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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2. 뉴욕 (2) (94/100)


외전 2. 뉴욕 (2)
2023.04.24.



 
며칠째 술에 의지하며 끝없는 자책에 시달리던 시간.

그런 한심한 스스로를 어쩌지 못해 또 술을 채우던 그런 날.

언제나처럼 에디가 다녀간 그날은 다행스럽게도 정신이 좀 온전한 날이었다.

더는 미룰 수 없는 중요한 서류를 검토해야했기 때문에 에디가 준비해온 숙취 해소제와 그 외에 건네주는 음료 몇 가지를 토 달지 않고 넘겼다.

사실 서류 정도는 볼 수 있는 정도였지만 문득 애를 쓰는 에디에게 미안한 마음이 컸던 날이다.

그렇게 간만에 술병이 치워지고 정신도 맑았던 날이었다.

아니, 정신이야 술을 아무리 집어넣어도 너무 맑아서 문제였을 수도 있다. 잊으면 차라리 편할 텐데 1분 1초가 지나는 대로 모든 아픈 기억도 동시에 그 크기를 키워갔다.

소파에 앉아있던 재하는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오후의 햇살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에디가 준비해 두고 간 음식이 놓여있었다.

냄새가 역겨웠다. 치워버려야겠다고 생각한 순간,

딩동-


“……?”

이 시간에 초인종을 누를 사람이 없는데.

딩동-

재하는 앉은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은 채 미간만 찌푸렸다.

쿵, 쿵.


[아저씨! 카일 아저씨!]

다온이의 목소리에 재하는 번개처럼 자리에서 튀어 올라 현관문으로 달려갔다.


“다온아!”

“안녕하세요!”

새삼스럽게 또 배꼽인사였다. 재하의 얼굴에 간만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윤다온, 어떻게 왔어?”

“아저씨, 뭐하세요?”

“……아.”

뭘 하겠니. 뭣도 할 수 없는 뭐 같은 상황인데. 재하는 아이의 뒤를 살폈다.


“동구리, 너 혼자야?”

“엄마는 회사 갔고요, 이모는 집에 있는데 아저씨 만나러 가도 된다고 했어요. 허락 받고 온 거예요.”

“그래, 일단 들어 와.”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아이가 집안으로 쏙 들어갔다.


“어, 맛있는 냄새!”

“……응.”

다온이가 벗어놓은 작은 운동화에 시선을 빼앗긴 재하는 현기증을 느꼈다.

손바닥만 한 파란 운동화가 왜 그렇게 귀엽고 또 가슴을 아프게 하는지. 가슴이 뻐근하고 눈앞이 뿌옇게 변했다.

내가 이런데 은조는 어땠을까. 저절로 몸서리가 쳐졌다.


“이모가 아저씨 밥 먹었나 보라 했어요. 오늘도 밥 안 먹고 술을 먹었어요?”

“……다온아 술은 마셨다고 하는 거야, 액체는…….”

내가 뭔 소리를 하는 거지. 하던 말을 멈춘 재하는 큰 숨을 토해냈다.


“점심은 먹었어?”

“네. 김치 때문에 조금 먹었어요.”

아이가 귀여운 얼굴을 찌푸렸다.


“김치 싫어하는구나. 아저씨가, 뭐 좀 시켜 줄까? 아니, 우선 저게 뭔지 좀 풀어 볼까?”

“네!”

쓰레기가 될 걸 잔뜩 많이도 사 왔다고 생각했는데 다행히 에디가 두고 간 음식들 중에 다온이가 좋아할 만한 것이 있었다.

죽은 보자마자 고개를 가로저었는데 초밥을 보더니 눈을 크게 떴다.

그 모양에 재하는 또 콧등이 시큰해지는 것을 느꼈다.

제 것이었을 수 있던 기적 같은 큰 행운을 날려버린 자신을 과연 용서할 날이 올는지 의문도 들었다.

그 모든 걸 혼자 떠안고 권재하를 대면해야 했던 은조, 천하의 개자식 주제에 아무것도 모르고 한 짓들을 생각하면…….


“다섯 개만 먹을게요.”

아이가 손을 펼쳤다. 재하는 작고 귀여운 손가락 다섯 개를 차례대로 바라보았다.


“……왜 겨우 다섯 개야?”

목이 콱 막혀서 말이 간신히 나왔다.


“엄마랑 약속했어요, 아주 맛있는 것도 조금만 먹기로. 지난번에 아팠잖아요.”

“아! 그래, 응급실 갔었지. 잠시만 기다려 봐, 따듯한 국물하고 먹게.”

아이 앞에 젓가락을 놓아준 재하는 식어버린 미소국을 데우고 미지근한 물도 한잔 준비해 주었다.


“어른이 먼저 드시면 먹는 거예요. 아저씨 먼저 먹으면 다온이도 먹을래요.”

“…….”

별것도 아닌 초밥을 앞에 두고 아이가 말갛게 웃는다. 재하의 눈가가 순식간에 붉어졌다.

정신이 나간 인간처럼 당장 엉엉 소리 내서 울고 싶은 심정을 간신히 참아낸 그는 미적지근한 죽을 떠서 입으로 가져갔다.


“……먹었어. 너도 어서 먹어, 광어가 좋아, 연어가 좋아?”

손으로 눈가를 세게 문지른 재하는 죽 그릇에 코를 박았다. 단맛이 분명할 호박죽에서 아무런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둘 다 좋아요! 아저씨는요?”

“나는…… 나도, 둘 다 좋아.”

“그럼 이거!”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작은 녀석이 젓가락질을 얼마나 야무지게 잘하는지.

재하는 아이가 들어 올려준 초밥을 얼른 받아먹었다. 과연 이걸 넘길 수 있을까 생각을 하면서 천천히 꼭꼭 씹었다.

음식을 입에 넣고 오물거리는 아이가 눈으로 웃는데 그 얼굴에서 은조가 보였다.

억장이 무너진다는 게 무슨 뜻인지 깊게 실감했다.


“나는 채린이랑 화해했는데…….”

“……응?”

“채린이가 내 말을 안 믿어서 말 안 붙이고 있었거든요.”

“우리 다온이 자존심을 건드렸구나? 무슨 말을 안 믿었는데?”

“릴리 이야기랑…… 음…….”

망설이는 아이가 재하의 눈치를 살폈다.


“괜찮아, 말해봐. 비밀이면 아무에게도 말 안 할게.”

“아빠가 생길 거라고 말했어요. 아저씨가 지난번에 병원에서…….”

아빠가 되어 달라고 하는 아이에게 엄마의 허락이 필요하다고 했지.


“그래, 기억나. 그런데 지금 엄마가…….”

고개를 숙인 재하는 연신 죽을 떠 입으로 가져갔다.


“엄마는 아저씨 좋아해요! 채린이도 가끔 저를 꼬집는데요, 그게 미워서 그러는 게 아니래요!”

“……?”

“이모가 알려줬어요. 관심이 없으면 미워하지도 않는다고.”

“……그렇지.”

너희 엄마는 나를 미워하는 게 아니라, 증오하고 경멸하고…… 세상에서 서라져 버리길 바라지.


“아저씨, 아~!”

천진하게 웃는 아이가 초밥 한 덩어리를 또 들어 올렸다.

***

재하는 채린이와의 통화 이후 시무룩해진 다온이를 위로하느라 애썼다.


“서울에 가면 같이 채린이를 만나자. 근사한 선물도 준비해 가면 되겠다, 그렇지?”

“선물이요?”

깨작거리며 아침식사에 통 관심이 없어 보이던 다온이의 눈이 반짝거렸다.


“아까 보니까 인형을 좋아하는 것 같던데 우리 같이 채린이에게 줄 만한 걸 찾아볼까? 식사 끝나고 릴리를 산책 시킨 다음에 백화점 가자. 한국에는 없는 아주 특별하고 예쁜 걸 찾아서 채린이를 놀라게 해주는 거야, 어때?”

“네. 그런데 코코보다 더 좋은걸 찾을 수 없을지도 몰라요.”

“걱정 마, 여러 개를 사면되니까! 참, 달링- 파티에 입을 옷에 대해 생각 좀 해 봤어?”

아침 식사에 열중하고 있던 달링, 은조가 고개를 들었다.


“응? 파티? 아, 출간파티? 나 옷 많아. 민아 결혼식 때도 여러 벌을 샀잖아.”

샐러드에 들어있는 치즈를 입에 넣은 은조는 환하게 웃었다. 오늘은 웬일인지 아침부터 입맛이 당겼다.


“그게 맞으려나? 내 생각에는 새 옷이 필요할 것 같은데.”

아침부터 달링에게 너무 그윽한 눈빛인 재하를 은조가 쏘아보았다.

일일이 지적해 주지 않아도 안다. 그녀의 몸이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고 있는 중이라는 것을.


“나는 이제 뭘 입어도 남들이 보기엔 그냥 임산부일 뿐이야.”

이러다 고래가 되는 게 아닐까, 말도 안 되는 생각으로 잠깐 슬픈 적도 있었다.


“무슨! 이렇게 아름다운 임산부가 세상에 있다는 것을 알려 줘야지 않겠어?”

재하는 은조를 세상에 자랑하고 싶어 안달을 했다. 특히 ‘임신한 은조’를 말이다.


“그래그래, 알았어. 세상에 알리자. 관심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

일주일 뒤, 그리니치 빌리지에 있는 출판사 ‘봄’.

재하의 책 출간 파티가 열리는 날, 은조는 어깨에 달린 리본 장식이 사랑스러운 드레스 차림이었다.

연한 보라색이 흰 피부와 다갈색 눈동자를 돋보이게 했다. 워낙 체격이 가녀린 그녀는 아직까지 단번에 알아차릴 정도의 임산부는 아니었다.

늦게 눈치를 채고 축하의 인사를 건네는 사람들을 두고 재하는 다소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아무래도 드레스를 잘못 골랐어.”

“누가 봐도 임산부인 옷을 골랐어야 했다는 말이지? 인내심을 가져 봐. 곧 누가 봐도 임산부 티가 팍팍 날 테니까.”

“그런가?”

남의 속도 모르고 아니, 마냥 즐겁다고만 할 수 없는 신체적 변화를 겪는 여자의 마음을 알 리 없는 남자가 빙긋 웃는다.

은조가 옅은 한숨을 내쉰 그때 박상아가 다가왔다.


“작가님, 낭독 준비하셔야죠. 은조 씨는 파티 좀 즐기게 해줘요. 내내 그렇게 딱 붙어서 독차지해야 직성이 풀려요?”

어쩜 그렇게 매번, 한 번에, 깔끔하게 정리를 잘하시는지. 은조는 볼 때마다 그녀가 점점 좋아지고 있었다.

머쓱한 표정이 된 재하. 은조가 그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의자가 다 채워졌네. 사람들을 기다리게 하면 안 되지, 기대할게. 다온이랑 뒤에서 보고 있을 거니까 조금 있다가 봐.”

근처에 있는 다온이는 제 또래의 금발 소녀에게 부족한 영어 실력을 마음껏 펼치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의 시선과 관심이 한곳으로 집중 되었다.

낭독을 위해 마련된 높은 의자에 앉은 재하는 여전히 눈부시게 멋졌다. 멋진 미소 지으며 들고 있는 책의 표지를 보이자 카메라 플래시가 폭죽처럼 터졌다.


[그럼, 시작해볼까요.]

여유 있고 근사한 저음이 공간에 울리자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가 좋은 목소리로 일아 듣기 쉽게 책을 읽어 내려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은조는 시원한 음료로 목을 축였다.

앞쪽에 준비된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물론 은조처럼 뒤쪽 서있는 사람들도 책의 도입부를 차분하게 읽는 작가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은조는 다온이가 있는 곳으로 움직였다. 파티를 위해 준비된 음식들이 놓인 테이블은 온통 흰 꽃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백합과 장미, 피오니에 작은 들꽃같이 사랑스러운 꽃 장식들이 넘치는 테이블에는 각종 음식들도 보기 좋게 셋팅되어 있었다.

금가루가 부려진 까눌레가 눈에 띄었지만 은조는 과일 조각이 담겨 있는 흰 접시를 하나 집어 들었다.

얌전하게 잘 놀고 있는 다온이를 확인하고 포도알 하나를 입에 넣은 찰나, 출판사 입구로 들어선 사람을 발견했다.

회색 정장 차림의 키가 큰 남자는 금발머리가 퍽 인상적이었다.

정말 아름다운 머리카락이라고 생각하며 달콤한 과일을 하나 더 입에 넣고 오물거리는데.

잠시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그 남자가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는 것이 보였다.


“……?”

남자가 이쪽으로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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