡았다.


“너무 창피해. 어떡해?”

“……응? 뭐가? 여기 자주 오는 건 난데?”

“권재하, 정신 차려봐. 나가야겠어.”

“……응. 그래.”

은조는 서둘러 달콤한 향기가 가득한 케이크 가게를 벗어났다.

한 손은 다온이의 손을, 다른 한 손은 재하의 소매를 꽉 잡고 말이다.

***

저녁 7시, 제니스의 펜트하우스.

적당하게 잘 익은 고기를 작게 썰어 입에 넣은 은조는 넓은 식탁에 둘러앉은 이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모든 예상이 빗나간 저녁식사다. 우선 대단히 격식을 갖춘 시간일 줄 알았던 생각부터 영 틀렸다.

시중을 들어주는 사람들이 식사를 하는 사람 수보다 많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스테이크와 야채 요리가 기본인 요란하지 않은 식탁이었다.

캐주얼한 차림을 한 노부부는 마치 며칠 전 만났던 손녀 대하듯 은조를 대했다.

무엇보다 놀라운 사실은 제니스가 이미 치료를 시작했다는 것이었는데, 기분이 아주 좋아 보이는 그녀는 이미 한참 전부터 은조의 임신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

은조는 저를 바라보는 재하의 그윽한 눈빛을 외면했다. 사실은 내내 이상한 눈으로 바라봐서 부담스러워 미칠 지경이다.


[호텔은 안돼요. 이 사람 저 사람 전부 들락거린 곳이잖아요. 집 놔두고 왜…….]

떨어뜨리고 있던 시선을 들어 올린 은조는 호텔이 얼마나 지저분한지 과장되게 설명하는 재하를 바라보았다.

집? 집 어디? 왜 저래, 어쩌라는 거지? 모두가 자길 보며 은근히 웃고 있는데 모르나 봐!


[재하야, 솔직히 특급호텔이 세균 덩어리일 리는 없지 않니? 다만 걱정이 되는 부분은 오히려 난방이구나. 전통을 자랑하는 호텔일수록 난방이 완벽하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잖아.]

제니스가 난방 문제를 끄집어내고 선우가 도왔다.


“처형, 그거 알아요? 뉴욕은 전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중앙난방의 도시인 거. 한국과 너무 달라요.”

[은조야, 이건 내 생각인데 **호텔이라면 추위보다 익숙하지 않은 소음이 문제 일 수도 있겠구나. 스팀해머(steam hammer)라고 부르는 소리가 있는데, 물이 파이프를 때리는 소리란다. 쿵! 쿵! 쿵! 파이프의 굴곡진 곳에 스팀으로 인한 압력이 작용하면서 내는 소린데, 나는 처음 들었을 때 귀신이 있는 줄 알았단다. 딱 누군가 망치로 파이프를 내리치는 소리 같지.]

은발의 카일 알렉시스는 긴 설명 끝에 다정한 윙크를 붙였다.

은조의 결정을 기다리는 소리가 줄줄이 이어졌다. 중압감이 밀려왔다.

흠, 헛기침을 하는 선우.


“뉴욕은 탈 원전(原電) 정책 이후 전기료가 4배 이상 폭등했어요. 조금이라도 아끼려고 노력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알고 있어요.”

“형부 집은 어때요? 춥지 않죠?”

……형부란다. 가만히 있는 게 이상하던 민아가 드디어 동참했다.


“외부는 1900년대 모양이지만 내부는 최신식이야.”

“당연한 걸 물었네. 언니, 그냥 형부 집으로 가면 안 될까? 그럼 나는 오빠 집에서 지내고 싶거든.”

역시 내 동생. 본론을 딱 던진 민아를 은조가 따가운 시선으로 응시했다.


“아저씨 집? 이제 아저씨 집에서 같이 살아요? 와! 신난다!! 아일 럽 잇!! 아임 쏘 해피!”

언니. 아기도 있고, 그만 고집부려라. 형부 보고 싶어서 울었잖아, 내가 다 알아. 아니야? 민아가 의미심장한 눈빛을 발사하고 있었다.

은조는 눈을 내리깔았다. 가슴속에 맺힌 응어리가 일순간에 사라진다면 그게 더 이상한 거지.


[다온아, 릴리도 데려가렴. 가끔 재하가 돌봐준 적이 있어서 상관없단다.]

“릴리?”

재하가 이야기를 전해 주기도 전에 귀신같이 알아들은 다온이. 이러다간 금세 통역 따위 필요 없을 듯.


“응, 릴리를 데려가고 좋다고 하셨어.”

“땡큐 쏘 머치 그랜마. 아이 러 뷰, 벗 웨얼 이즈 릴리?”

[Son, like a gentleman, finish your dinner first. And let's find Lily together.]

아들아, 신사답게 먼저 저녁 식사를 마치렴. 그리고 같이 릴리를 찾자꾸나- 느리고 또렷한 영어로 대답해 주는 재하.


“예스, 아이 언더스탠드. 댓스 베터.”

[봐라, 내 말이 맞지 않니? 네 아들이라고 했잖아. 아, 민아가 기분 나빴다면 사과하마.]

[아니에요, 절대 기분 나쁘지 않습니다, 미세스 알렉시스.]

은조는 다온이의 접시 안에서 당근을 집어 제 접시로 옮기는 재하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번 한번 뿐이야. 키가 크려면 골고루 먹어야하거든.”

“네!”

모두가 한패다. 어찌나 손발이 척척 들어맞는지 혀를 내두를 지경이다.

재하와 눈이 마주친 은조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

다시, 권재하의 집이다.

이젠 근사한 외관을 보고 감탄할 여유도, 더 근사하고 운동장만한 집의 내부를 보고 놀랄 이유도 없었다.

호텔에 있던 은조의 짐은 어느새 옮겨져 있었다. 거실을 따뜻하게 물든 인 여러 개의 촛불은 방금 전까지 누군가가 있었다는 얘기다.

정말이지 일사불란하고 주도면밀한, 조직적인 움직임이 아닐 수 없다.


“누가 다녀갔나 봐.”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제니스가 보낸 사람들이 다녀갔어. 아, 냉장고는 좀 채워야 했을 것 같아. 물 받아 줄게 다온이랑 따듯한 욕조에 몸 좀 담글래? 피곤하지?”

“……응, 고마워.”

욕실까지 완벽하게 셋팅이 되어있었다. 은조와 다온이를 위한 보송한 가운과 새 칫솔까지.

제니스가 얼마나 신경을 쓰는지 잘 알고 감사하지만 현재 그녀의 상태를 생각하면 안타까운 마음이다.
 


[내가 무슨 말로 표현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제니스가 신약으로 치료를 받겠다고 결정한 건 순전히 은조 덕분이에요. 그녀는 재하의 행복과 새로 태어날 아기에 대해 기대가 커요. 더 살고자 하는 충분한 동기죠. 정말 고마워요.]

 
살며시 다가와 그 말을 건네던 카일의 눈가는 붉게 물들어 있었다.


“내가 딱히 잘한 건 없지만…… 다행이지 뭐야.”

“……웅?”

“아니야, 눈 감아 강아지.”

따듯한 목욕을 마친 다온이는 침대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눈이 반쯤 감겼다. 더구나 릴리까지 끼고 누워서는 행복에 겨워했다.

.
.

몇 시지- 깜박 잠이 들었다 눈을 뜬 은조는 물이 마시고 싶었다.

재하는 욕실에 들어가기 전에 본 게 마지막인데. 자고 있겠지. 은조는 살며시 침대를 빠져나왔다.


“…….”

각종 과일과 음료들이 냉장고에 가득 채워져 있었다. 작은 생수병을 하나 집은 은조는 냉장고를 등지자마자 악- 짧은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이런, 미안해. 놀랠 생각은 없었어. 인기척이 나길래.”

거실 끝에 보인 기다란 인영은 재하였다.


“아, 놀래라. 안 자고 뭐해? 잠이, 안 와?”

“……응. 오늘은 꿀잠을 잘 줄 알았는데, 갑자기 그렇게는 안 되네. 책 보고 있었어.”

“내가 여기에 있는 게 꿀잠을 잘 이유야?”

“음. 너랑, 다온이랑 아기까지…… 내 집에 전부 있잖아. 아아, 그래서 내가 잠이 안 왔구나…….”

설레서…… 들릴 듯 말 듯 , 재하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잠을 못 자니까 얼굴이 그 모양이지.”

“믿어지지가 않아…… 네가, 어떻게 여기에 있지? 윤은조가 어떻게 여기에 있느냐고? 이거…… 꿈일까 봐 무서워…….”

핼쑥한 재하의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 촉촉해진 검은 눈동자가 은조에게 머물렀다.


“꿈 아냐. 나 여기 네 어마무시하게 큰. 집에 있는 거 맞아.”

따각- 은조가 소리 나게 물병 뚜껑을 비틀었고 순간 다가온 재하가 확인하려는 듯 은조의 뺨에 조심스럽게 손끝을 댔다.


“내가 뭐든 할 거야. 네 상처를 우리의 아픈 기억들을 지울 수 있게 무슨 짓이라도 할 거야.”

그러니까, 나…… 버리지 마.

버리다. 부모에게 버림받은 둘에게 얼마나 아픈 말인가. 천천히 팔을 뻗은 은조는 재하의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부드럽게 밀어냈다.


“너는 나를 버린 적 있어? 나는, 너를 버린 적 없는 거 같아. 눈을 가려도 귀를 막아도 소용없어서, 차라리 세상에서 사라져버리길 바랄 정도로 증오했대도, 그건…… 버리지 못해서 그런 거였어. 이제 확실히 알았어. 너를 그렇게 보내놓고…… 잘 있는지, 잠은 자는지 술은 또 얼마나 마시는지 애가 탔어.”

“…….”

“……보고 싶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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