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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1. 뉴욕 (1) (93/100)


외전 1. 뉴욕 (1)
2023.04.20.



 
‘필립’이라는 이름은 제니스의 아버지 이름이다.

아기의 이름에 대해 재하와 몇 차례 이야기를 나누기는 했지만 아직 정하지 못했다는 것을 안 제니스가 조심스럽게 그 이름을 제안했다.


[나는 종종 생각했어. 물론 남편 이름 카일도 멋지지만 사실 재하를 보면서 내 아버지를 자주 떠올렸거든. 여러 면에서 그 이름은 재하에게 퍽 어울릴 법한 이름이었단다. 나는 엄마를 빼닮았지만 내 오빠 킬리언을 보면 이해가 될 거야.]

그녀가 보여준 사진속의 남자는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를 가진 굉장한 미남이었다.

그 신비롭고 눈부신 사진 속 남자를 본 순간 은조의 마음은 이미 반쯤 기울었다고 봐도 무리는 아니다.


[세상에…….]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하는 은조를 본 재하가 마땅치 않다는 듯 눈매를 좁히며 한마디 했다.


[할머니, 그건 킬리언의 대학 시절 사진이잖아요.]

제니스가 호탕하게 웃었다. 재하의 질투어린 태도가 귀엽다는 듯.


[지금 은발이 된 킬리언의 모습이 네 미래의 모습이라고 생각해도 된단다, 카일.]

“그래, 자기는 좀 가만히 있어 봐. 정말 영화배우 같이 생기셨어.”

“생긴 건 영화 배우 같은지 모르겠지만 그는 피도 눈물도 없는 기업 사냥꾼이야. 우린 그를 약탈자라고 부르기도 해.”

“그런 남자가 세상에 또 있었다는 얘기야? 권재하 말고? 오. 마이. 갓.”

“윤은조. 아이의 이름은 중요해. 장난치지 마. 난 진지해.”

“나는 필립이라는 이름 마음에 들어. 왕자님 이름 같잖아!”

“너한테 왕자는 나 하나로 족해. 동구리는 아직 이르고.”

헐. 은조는 저를 짙게 바라보는 재하의 시선을 슬쩍 피했다. 때와 장소, 시간 좀 가려가면서 저런 눈을 했으면 덜 부끄럽겠는데.


[제니스, 나는 그 이름이 아주 마음에 들어요. 왕자님 이름 같다고 재하에게 말했어요.]

[제대로 봤구나! 우리 부모님의 조상은 실제로 프랑스 귀족의 혈통을 가지고 있단다. 자, 여기 내 아버지.]

필립 로이드- 제니스의 아버지 사진을 본 순간 은조는 정말 깜짝 놀랐다.

피부색은 다를지언정 그 외모는 마치 재하의 친부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였다.

특히 자신만만하면서도 신비스러운 검은 눈동자는 딱 권재하의 그것이었다.

제니스가 외모는 어머니의 것을 물려받았지만 아버지에게서 무엇을 물려받았을지도 한눈에 보였다.

그들을 묶어 준건 정말 운명, 전생의 인연 뭐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는 소설 같은 생각도 들었다.

아기가 꼬맹이 주제에 이런 눈빛을 한다면 정말 귀엽고 황당할 것 같다.

권재하는 아기였을 때 어떤 모습이었을까.

갑자기 태어나자마자 버려진 그가 측은하게 느껴진 은조는 다정한 눈길로 그를 응시했다.


“나도 마음에 들고 아기 이름에 당신 아버지 이름을 주면 제니스도 기뻐할 텐데. 자기는 별로야?”

아기의 이름도 마음에 들었지만 항암치료를 받고 있는 제니스가 기뻐하는 것도 은조에게는 큰 의미가 있었다. 이제 가족이니까.


“그럴 리가. 내가 별로인건 네가 누구든 다른 남자를 보고 눈을 반짝이는 거야. 솔직히 기분 되게 나빠. 바보같이 웃는 것도 싫고.”

흠- 헛기침을 한 재하는 뻔뻔한 얼굴로 우아하게 찻잔을 들어 올렸다.


“필립 권. 예쁜 거 같아. 한국에서도 그냥 써도 되지 않을까?”

“물론이야. 그런데 동구리에게는 언제까지 비밀로 할 거야? 언젠가는 알게 될 걸 왜 숨기지?”

이해 할 수 없다는 표정이 된 재하가 권필립, 필립 권- 작게 읊조렸다.


[아기 이름은 필립이에요! 너무 기쁘고 기분이 이상해요.]

은조는 두근거리는 가슴에 손을 올리고 아기 이름을 작게 불러보았다.

제니스는 소녀처럼 뺨을 붉히며 기뻐했고 아버지 필립이 얼마나 멋진 아빠였는지, 엄마를 얼마나 사랑했는지에 대해 이야기 했다.

아기가 그의 모든 좋은 점을 물려받기를 바라며 간절하게 기도하겠다는 말도 했다.

***

민아는 결혼식이 끝나고 따듯한 곳으로 짧은 신혼여행을 떠났다.

재하는 결혼식을 올리자는 은조가 마음을 바꿀까 봐 노심초사하며 시간이 흐르기만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둘의 결혼식은 재하의 책 출판 기념 파티 이후에 치러질 것이다.

세상 모두에게 알리려는 심산인지 재하가 어마어마한 계획을 세워 보여 줬지만 은조의 대답은 ‘이러면 못 한다’였다.

황당한 표정으로 어이없어하는 은조를 본 재하는 선녀와 나무꾼이라는 동화를 기억하냐며 ‘ 아홉 살 너를 재우기 위해 오빠가 읽어주었던 수많은 동화 중 하나’라고 강조했다.


[오빠는 네가 언제라도 도망갈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 나도 이러는 내가 이해가 안 되지만 불안해! 악몽도 자주 꾼다고 말했잖아!]

게다 은조보다 제 입으로 저를 ‘오빠’라고 자주 불러댔다.


[오빠는! 아무래도 출근을 하는 게 좋겠어! 책도 다 썼는데 왜 출근을 안 해? 왜 이렇게 찰거머리같이 붙어 있으려고 하냐고, 귀찮아 죽겠어.]

[귀, 찮다고? 오빠가? 어떻게 그런 말을…….]

몇 번이나 돌려서 말했지만 오빠님이 못 알아들으니 어쩔 수 없이 직설적으로 말했건만. 하늘이 무너지기라도 한 것 같은 망연자실한 표정이라니. 은조는 ‘오빠’가 알아채지 못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도 보채서 이미 법적으로는 부부가 됐잖아. 어떻게 그렇게 빨리 조취를 취했는지 나는 정말 놀랐어! 도망 같은 건 꿈도 못 꾸지, 지금 내 처지를 봐!]

선녀라니, 하늘하늘 날개옷을 입고 하늘로 올라갈 만한 몸 상태가 아니지 않은가! 은조의 눈이 뾰족하게 변했다.


[오빠가 널 보챘니? 네 ‘처지’라는 건 또 무슨 뜻이지? 아기가 아니면 도망이라도 가겠다는 소리로 들리는데 맞아?]

[아아--!]

[왜? 배 아파?? 어디가, 어느 정도로? 그러게 왜 흥분을 하고 그래. 이리 와, 서 있지 말고 좀 앉아 봐.]

[내내 누워 있거나 앉아 있었잖아. 나는 이렇게 노는 게 힘든데. 오. 빠. 는 아닌가 봐, 대단해.]

얄밉게 비아냥거려도 그는 빙긋 웃을 뿐이다.


[이리 와. 뭘 또 대단까지, 나에게는 필립과 너를 보고 있는 게 제일 가치 있고 행복한 일이야. 회사일은 비교 자체가 안 돼.]

[…….]

참 감동적인 말인데…… 왜 갑갑하지. 큰 눈을 껌벅거리는 은조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그가 행복하다는데 더 이상 찬물을 끼얹을 필요가 없었다. 아기가 태어나면 괜찮아지려나? 그래, 평생 저럴 건 아니니까. 당장 내일모래라도 지루해 할지 모를 일이지.

내가 참자.


[…….]

제법 둥그렇게 솟아오른 배에 손을 올린 은조는 그때까지만 해도 생각도 못했다.

제 인생에 아이가 둘일지 셋일지, 아니면 그 이상 일지.

***

이른 아침.

식사가 준비되기를 기다리는 세 사람은 한 침대에 누워 있었다.


“안녕, 채린아.”

“안녕.”

채린이와 영상 통화하는 다온이, 그 옆에서 언제라도 끼어들어 지도하려고 눈에 불을 켠 재하.

그런 둘을 바라보는 은조는 필립이 움직이지 않을까 촉각을 세우고 있었다.


 


“잘 지냈어, 채린아?”

“응, 너도 잘 지냈어?”

저만한 공주 인형을 안고 있는 채린이는 다온이만큼 마음이 애틋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화면을 보다가도 이내 시선을 돌리고 곁에 있는 공주 친구의 머리나 옷을 만지작거렸다.

채린이 엄마의 목소리도 간혹 들렸는데 분명 이쪽과 비슷한 상황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서울은 몇 시인지 물어 봐.

서두르라는 듯 재하가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채린아, 여기는 아침이야. 서울은 밤이지? 몇 시야?”

“음- 9시!”

또 단답형 대답이 돌아왔다.

다온이가 재하를 쳐다본다.


-릴리를 소개시켜 줘.

재하가 얼른 곁에 있던 릴리를 다온이에게 바짝 밀어 붙여 화면 안으로 등장 시켰다.


“채린아, 우리 강아지 릴리랑 인사 할래? 내가 전에 말했던 그…….”

“와!! 예쁘다! 정말이었네!”

작은 휴대폰 화면 안으로 동그랗고 하얀 얼굴이 가득 찼다.


“응, 이제 내가 키우기로 했어. 너한테도 안아보게 해줄게.”

“언제? 너 언제 올 건데?”

“…….”

다온이가 이번에는 은조를 바라보았다. 대답을 알려달라는 눈빛이다.


-곧 간다고 해, 아주 많이 보고 싶다고 해.

재하가 빠르게 끼어들었다.


“곧 갈 거야, 채린아 나는 네가 아주 많이 보고 싶어.”

다온이의 목소리에는 이미 그리움과 안타까움이 잔뜩 묻어 있었다. 눈물을 흘리는 것은 시간 문제다.


“응, 알았어. 하아암~~.”

하지만 채린이는 그렇지 않은 것 같았다. 하품을 하고 눈가를 문지르는 귀여운 모습에 은조는 웃음이 나왔지만 울음을 참는 다온이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저녁은 뭘 먹었는지 물어 봐.

또 끼어 든 재하가 힐끗 은조의 눈치를 살폈다.


“채린아, 저녁은 뭐 먹었어?”

“떡볶이~.”

“와, 맛있었겠다!”

-다온이는 아침 뭐 먹을 건지 물어 봐야지.

저쪽에도 코치를 하는 목소리가 있다.

상냥하고 친절한 채린이의 엄마는 은조와 언니 동생 할 정도로 꽤 가까운 이웃이다.


“너는 뭐 먹을 건데. 하암~ 엄마, 채린인 이제 코코 머리 빗겨줄래요.”

다온이의 아침 식사 메뉴보다 잠이 급한 채린이가 화면에서 사라져 버렸다.


[채린아, 다온이한테 잘 지내라고 인사 해야지.]

[안녕, 잘 지내!]

[또 통화 하자고-.]

[힝-.]

“엄마가 대신 인사 할게.”

은조는 전화기를 들어 채린이 엄마와 잠깐 통화를 했다.

실망이 한가득인 다온이의 머리를 쓰다듬는 재하가 연신 괜찮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보통의 사나이라면 그 인생은 거절의 연속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물론 넌 보통의 사내가 될 리 없지만 말이야.”

“……?”

왈- 릴리가 대답 없는 다온이를 대신했다.


“전에 말했던 거 기억 나? 엄마가 아저- 아빠를 얼마나 차갑게 거절했는지 말이야.”

“……네. 남자의 자존심을 상하게 했던 거요.”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은조가 이불 아래로 재하의 발을 툭 쳤다.

***

은조의 옆집으로 이사하고 술에 빠져 살던 권재하.

그녀가 겪은 절망적인 사건, 감히 그려볼 수도 없는 아기의 존재를 생각하면 숨 쉬는 것조차 고통스러웠지만 그게 최선이었다.

이기적이란 걸 잘 알았지만 언제라도 손이 닿은 곳에 윤은조가 있어야 했다. 아니면 영영 그녀를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숨통을 조였으니까.

당연히 그녀의 마음은 단 한 뼘도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 썰렁한 집의 초인종을 다온이가 누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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