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3. 뉴욕 (3)
(95/100)
외전 3. 뉴욕 (3)
(95/100)
외전 3. 뉴욕 (3)
2023.04.27.
남자는 출판사로 들어서자마자 빠르게 주변 상황을 알아챈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다음으로 해야 할 행동도…… 바로 정했나?
그는 마치 아는 사람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망설임 없이 은조가 있는 방향으로 다가왔다.
음식이 여기 있으니까 오나 보다, 생각한 순간.
[안녕하세요.]
“……?”
왠지 다정한 느낌을 주는 인사를 받은 은조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기- 나밖에 없는데?
[……아, 안녕하세요.]
은조는 빙긋 웃는 금발 미남의 보석 같은 눈동자를 홀린 듯 바라보았다.
[제가 좀 늦은 것 같군요.]
테이블을 죽 들러본 남자는 한입에 넣을 수 있는 작은 샌드위치를 집어 무심하게 입에 쏙 넣었다.
그리고 바로 옆 둥근 테이블 위에 놓인 샴페인 잔을 하나 집어 들었다.
아무렇지 않게 입에든 음식을 우물거리는 남자가 여전히 은조를 바라보며 눈으로 웃는다.
“……?”
그는 이내 들고 있는 잔을 단번에 훅 비우고는 다른 잔을 하나 더 들었다.
[좋은 샴페인이네요. 반갑습니다. 브랜든 쿠퍼라고 합니다.]
남자가 목을 가볍게 숙여 보였다.
보통의 경우 악수를 청하며 손을 내밀거나 친근하게 볼 키스를 하는데 그것보다 사뭇 정중해 보이는 태도였다.
[반갑습니다, 윤이에요.]
[압니다. 한눈에 알아보았지요, 윤은조 씨 맞죠?]
은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디서 봤더라- 내 기억에 이런 미남은 없는데.
그녀는 저도 모르게 멀찍이서 책을 읽고 있는 재하를 바라보았다.
“……!”
순간, 권재하도 힐끗 은조가 있는 쪽을 쳐다봤는데 그 눈빛 안에서 번쩍- 날카로운 빛이 스친 것을 은조는 분명히 느꼈다.
[이런, 카일이 제가 온 것을 알고 인사를 하네요.]
금발도 놓치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 그와 아는 분이시군요! 저는 처음 뵙는 것 같은데요.]
[맞습니다. 카일과는 친구고 은조 씨는 처음 뵙는 게 맞습니다. 다시 한번 반가워요.]
그가 이번에는 손을 내밀었다.
[……그렇군요.]
재하의 손만큼이나 큼직하고 남자다운 손을 바라보던 은조는 얼른 미소를 만들며 그 손을 잡았다.
[카일에게 특별한 분이신 것 압니다. 그래서인지 제게도 신기할 정도로 남같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혹시, 무례했다면 용서하세요.]
[아니에요! 전혀 기분 나쁘지 않아요.]
미남이 건네는 상냥하고 다정한 태도는 싫지 않았다. 더구나 재하와 친구 사이라고 하니 특별히 경계해야 할 이유도 없었다.
은조의 얼굴에 자연스럽고 환한 미소가 번지는데, 문득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고 있던 재하의 목소리가 멈추었다는 것을 알았다.
“……?”
그녀는 들고 있던 책을 무릎 위에 올린 채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 재하를 발견했다. 멀리 있는 그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이 묘하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낭독은 이 정도로 해 둬야 할 것 같습니다.]
뭐? 갑자기 왜? 뒤통수만 봐도 의아해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들리는 것 같았다.
마침 학생처럼 보이는 남자가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작가님, 저는 개인적으로 제목에 관한 부분이 정말 인상적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 부분을 직접 읽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리고 간단하게라도 더 들려주실 다를 이야기가 있다면 부탁드리고 싶은데요.]
웬일인지 입을 한일자로 다문 재하가 책을 턱, 덮었다. 역시 낭독을 그만두겠다는 뜻이다.
[우선 저를 작가님이라고 부르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이 책이 제 처음이자 마지막일 테니까요. 아시다시피 저는 기업을 운영하는 사람입니다. 출판사 봄을 위해 도움이 될 만한, 네, 실은 돈이 될 만한 글을 쓴 것도 그 이유지요. 다시 시작하는 ‘봄’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앞으로도 한국 문화를 소개하는 일을 최우선으로 하는 출판사가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이미 읽으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그 숫자는 제가 사랑하는 사람을 처음으로 만난 날입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의 심사가 단단히 꼬였다! 은조는 재하가 긴 검지로 책을 톡톡 두드리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대부분은 건방지고 거만한 권재하, 카일 알렉시스가 돌아와 있었다!
[당장 더 들려드릴 이야기는 그 사랑하는 나의 여인이, 나의 제일 친한 친구 녀석을 방금 만났다는 겁니다. 여러분들 중에도 아시는 분이 많을 텐데요, 브랜든 쿠펍니다.]
길게 뻗은 재하의 팔, 그 손끝이 은조가 서있는 방향을 가리켰고 앞쪽을 향하고 있던 수많은 시선이 은조와 금발에게로 날아와 꽂혔다.
어쩔 줄 몰라 하며 얼굴을 붉게 물들인 은조와 다르게 브랜든 쿠퍼는 마치 중세 기사처럼 정중하게 허리를 접어 인사하더니 이내 한쪽 손을 들어 가볍게 흔들어 보였다.
누가 보아도 화가 난 표정인 재하를 박상아가 밀어내듯 자리에서 일어서게 했다.
마이크를 차지한 그녀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낭독을 마무리 짓는 것으로 상황을 정리하고 사람들에게 파티 준비에 많은 공을 들였다며 모두 즐기길 바란다고 간곡히 청했다.
여유만만한 브랜든과 다르게 난감한 표정의 은조 곁에는 재하가 이미 와있었다.
“왜 낭독을 하다가 말아? 기다린 사람들을 실망시켰…….”
“시시한 낭독보다 내 여자를 지키는 게 더 급하다는 걸 알았거든.”
은조를 끌어당겨 품에 안은 재하는 잡은 손과 발그레한 뺨에 여러 차례 입술을 눌러댔다.
법적으로 이미 아내다, 아주 오래전부터 사랑했던 여자다, 말로 몸으로 이 여자는 내 것이라고 이미 파티 시작부터 수도 없이 알리느라 정신이 없더니.
“지키다니? 내가 어디 다른 데로 간 것도 아닌데…… 서, 설마?”
더욱 얼굴이 붉어진 은조는 재하의 가슴을 밀어내며 힐끗 브랜든의 눈치까지 살폈다. 그리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눈이 이쪽을 보고 있을까 생각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카일, 적당히 해. 내가 못 올 곳을 온 거야?]
어이없다는 듯 어깨를 들썩인 브랜든을 향해 재하가 이제야 손을 내밀었다.
[반갑다, 잘 왔어.]
[정식으로 소개를 부탁할게. 이미 그녀가 누구인지 잘 알고 있지만.]
“은조야, 브랜든 쿠퍼라고 내 친구인데 네가 크게 신경 쓸 인간은 아니야. 오늘 보고 그냥 잊어버려도 돼.”
미쳐. 은조가 입술을 터트려 웃었다.
“친구 분의 얼굴이 그냥 잊어버릴 수 있는 그런 얼굴이 아니잖아. 대단한 미남이셔, 게다가 자기랑 묘하게 분위기가 닮았어. 좋은 뜻이야.”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콧방귀를 뀐 재하는 근처를 두리번거리더니 바로 다온이를 찾아냈다.
[잠깐 실례, 네게 진짜 소개해 줄 사람은 따로 있거든.]
[이봐, 카일. 방금 그녀가 내 칭찬을 했다는 걸 알아! 맞지? 네 덕분에 내가 어느 정도의 한국어는 알아듣거든. 질투에 눈이 먼 야비한 자식.]
말로는 얄밉게 친구를 약 올리는 브랜든은 신화에 나오는 천사 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모습 또한 어디서 본 듯하다. 어쩜 이렇게 비슷한 남자끼리 친구가 되었을까. 손으로 입을 가린 은조는 다시 쿡쿡 소리를 내며 웃었다.
다온이에게 귓속말을 하는 재하를 바라보던 그녀는 브랜든이 건넨 샴페인 잔을 받아들었다.
[다온이군요! 오, 이런…… 카일이 점점 더 부러워지는데요.]
[아직 미혼이신가 봐요?]
[불행하게도 그렇습니다.]
전혀 불행하게 보이지 않는 얼굴이 제게 다가온 어린아이에게 더욱 환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브랜든 제정신이야? 내 아내에게 술잔을 주다니!]
재하가 은조의 손에 있던 가는 유리잔을 빼앗아 다시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너무 그러지 마, 마시지도 않았어! 그리고 샴페인 정도면 입술을 축이는 정도는 괜찮다고!”
은조가 작게 항의했지만 재하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다.
[다온아, 인사해. 아빠 친구야.]
귀엽게 제게 맞는 턱시도를 차려입은 아이가 손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미스터. 반갑습니다, 저는 윤다온이라고 해요!]
[안녕, 나는 브랜든 구퍼야.]
무릎을 접어 다온이와 눈높이를 맞춘 브랜든이 작은 손을 맞잡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재하는 은조에게 윙크를 하더니 허리에 팔을 감았다.
“다온이한테도 영어 이름을 하나 지어줄까? 달링 생각은 어때?”
“글쎄, 있어도 좋을 것 같지만 그냥 본래의 이름을 쓰는 게 좋을 것도 같아.”
“그래, 달링 좋을 대로 해.”
재하는 저를 대신해 격식 있는 옷을 차려입은 아이를 바라보며 뿌듯한 표정이 되었다.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다는 말이 무엇인지 하루가 다르게 알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눈이 정말 아름다워요, 브랜든 씨!]
[그런 이야기를 자주 듣는단다. 그냥 브랜든이라고 부르렴.]
[머리카락도 너무 아름다워요, 제가 이제까지 본 중에 최고예요!]
[음, 그 얘기도 아주 자주 듣지. 네 머리카락도 훌륭하구나, 아빠를 그대로 닮은 것 같아.]
[실례가 안 된다면 한번 만져 봐도 될까요?]
[다온아, 그건 예의에…….]
[브랜든, 아빠 연습이라고 생각해.]
은조의 말을 자른 재하가 어서 아이의 소원을 들어주라는 듯 브랜든에게 고개 짓을 해보였다.
[얼마든지!]
단번에 다온이를 번쩍 안아 올린 브랜든은 얼마든지 만져보라며 제 아들이라도 되는 것처럼 다정하게 굴었다.
역시나 권재하의 눈빛이 변했다! 은조가 팔꿈치로 그의 옆구리를 꾹 찔렀다.
“관둬! 가만 보니까, 두 남자가 원래 이런 식으로 노는 것 같은데 좀 철없어 보이는 거 알아? 오늘은 적당히 해, 오빠 출판 기념회라고, 파티의 주인공이잖아.”
눈을 접으며 웃는 은조가 어금니를 꽉 물며 말했다. 유치한 게 꼭 십대 사내아이들 같다.
흠- 은조가 뭐라고 하든지 또 마땅치 않은 얼굴로 뜨거운 숨을 내쉰 재하가 브랜든에게 다가섰다.
[다온아, 이라 와. 아빠한테 와야지.]
맙소사. 은조는 지끈거리기 일보직전인 이마를 짚었다.
아이가 냉큼 저에게 안기며 목을 끌어안자 재하는 바로 의기양양한 표정이 되었다.
[부러우면 연애해, 인마. 결혼을 하든가.]
당연히 빈정거림도 잊지 않는다.
[카일, 너도 아직 정식으로 결혼식은 올리지 않았다고 들었는데?]
마카롱 하나를 집어 입에 넣은 상대도 만만치 않다. 하- 남자들이란. 은조는 또 결혼식 문제로 시달릴 밤을 생각하며 몸서리쳤다.
아니나 다를까.
“들었지. 저 자식이 방금 한 말.”
“……응?”
오늘밤은 또 어떤 식으로 나를 괴롭힐까.
내내 지독하고 달콤한 시달림에 지친 은조의 뺨이 달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