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필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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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필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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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필립
2023.04.17.
느긋하고 여유로운 시간이 흘러갔다.
눈에 띄게 배가 커지는 게 유일하게 놀랄 일이었다.
“다온이가 낮잠을 길게 자네. 피곤한가 봐.”
햇살이 가득한 거실, 푹신한 소파에 앉아 향긋한 차를 음미하던 은조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게, 깨울까?”
태블릿을 내려놓은 재하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냐. 조금만 더 자게 둬. 아침부터 너무 시달렸어.”
시달려? 다시 자리에 앉은 재하가 눈썹 끝을 치켜세운다. 이해를 못하는 거다.
“선생님들이 몇이나 다녀갔는지 몰라서 그래? 본인이 고용한 사람들인데? 아무래도 너무 심한 것 같아.”
“무슨! 녀석이 얼마나 똑똑한지 너도 알잖아.”
“똑똑한 만큼 예민해. 스트레스도 잘 받는다고. 그냥 피아노나…….”
“그냥, 피아노나? 너무하네.”
“너무해? 내가?”
하- 어이없네. 은조가 눈동자를 굴렸다.
“나는 보호자로서 아이에게 최고의 교육을 제공할 의무와 책임이 있어. 참, 은조야 내가 말했나? 그제 밤에는 잠들기 전에 나를 ‘대디’라고 불었어! 귿나잇 대디- 분명히 들었다고.”
“응, 둘이 죽이 잘 맞아서 참 좋겠어.”
“참, 동구리 수영은 할 줄 알아? 생존수영은 필순데. 그건 따로 누굴 고용할 필요도 없어. 옆에 자신을 지켜줄 아빠가 있다는 걸 알면 금세 배우거든. 나도 그랬어, 경험담이야. 물론 기초단계부터 바르고 멋진 자세를 배워야하는데- 그 정도는 내가 충분히…….”
“아아-.”
“왜? 배 아파? 얼마나?”
금세 사색이 된 재하를 바라보는 은조는 소파 위에 몸을 뉘었다.
“괜찮아. 근데 좀 출출한 거 같아. 체리 남았어?”
말이 끝나기도 전에 휭하니 사라지는 재하의 등이 보였다.
언제든 입씨름이 귀찮아지면 그녀는 그저 아아- 신음소리를 내며 배에 손을 가져가면 게임 오버다.
임신 18주가 넘어가면서 배가 급격하게 커지고 있는 상태라 간혹 오는 통증은 지극히 정상적인 것이다.
하지만 ‘아’ 비슷한 소리만 내도 재하는 긴장하며 온몸을 굳혔다. 하품도 마음대로 못한다.
게다가 은조의 긴 입덧이 그를 더욱 안절부절못하게 만들었다.
이제껏 집에서 글을 쓰며 많은 시간을 보낸 그는 은조가 하루 세끼 무엇을 얼마나 먹는지 일일이 체크했다.
“……있잖아.”
“응, 말해.”
은조가 뱉어낸 작은 씨를 손으로 받은 재하가 빨간 체리알 하나를 다시 입에 넣어 준다.
새콤하고 달콤한 과육을 잘 발라먹은 은조가 다시 재하의 손바닥에 씨를 뱉었다.
“회사는 정말 안 나가봐도 괜찮아? 자리를 너무 오래 비우는 거 같아서.”
“전혀. 네가 걱정할 문제가 아냐. 지난주에도 말한 거 같은데 내가 아니어도 엄청난 두뇌들이…… 잠깐만, 윤은조 너 설마?”
“……?”
뭐? 은조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큰 눈을 껌벅거렸다.
맞아요, 권재하 씨. 제발 내 꽁무니만 따라다니는 거 그만했으면 좋겠어요. 아직 결혼도 전인데 24시간 붙어 있고 내내 날 감시하느라 눈에 불을 켜잖아요. 피곤해, 나.
“아- 해.”
은조의 입에 체리를 넣어주는 재하의 표정이 시무룩하다. 척하면 척이지. 귀찮다 이건데- 그래도 양보할 수 없었다.
평생 착 달라붙어있을 예정이고 이제 겨우 시작했으니까.
“저녁에는 단백질을 좀 먹어. 어제도 과일만 먹었어. 어떤 걸로 준비하라고 할까? 한식? 양식?”
아- 또 배가 아픈 척을 하려던 은조는 문득 그를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니, 져줘야 한다!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조심스럽게 원초적 욕망을 드러낸 은조는 질 나쁜 약혼녀로 군림했다.
낮에도 이겨먹고 밤에도 이겨먹는 그런-.
그 모든 걸 가르친 장본인 권재하가 자꾸 아기가- 아기가- 소리를 하며 수도자처럼 구는 바람에 어쩔 수 없었다.
“음- 스테이크가 좋겠어.”
“그래? 다른 거는?”
금세 환하게 웃는 재하에게 은조는 예쁘게 마주 웃어주었다.
“그거면 충분해. 고마워, 자기야.”
***
민아의 결혼식은 예정대로 뉴욕시청에서 이루어졌다.
다만 예상과 다르게 조금 시끄러웠는데 세 명의 알렉시스가 그 이유였다.
카메라 셔터가 터지고 질문을 쏟아졌지만 민아는 상황을 아주 즐겁게 받아들였다.
근사한 피로연 장소를 마련해 준 제니스에게 불만 따위가 생길 이유가 없었다.
.
.
[모닝 라이브러리]
피로연이 열린 레스토랑은 1년 내내 장미가 가득한 유리정원으로 뉴욕의 명소였다.
수직으로 높게 뻗어있는 유리면으로 햇볕을 최대로 받아들인 실내는 봄 같았다. 포근한 공기 안에 싱그러운 장미향이 가득했다.
홀 중앙에는 흰 테이블보가 덮인 큰 식탁이 있었는데 이미 꽃 장식과 샴페인, 기본 식기류들이 가지런하게 놓여있다.
막 식을 마친 신혼부부와 얼마 안 되는 손님들이 이용하기에 필요 이상으로 넓었다.
어른들은 요리를 맡은 담당자와 인사를 나누는 중이다. 실은 기자들을 피해오느라 예상보다 일찍 왔다. 요리가 준비되려면 시간이 좀 더 필요할 것이다.
주인공들은 친구들과 사진을 남기느라 정신없었다.
“덥지 않아? 온도를 좀 낮추라고 할까?”
“아냐, 괜찮아. 딱 좋아.”
차가운 물 잔을 건네는 재하의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다.
“다온이는?”
저기- 재하가 가리킨 곳에 릴리와 함께 있는 다온이가 보였다. 뭘 하는 거지?
“나비라도 봤나 봐.”
“나비? 설마…….”
“꽃이 있는데 왜 나비가 없겠어. 네가 있어서 내가 있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거지.”
픽 웃은 은조는 더 붉어진 재하의 뺨으로 손을 가져갔다.
“이상하네. 컨디션 안 좋아?”
“그럴 리가. 실은 줄게 있는데…… 우리도 나비가 있나 좀 볼까?”
그가 은조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
.
재하가 건넨 서류봉투는 묵직했다.
“이게 뭐야?”
“열어봐.”
안에 든 물건을 꺼내는 은조는 근처에 있는 다온이의 웃음소리를 들었다. 정말 나비라도 봤나.
“……이건.”
책이다!
“초판 인쇄본이냐.”
“이렇게 빨리?”
“응, 빨리 보여주고 싶었거든.”
“대단해! 그런데 제목이…… 20020620?”
“맞아, 그날. 네가 나에게 손짓하며 웃어 보인 그날.”
“하지만 부자가 되는 법에 대해 쓴다고…….”
이해가 안가는 책 제목에 은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뻔한 건 질색이야. 노골적인 표현은 식상하고. 이건- 성공의 메커니즘에 대한 얘긴데, 어떤 행위를 성취시키는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 심리 과정을 의미해.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동기는 아주 중요한 부분이거든. 왜 부자가 되고 싶은지를 물으면 아마 대부분은 백가지도 넘게 이유를 댈 거야. 하지만 명확하고 강력한 한 가지 이유는…….”
“쉿- 자기야, 진정해 응? 일단 축하해, 너무 멋져.”
까치발을 든 은조가 재하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고마워,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제목에 관한 이야기는 책에 나와…… 일단 열어 봐.”
“제목 때문에 확 호기심이 생기긴 해.”
맑은 웃음소리를 낸 은조가 책을 열었다.
그건- 헌사(獻辭)였다.
너를 기다리는 계절은 내내 따듯하고 다정하구나.
매 순간을 설레게 만들어 준 우리의 기적, 고맙고 사랑한다.
-내 아들 필립에게 이 책을 바칩니다.
“……괜찮아?”
“괜찮은 정도가 아니야…….”
은조는 여전히 얼굴을 붉히고 있는 재하의 품을 파고들었다. 그의 마음을 알고 있고 충분히 이해했다.
아기는- 감사하고 신기하면서 동시에 어색하고 조심스럽다. 엄마가 된다는 사실에 미칠 것 같이 기쁘다가도 온갖 불안한 상상에 사로잡히기도 했었다.
재하도 그랬다. 오르락내리락 춤을 추는 자신의 감정에 몹시 난감해 한 그다.
“누구는 태어나기도 전에 이런 큰 선물을 받다니, 질투 나는 걸.”
“그래서…….”
품에서 은조를 떼어낸 재하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주먹을 쥔 채 은조의 눈동자를 들여다본다.
“윤은조, 너는 나에게 완벽한 동기이자 분명한 목적이고 결론이야. 그만 애태우고 빨리 결혼해 줘.”
그가 손을 폈고 나타난 것은 ‘예상대로’ 반지였다. 직사각의 투명한 보석이 눈 부실정도로 반짝거렸다.
“또?”
“응, 또. 지난번엔 반지만 챙기고 거절했잖아.”
“거절이 아니고 좀 미루자는 얘기잖아. 일단 줘 바. 예뻐 보이네.”
“빈티지야. 예쁘다! 잘 어울려.”
안달이 난 재하는 반지를 낀 은조의 손에 소리 나게 입을 맞추었다. 바라보는 눈빛은 간절하다.
“자기야, 내가 사랑한다고 수없이 말했지.”
“밤마다 점잖고 싶은 날 꼬이려고 하는 엉큼한 소리지. 의도가 불순한 그런 사탕발림은 나를 더 불안하게 만들 뿐이야.”
정곡을 찔린 은조가 얼굴을 붉혔다.
“사, 사탕발림이라니? 결혼은 아기가, 우리 필립이 태어나고…….”
“엄마…… 반짝이 이름이 필립이야?”
“……!”
릴리를 안고 있는 다온이가 바로 근처에 있었는데 미처 몰랐다!
“그럼 남자 아기야? 나는 채린이처럼 예쁜 여자 동생이면 좋겠는데…….”
이미 울먹거리는 아이를 은조가 재빨리 끌어안았다. 이제야 겨우 동생의 존재를 받아들이기 시작한 다온이는 현재 채린이가 몹시 보고 싶은 상태였다.
[대위님, 남자 아기면 이등병을 삼으면 됩니다!]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는 재하가 다온이의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렸다. 나름 적절한 대응이라고 생각했겠지만-
[필립은 남자 아기예요, 여자 아기예요? 정확하게 알려주세요!]
틀렸다.
으아앙- 아이가 울음을 터뜨린 순간, 툭- 툭- 작고 확실한 움직임을 느낀 은조의 눈이 커다래졌다.
“다온아, 아기가- 방금 아기가 움직였어! 엄마 배를 발로 찼어!”
“……정말?”
“정말이야??”
작은 손 두 개, 커다란 손 두 개가 동시에 은조의 배위에 올려졌다.
“쉬-.”
“…….”
“…….”
말간 눈을 깜박이는 다온이가 배에 귀를 가져다 댔다.
[이등병, 들리는가? 들리면 신호를 보내라, 오버.]
낮게 웃은 재하가 은조의 정수리에 입을 맞추었다.
“귀엽지? 요 며칠 군대 계급에 대해 공부했거든.”
두 남자에게 꽉 안긴 은조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이등병이 꽤 씩씩한 것 같아 다행이긴 한데- 전부 합해 셋이라니- 앞날이 좀.
걱정 아닌 걱정이 스민 그때, 팔랑팔랑- 주위를 맴도는 노란 나비를 발견했다.
“……정말 나비가 있었네.”
가볍고 힘찬 날갯짓 아래로 손을 흔드는 민아도 보였다.
은조는 깨달았다.
지금 모든 행복과 축복이 온전히 그녀의 것이라는 사실을.
하지만 그것을 놓치지 않으려 불안해할 필요도, 너무 힘을 들여 세게 쥘 필요도 없다는 것을.
“다온아, 아무래도 릴리가 나비를 너무 괴롭히는 거 같아.”
응? 눈이 동그래진 아이는 바로 폴짝거리는 릴리에게로 뛰어갔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재하가 미소 지었다. 그런 그를 이번에는 은조가 꼭 껴안았다.
“오빠.”
“갑자기?”
싫지 않은지 그가 듣기 좋은 웃음소리를 냈다.
“결혼, 해도 괜찮을 것 같아.”
“……정말?”
“응, 정말. 하자는 대로 할게, 진짜야. 자기가 나처럼 아주아주 행복했으면 좋겠어.”
이제야 조금 힘을 빼는 법을 배우는 은조 앞에-
“그래, 근데 조건이 있어. 계속 오빠라고 불러줘야겠어.”
잠시 숨어있던 거래의 귀재, 냉혹한 전략가 카일 J. 알렉시스가 나타났다.
“알았어, 약속할게.”
“아니, 말로만 하는 계약은 내 사전엔 없어.”
“……그럼, 어쩌라고?”
너른 가슴팍에 기대있던 은조가 고개를 들었다.
“글쎄, 지금은 너무 환하니까- 밤에 구체적으로 논의해보자고.”
아…… 검고 깊은, 유혹적인 눈빛을 마주한 은조는 생각했다.
하룻밤 정도는, 져줘도 괜찮겠다고.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