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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약혼 정도? (90/100)


90. 약혼 정도?
2023.04.10.



 


“…….”

은조를 끌어안은 재하는 한동안 아무런 말이 없었다.

계속 확인하고 또 해도 믿을 수 없는 사실, 윤은조가 왔다는 것.

바보같이 여전히 꿈은 아닐까, 잠에서 깨어나면 늘 그랬듯 쓸쓸하게 어둡고 넓은 집에 혼자 덩그러니 남겨진 그런 꿈은 아닐까 두려웠다.

긴 머리카락에 묻어있는 향기는 분명 제 비누에서 나는 그것이고 얇은 천을 사이에 두고 느껴지는 체온은 따듯했다.


“……그만해.”

품 안에 있던 은조가 바르작거리며 재하를 밀어냈다.


“……왜?”

“왜라니? 자꾸 나를 더듬고 있잖아! 어쩌자는 거야? 나는 못해!”

“……바보, 그거 아냐.”

재하의 손이 발그레하게 달아오른 은조의 뺨을 감쌌다.


“네가 부럽다. 나에 대해, 우리에 대해 정리가 되는 네가 부러워, 난.”

“……?”

“차라리 세상에서 사라져버리길 바랄 정도로 증오했다는 거…… 아픈 데는 없는지, 밥은 꼭 챙겨 먹는지 누굴 만나고 얼마나 행복한지 궁금한 거…… 나는, 내 감정들은 그 정도로 정리가 안됐어.”

“…….”

“겉으로는 멀쩡해 보였겠지만 내내 엉망으로 흐트러져 있었던 게 나야. 의문과 증오, 부정과 수용…… 그 밖에 어떤 이름도 가져다 붙이지 못하는 복잡하고 설명이 안 되는 감정들.”

“…….”

“아무것도 모르고 서울까지 널 찾아가서는 내가 한 짓들을 봐. 나는 아직도…… 내가 괴물 같아.”

“그렇게 생각할 필요 없어.”

빛과 모양, 크기가 좀 다를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한 그건…….

서로를 끌어안기도 밀어내기도 하며 그렇게 흘려보낸 오랜 시간. 단한 번도 입 밖으로 내본 적 없는 ‘사랑’이라는 단어.

다온이이게는 밥 먹듯 쉽게 당연하게 나오는 그 말이 왜 너에게는 이렇게 어려울까.


“괴물이 하는 사랑은 그저 그렇게 보통의 쉬운 사랑, 그런 게 아냐. 아직은 나도 설명할 수 없어.”

스치듯 그 단어를 입에 담은 재하가 다 안다는 듯 은조의 코끝을 톡 건드렸다.


“그래서 말인데, 같이 자면 안 될까? 침대도 넓잖아.”

“권재하! 내가 여기에 있다고, 아기가 생겼다고 우리가 당장 손을 잡고 하하 호호한다면 그게 이상한 거 아냐? 알겠지만 난 그럴만한 성격도 아니고, 너무 어색해. 시간이 필요하다고! 지금 우리 관계는 아무것도 아니야! 낫띵!!”

“오- 뒤끝 작렬 윤은조. 별다른 뜻이 있는 게 아니야, 그저 잠이 안 오니까…….”

“권재하! 정말 반성이 짧아! 뻔뻔해!!”

권재하, 권재하- 그녀가 자꾸 불러주는 게 너무 좋다. 재하의 입이 귀에 걸렸다.


“욕먹는 김에…….”

멀어졌던 은조를 다시 끌어당기려던 재하가 멈칫했다. 그녀가 임신했다는 사실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조심스럽게 몸을 밀착시킨 재하는 은조의 목덜미에 코를 묻었다.


“음…… 아마 네가 며칠만 늦었어도 내가 갔을 거야. 몰랐지?”

“……뭐??”

놀란 은조가 그의 가슴팍을 밀었다.


“아무리 밀어내도 난 어쩔 수 없어. 말했잖아, 괴물이 됐다고.”

“그렇게 쫓겨나고 얼마나 됐다고 서울로 올 생각을 했어?”

“최선우. 그 인간을 만나고 이틀 뒤에 정신을 차려보니 공항이더라고. 그렇게 보지 마! 그래, 난 미쳤어. 너한테 미친 괴물! 이제 컵케이크 가게까지 온 세상이 알게 됐으니 어쩔 수 없어. 네가 키워야지. 책임져, 줘.”

“맙소사. 억지 좀 부리지 마!”

“같이 살자. 다온이랑 셋이 응? 동거 말고 결혼…….”

“아직 아냐!!”

“……아직? 하긴 할 건데? 왜?”

“아기가 먼저야. 그게 뭐든 아기보다 우선일 수 없어.”

“그래, 너무 갑자기 꺼냈지? 정식으로 해야 할 이야기인데.”

흠- 옅은 한숨을 내쉰 재하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아니, 대단한 청혼 뭐 그런 거를 바라는 게 아니야. 지금은, 아직 아기에게만 집중하고 싶다는 말이라고. 나는…… 아기가 건강하게 세상에 나와야 안심이 될 것 같아.”

“응…… 이해해, 미안하고.”

“미안하다는 말은 이제 그만했으면 좋겠어. 그리고 결혼은 아니어도 아마…… 약혼 정도는……?”

“아마?? 단정할 수는 없으나, 어느 정도 짐작- 그럴 가능성이 있는 말 앞에서 ‘거의’나 ‘대개’의 뜻으로 쓰이는- 그, 아마? 아마, 약혼 정도?”

“……응. 싫음 관둬.”

금세 시무룩해진 재하가 한숨을 내쉬었다. 당장 그녀를 온전히 소유하지 못한다는 게 불안하고 영 마음에 들지 않지만 다른 방도도 없다.


“받아들일게, 그 아마 약혼.”

고마워- 재하가 은조의 이마에 입술을 눌렀다.

어둠 속에서 비밀스러운 약혼이 이루어진 느낌이 들었다. 식었던 은조의 뺨이 다시 붉게 물들였다.


“그런 뜻으로, 혹은 기념으로 같이 자면 안 될까?”

“와! 집착 작렬! 하…… 알겠어. 하지만 미리 경고하는데 불편할 거야. 다온이는 얌전하게 자는 스타일은 아니거든. 게다가 릴리까지 침대에 있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손목을 잡힌 은조는 이내 침대 앞에 서있었다.


“쉬-.”

그는 아무렇지 않게 강아지를 침대 밖으로 내려놓고 은조를 다온이 옆에 눕게 도와주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아이를 사이에 두고 서로를 바라보고 누웠다.


“……너와 아기, 다온이를 보호하는데 최선을 다 할 거야, 약속해.”

잠든 다온이의 머리카락을 쓸어주는 재하가 속삭였다.


“……보호? 어떻게? 돈으로?”

은근한 핀잔을 준 은조는 옅게 웃었다. 이렇게 이야기를 주고받다 보면 그는 쉽게 잠이 들곤 했다.


“물론이야. 전 재산을 쓰라면 그렇게 할 수도 있어.”

“네 전 재산이 들 만한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아. 최선의 노력이라- 글쎄, 나는 그냥 자연스럽게 하고 싶어. 뭐든지.”

“나는 뭐든지, 다, 최고로 해주고 싶어. 아무도 누려보지 못한 최고를 너랑 아기, 다온이에게 전부 해주고 싶다고. 이제까지 허비한 시간을 만회해야지!”

천장을 보고 누워 있던 은조가 몸을 옆으로 틀었다. 반쯤 감겨 있던 눈이 동그래지며 호기심으로 빤짝거렸다.


“대체 우리 다온이를 어떻게 구워삶은 거야? 내가 모르는 게 뭐냐고?”

“어…… 대, 화? 동구리는 얼집이 끝나고 집에 오면 너 퇴근 전까지 나랑 시간을 좀 보냈을 뿐이야.”

“뭐어?? 그 술병만 가득한 집에 아이를 끌어들였던 거야?”

“아냐! 아이가 있을 때 술병은 없었어! 난 멀쩡한 정신이었고. 아마…… 대충?”

“둘이 대화를 하면 대체 무슨? 말도 안 돼.”

솔직히 말하라는 듯 은조가 눈살을 찌푸렸다.


“실은 내가 도움을 좀, 받았지…… 동구리가 좋아하는 간식들을 이것저것 시켜주다 보면 나도 다만 얼마라도 먹는 시늉을 했었거든. 동구리 덕분에 내가 살았나?”

픽, 웃은 재하의 품으로 다온이가 파고들었다.


“봤지? 녀석은 잠결에도 내 편이야.”

“흥. 그럼 민아도 공범이었네. 그런 얘기 전혀 들은 적이 없어.”

“처제도 같이 먹은 적 많아.”

“누구 마음대로 처제야.”

“그렇게 부르라고 했는데…… 좀 미룰까? 나한테 밥도 차려준걸. 상냥함이 넘치는 처제에게 그리니치의 집은 작은 성의에 불과해! 아주 작아! 요 손바닥만 하다고!”

재하가 손바닥을 보여준다.


“그 손이 작아? 크잖아!”

“……좀 크지. 그런데 손, 만?”

“악! 권재하!!”

“너, 무슨 음흉한 생각을 한 거야? 집을 얘기한 건데? 여기 크잖아. 아이를 여럿 키울 수 있어.”

“……여럿? 누가 그래 여럿 낳는다고? 듣기 싫어, 난 그만 잘래.”

능글거리는 미소를 흘리는 재하를 바라보던 은조는 휙 등을 돌려버렸다.


“잘 자.”

이불을 끌어올려준 재하는 이후로도 한동안 믿어지지 않아, 도저히 믿을 수 없어, 등등 비슷한 소리를 중얼거리더니 어느 순간 고른 숨소리를 냈다.

그 숨소리에 마음이 편안해진 은조는 스스로가 이해가 안 됐다.


“…….”

이상할 정도로 고요한 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짙푸른 어둠 속에 편안한 숨소리만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도시 전제가 잠들었나 봐. 아니, 세상이 전부 잠들었나…….


 

.
.



“…….”

눈꺼풀을 들어 올렸을 때 은조가 들은 것은 낮은 속삭임이었다.

꿈을 꾸나- 생각하며 젖혀진 커튼 사이로 보이는 새벽을 응시하는데…… 둥둥, 공중을 떠다니는 회색의 작은 그림자들이 보였다.

아, 눈이구나. 눈이 내리네…….

신기하리만큼 깊고 단 잠을 잤다.

상체를 일으킨 은조는 한 뼘 정도 열려 있는 방문으로 들어오는 밝은 빛을 발견했다. 그리고 목소리.

누구지? 아직 깊게 잠이 든 다온이를 확인한 그녀는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가운을 걸쳤다.

까치발을 들고 움직여 방문 앞에 이르자 목소리가 더욱 잘 들렸다. 재하가 누군가와 대화를- 아니, 말다툼을……?!

거실을 지나 소리가 들리는 주방까지 한 걸음에 다다른 운조의 눈에 들어온 사람은.


“강- 비서님??”

“엇! 은- 아니, 형수-님!! 안녕하세요!”

“에디, 미리 그렇게 부르지 마. 은조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파자마 차림의 재하가 팔짱을 낀 채 강 비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죄송해요, 주무시는 걸 깨워서. 아니지. 형 때문이지! 혼자 흥분해서 목소리를 키웠으니까. 그래도 걱정이 돼서 달려온 사람한테 면박이나 주고 말이야.”

주방 식탁에 앉아 뜨거운 차를 마시는 에디의 허리가 꾸부정하다. 정말 이전에 본적 없는 초췌하고 피곤한 얼굴이었다.


“서울에서 오신 거예요? 피곤해 보이세요. 뭐 드실 걸 좀 찾아볼까요? 아니면…….”

“그래, 수프나 한 그릇 먹고 잠을 좀 자. 우리는 볼일 좀 볼 테니.”

“……우리, 볼일이라니?”

“은조야, 눈이 와. 첫눈이야.”

은조를 향해 달콤한 목소리를 낸 재하는 이내 시선을 돌리더니 다시 으르렁 거렸다.


“이 자식이 분위기를 다 망쳤지만 말이야.”

“어차피 다온이를 봐줄 사람이 필요했잖아요. 차만 마시고 씻고 잠깐 눈 붙이겠습니다. 걱정 마시고 계획한 일 보십시오. 행운을 빕니다, 형님.”

이번에는 에디가 얄밉게 빈정거렸지만 웬일인지 재하가 입을 열지 않았다.


“어딜 간다는 거야? 계획한 일이라니? 눈이 오는 새벽에?”

천천히 다가온 재하가 은조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매만져주었다.


“눈은 내리지만 아주 춥지는 않아. 그래도 내 코트 중에 제일 따듯한 거 꺼내줄게 입어.”

“어디 가는데?”

“강. 눈 내리는 허드슨강 보러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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