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 손잡아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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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손잡아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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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손잡아 줘
2023.04.13.
“……이게 뭐야? 웃겨.”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본 은조는 입술을 터트려 웃어버렸다.
재하가 건넨 스웨터를 입었을 때까지만 해도 뭐 그런대로 봐 줄 만했던 거 같은데. 코트는 너무 크고 길이도 너무 길다.
“가볍고 따듯하긴 한데 너무 크고 이상하잖아.”
“그래서 선택한 거야, 가볍고 따뜻하고 너한테 이불 같아서.”
은조의 말을 귓등으로 듣는 재하는 서랍에서 꺼낸 니트 모자까지 푹 씌웠다.
“……집 근처라며 꼭 이래야 해? 나 이상한 사람처럼 보이겠어!”
“뉴욕에서 이 정도 근본 없는 패션은 누구의 시선도 끌지 못해. 양말을 두 개 신을래? 아, 여기 좀 두꺼운 게 있다! 이거 신어.”
“…….”
입을 꾹 다문 은조는 그가 내민 양말을 받지 않았다. 꼭 아빠의 말을 듣기 싫어하는 십 대 딸 같은 얼굴이다.
“너 전혀 이상하게 보이지 않아! 오히려 패피같아! 되게 귀엽다고, 안 그래도 작은 얼굴이 곧 사라질 것 같이 보여!”
“패피? 아무거나 가져다 붙이지 마! 이런 모습이면 차라리 얼굴이 사라지는 게 낫겠어! 자동차에 히터도 빵빵하게 켤 거면서 꼭 이렇게 입어야 해? 답답해!”
은조는 머리를 전부 덥고 눈까지 가리기 직전인 모자를 벗어버렸다.
하지만 머플러까지 꺼내 든 재하는 사뭇 진지한 목소리를 냈다.
“좋은 말로 할 때 다시 써. 얼른 양말도 신고…….”
“그것까지 하라고? 그냥 나가지 말자. 첫눈이고 강이고 다 별로야! 우리가 이제 막 사귀기로 한 십 대 커플도 아닌데…….”
“막 사귀기 시작한 십 대는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는 음…….”
무언가를 찾아내려는 듯 골똘한 표정이 된 재하가 머플러를 잡은 손을 내려뜨렸다.
“우리는 그냥, 눈이 맞자마자 바로 같이 살았지.”
“…….”
대수롭지 않게 던진 말에 입을 한일자로 다문 재하가 눈꼬리까지 내려뜨렸다.
“알았어! 그런 표정 짓지 마, 쓸게 모자 쓰고 양말도 신고, 그것도 감을게 줘. 됐지?”
“……정말?”
“응. 눈 오는 새벽에 허드슨강 산책이 싫은 건 아냐, 오히려…… 낭만적이지.”
“낭만적? 아, 그래…….”
은조는 아까 에디가 한 말- 행운을 빈다는 말의 뜻을 모르는 거다. 알 리가 없지. 최악의 경우 귀싸대기를 얻어맞는대도 할 말이 없는 권재하다.
“너 추우면 안 되잖아. 감기라도 들면 내 마음이 얼마나 불편하겠어. 아, 아기가…….”
아기-라는 단어는 대체 언제까지 어색해 할 건지. 은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 그래, 고마워어-”
다온이에게 하듯 상냥한 목소리를 낸 그녀는 꾸역꾸역 두꺼운 양말에 발을 집어넣고 머플러도 칭칭 감았다.
하지만 그는 겨우 청바지에 터틀넥, 두껍지도 않은 재킷이 전부다. 은조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건 얇아도 되게 따듯하거든, 갈까?”
“그래, 네가 아기를 가진 것도 아니니까. 맞지?”
.
.
이제 막 사귀기로 한 십 대 커플처럼 아옹다옹하더니.
건물의 1층 정문을 나서자마자 은조는 소녀처럼 탄성을 질렀다.
“……와, 예쁘게도 온다! 그렇지?”
“응, 보기 좋다.”
바람이 없는 파란 새벽은 점잖은 신사 같았다. 하얗고 아름다운 눈송이들이 느리게 춤을 추도록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잠시 이국(異國)에서 만난 첫눈을 바라보던 은조는 재하가 잡고 있던 손에 은근한 힘을 주는 바람에 정신을 차렸다.
“……?”
“……보기 좋아.”
은근하고 근사한 미소를 만든 재하는 잡고 있던 손을 놓더니 그녀의 양손을 코트 주머니에 넣어주었다.
“……?”
“잠깐만.”
맨손으로 자동차 앞 유리를 소복하게 덮은 눈을 슥슥 빠르게도 밀어낸 그가 이내 조수석의 문을 열었다.
“걸어가도 금방이면 그냥 걸을까?”
“차를 타면 더 금방이야.”
강까지 첫눈 오는 거리를 그의 크고 따듯한 손을 잡거나- 혹은 팔짱을 끼고 걸으면 정말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던 은조는 속으로 헛웃음을 웃었다.
막 사귀기 시작한 십대가 맞다. 특히 윤은조.
“히터는 사절이야. 숨 막혀.”
답답한 머플러를 느슨하게 잡아당긴 순간 그가 손을 내밀었다.
저도 모르게 빙긋 웃어버린 은조는 큰 손 위에 제 손을 착, 올렸다.
“눈 치웠는데도 따듯하지? 신기하지?”
재하가 은조의 손에 입술을 눌렀다.
“……응. 따듯해.”
열이 훅 올라왔다. 따듯한 게 아니라 좀 있으면 땀을 흘릴지도 모르겠다. 뺨이 발그레하게 물들었다.
“눈은 왼쪽 손으로 치웠잖아, 큽.”
놀리며 재미있어하는 재하에게 은조가 눈을 치켜떴다. 잡힌 손을 빼려 했지만 어림없었다.
세단은 공중을 떠다니는 눈처럼 천천히 느리게 움직였다.
.
.
차에서 내린 두 사람은 손을 잡고 걸었다.
“저기 저 건물이 미술관인데 돌면 바로 강이 보여.”
“응.”
아직 문을 열지 않은 숍들과 전시의 내용을 알리는 미술관의 배너들을 지나쳤다.
은조는 손을 꼭 잡은 재하의 표정을 살폈다. 차가 움직이기 시작하고 부쩍 어두워진 것 같은 느낌은 착각인가.
“이거 그냥 산책 아니지?”
보일 듯 말 듯 엷게 웃어 보인 그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은조는 주머니 속에 들어있는 손을 꼼지락거렸다.
누구의 시선도 신경 쓰지 않고 이렇게 다정하게 손잡고 걸었던 적이 없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동시에 설레고 행복하다고 생각한 순간 차가운 바람이 느껴졌다.
“……와.”
넓게 탁 트인 시야에 은조가 탄성을 터트렸다. 모든 것이 무채색이다. 은회색의 도시를 가로지르는 강물은 아주 느리게 흐르고 있었다.
그 위로 부드럽게 흩날리는 하얀 눈송이를 바라보던 은조는 후- 하얀 입김을 날려 보냈다.
맞은편으로 보이는 곳이 뉴저지라고 재하가 말해주었다.
“여기는 관광객들이 모르는 곳이라 조용해.”
“새벽이라 조용한 게 아니고?”
“그럴 수도 있고. 춥지 않아? 강바람이라 좀 차.”
재하가 은조의 머플러를 만져주었다.
“괜찮아, 춥지 않아. 오히려 상쾌한걸. 그래도 혹시 추워지면 얘기할게.”
“……그래.”
은조는 내내 제게만 머물러있는 재하의 눈을 알고 있었다. 그 안에서 검은 강물처럼 일렁이는 불안도 읽었다.
“…….”
“너를 버린 적 있냐고 물었지. 나, 혼자 여기 여러 번 왔었어. 잠이 안 오는 새벽에, 너를…… 버리려고 애쓴 적 많아. 네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 얼마나 아픈지 알지도 못하고 말이야”
“…….”
“어리석지만 이거라도 집어던지면 위로가 될 것 같았는데…….”
그가 재킷 안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꼭 쥐고 있던 손이 펴지자 은조의 눈이 휘둥그렇게 변했다.
“……이건. 이게 어떻게…….”
반지였다. 한강이 삼켜버린 그 반지.
“……이게 진짜야.”
“…….”
그날, 산산이 조각났던 심장과 차갑던 남자의 눈을 떠올린 은조는 눈을 꾹 감았다.
“미안해, 너와 연관된 어떤 것도 버리지 못한 주제에 끝까지 자존심만 내세워서 널 더 아프게 했던 거.”
“내가 그건 진짜가 아니라고 했잖아. 이게 왜 두 개야? 대체 어떻게 된 건지 당장 말해 줘.”
가엾고 안타까운 기억들이, 입에 담기 힘든 쓰린 단어들이 은조 주위에 차곡차곡 쌓였다.
그런데- 이상하리만큼 고통스럽지 않았다.
잠깐 더러운 것을 본 것처럼 기분이 나쁘긴 했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여기 오기 잘했다."
"……."
"차가운 바람 때문인지 덜 열받는 것 같아."
후- 뜨거운 숨을 날려보낸 은조는 가슴속 가득 차가운 공기를 채웠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정말 마법 같은 선물을 받지 않았는가. 지나간 고통이나 서러움은 더 이상 가지고 있을 가치가 없다.
물론 문득문득 생각도 나고 화도 치밀어 오르겠지. 나도 사람인데.
"……이거, 네가 던져버릴래?"
멋쩍은 표정으로 은조에게 반지를 내미는 재하의 코끝이 발갛다.
"던져버리라니? 누구처럼 소심하고 비싼 복수라도 하라는 거야?"
"응, 그래서 네 마음이 조금이라도 후련해진다면. 나는 당장이라도 던져버리고 싶어. 무섭고 끔찍해 이 작은 게."
그 마음 알지. 무섭고 끔찍한 거. 픽 웃은 은조는 재하의 손바닥 위에 있던 반지를 집었다.
"진짜 던진다?"
응-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비싸고, 무섭고, 끔찍한 반지야!"
은조는 재하가 그랬던 것처럼 한쪽 팔을 크게 뒤로 제쳤다.
"나쁜 기억들 모두 가지고 사라져 버려! 얏!!"
휙- 팔을 휘둘렀다.
잔잔히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는 재하의 눈이 가늘게 좁아졌다.
"……?"
"……바보."
은조는 쥐고 있던 손을 펴 아직 거기에 있는 반지를 보여주었다.
"이런 유치한 짓이 또 하고 싶어서 여길 온 거였어? 던질 걸로 쳐. 없어진 걸로 생각하라고."
"……왜? 그건 돌멩이만큼도 가치가 없어."
"왜 가치가 없어? 나한테 줬으니까 내가 마음대로 할게."
"그 흉한 걸로 뭐 하게?"
"이 흉한 고가의 반지를 팔아서 흥청망청 쇼핑이나 하려고."
"겨우 그까짓 걸로? 너 아직 제니스가 너랑 우리- 아, 아기 앞으로 해놓은 재산이 얼만지 이해가 안가?"
"아, 맞다! 나 이제 부자잖아. 그래도 이건 내 거야."
좋은 일에 쓸데가 얼마나 많은데 한강도 부족해 허드슨강에 던지라고? 못 말려.
시간이 필요하겠지. 우리 둘 다 지나간 아픔을 아무렇지 않게 농담처럼 말하는 날이 분명 올 거야. 이제 지나간 과거 따위에 마음을 쓰고 싶지 않아. 그럴 시간도 없어.
"어! 해가 뜨려나 봐!"
어느새 눈이 잦아든 도시는 회색을 버리고 엷은 오렌지색과 핑크색을 버무리고 있었다.
"……."
재하의 눈가도 불그스름하다.
"이러다 또 울 거야? 그러지 마. 그냥 손이나 잡아 줘."
말갛게 미소 짓는 은조가 손을 내밀었다.
"……아까 손잡고 걷는데 나 행복했어."
기다렸다는 듯 은조의 손을 잡아 입술을 누르는 재하의 눈가가 촉촉하다.
제 심정을 전할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심장이 터질 것 같은 지금을 표현하는데 행복이라는 두 글자는 너무 짧았다.
“……오랜 시간 동안 길을 잃고 헤맨 기분이야.”
“나도 그래.”
“이렇게…… 그저 네 손을 꼭 잡은 것만으로도 이렇게…… 가슴이 벅찬 걸 너무 늦게 알았어.”
“아니, 늦지 않았어.”
은조는 재하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 이제, 내가 네 손 절대 놓지 않을 거야.”
회색 구름이 걷힌 새벽하늘이 아름답게 물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