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4. 뉴욕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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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4. 뉴욕 (4)
2023.05.01.
그들이 또 들이 닥쳤다.
엊그제와 다른 다자이너가 보낸 물건과 사람들.
물론 미리 시간을 정했고 내용도 무엇인지 알고 있었지만. 행거에 걸린 드레스들을 바라보는 은조는 큰 숨을 내쉬었다.
“후……”
조금 힘에 부치는 것은 맞지만 결혼을 준비하는 일은 즐거웠다.
결혼식이나 드레스를 자신과 연관 짓는 것이 우습다고 생각한 시절이 있었다. 아니, 오히려 그런 그림은 드라마에서라도 스치면 외면하고 싶었다고 보는 게 더 맞을지도 모른다.
어차피 제 것일 수 없는 일에 상상을 붙여보는 일은 시간 낭비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그렇게 단순하고 쉽다면야 이렇게 먼 길을 돌아오지도 않았겠지.
비록 아이를 키우고 있는 상황이라고 해도, 연애나 결혼 같은 것은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고 해도, 결국 삶은 누군가와 살아가야 하는 것이었다.
누군가의 삶이 오롯이 혼자만의 것인가. 아닐 것이다.
사시사철 계절에 상관없이 치러지는 결혼식은 많았고 전부 축의금만 보내는 것은 무리가 있었다.
어찌 보면 결혼 적령기라 할 수 있는 은조는 보고 싶지 않아도 아름답고 행복한 신부들을 보아왔다.
사랑에 빠져 마냥 행복한 이들을 건조한 눈으로 바라보기도 했고, 남의 아이여도 사랑스럽고 귀하기 그지없는 아기들을 안아보기도 했다.
부럽지 않다고 생각했다. 간혹은 끝까지 가는 사랑과 행복은 세상에 없다고 부정하기도 했다.
그런데, 아니었나 보다.
이렇게 당하고 보니 이 세상이 저를 위주로 돌아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사실이 그렇기도 했다.
결혼 발표에 기뻐하는 가족들. 감격하고 반가워하는 그들의 반응에 더욱 행복해지는 자신을 보며 괜한 고집을 부렸나 싶었다.
특히 기뻐하는 제니스를 보며 약간 미안한 심정이 되기도 했다.
그녀는 신약치료로 긍정적인 효과를 보고 있었고 병원에 가는 시간과 쉬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거의 손자의 결혼식에 관여하며 즐거워 어쩔 줄 몰라 했다.
말이 손자의 결혼식이지 그녀가 신경 쓰는 것은 모두 은조와 관련된 것이었다,
드레스는 말할 것도 없고 구두며 티아라, 심지어 속옷까지 이틀이 멀다 하고 톱클래스의 디자이너의 드레스가 집으로 직접 찾아왔다.
물론 은조보다 그것들에 더 관심을 가지고 보는 사람은 재하였다.
디자인이나 재질, 혹은 디테일의 변형을 요구하는, 디자이너의 기분을 상하게 할 수 있는 제안도 심심치 않게 했다.
결혼식 장소와 초대할 사람들을 두고는 아예 은조를 제치고 재하와 제니스 둘이 긴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은조가 즐겁고 행복한 부분은 제가 사랑하는 두 사람이 너무 행복하고 즐거워한다는 것 그거 자체였다.
오늘도 여지없이 은조보다 더 드레스에 관심을 보이는 재하에게 그녀는 조심스럽게 제 의견을 말했다.
“나는 사실 어느 것을 입어도 좋아. 그렇잖아 이제까지 본 것들은 전부 최고의 디자이너들 것 이니까. 그런데…….”
“그런데? 망설이지 말고 말해 봐. 특별히 마음에 둔 게 따로 있어?”
“아니, 그게 아니고. 사실은 결혼을 늦추자고 한 이유 중의 하나는…… 지금보다 배가 더 나오고 제대로 D라인이 되었을 때 드레스를 입고 싶어서였어.”
“그래? 의외네. 보통은 숨기고 싶어 하지 않나? 나도 좀 조심스러워서 물어보기 망설인 부분인데 그렇게 생각했다니…… 너무 기쁘다.”
“그랬어? 별로 조심스러워하지 않는 줄 알았지.”
그는 내내 은조가 임신한 티가 팍팍 나는 드레스를 추천했다.
교묘하게 부른 배를 가릴만한 디자인의 드레스에는 매번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슨 대단히 잘한 일인 양 세상에 임신 사실을 알리려고 안달을 했다.
“무슨! 난 네가 여전히 조심스럽고 불안해. 너는 숨소리만으로도 날 쥐락펴락하면서 몰랐다는 거야? 너무하는군.”
“그럼 말이 나온 김에 마저 해도 될까?”
“응, 뭐가 필요해 달링?”
“일단 그 달링 소리 좀 줄여 주면 안 될까. 너무 느끼해서 미치겠어. 그냥 이름을 불러 줘, 최대치로 다정하게.”
“그래 은조야.”
그가 웃었고 은조도 따라 웃었다.
이젠 별것도 아닌 걸 가지고도 재미있고 웃기고 그렇다.
“가능하다면 나도 민아처럼 시청에서 하고 싶어, 간략하게.”
웃음기를 거둔 재하가 은조의 손을 잡더니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좋다. 찬성이야.”
“대신 사진을 찍어주는 사람은 최고를 불러 줘. 우리 네 명을 제대로 예쁘게 기록하고 싶어.”
“……그래, 넷. 우리 가족.”
재하가 은조를 끌어안았을 때 필립이 마침 끼어들었다.
“어! 필립도 좋은가 봐! 방금 신호를 보냈어!”
목이 메는지 고개를 끄덕인 재하는 은조의 목에 얼굴을 묻었다.
“……사랑해.”
……너무, 너무 사랑해서 가슴이 아파. 이해할 수 없지만 사실이야.
이제 툭하면 눈부터 촉촉해지는 남자의 어깨를 은조가 다정하게 끌어안았다.
“나도 그래, 사랑해 권재하.”
***
“결국 이런 날이 왔어…… 나는 이렇게 될 줄 처음부터 알았다고.”
민아는 드레스를 입은 은조를 보자마자 눈물바람을 했다.
“그만 좀 울어, 능금이 우울해 지겠어.”
“좋아서 우는데 왜 우울해져? 지금은 자고 있는 것 같아, 필립은 주로 언제 말 걸어? 능금이는 주로 새벽에 깨워.”
귀찮아 죽겠어- 은조에게 상체를 기울인 민아가 장난스럽게 속삭였다.
저처럼 시청에서 그것도 최대한 빠르게 식을 올리기로 결정했다고 말했을 때 민아는 소리를 꽥꽥 지르고 손뼉을 치며 호들갑을 떨더니, 이내 풀이 죽어서는 빈 시간을 잡기 힘들지 않겠냐고 말했다.
하지만 윤은조의 남자가 누구인가. 그의 할머니는 또 누구인가.
어떻게 이렇게 빠르게 그것도 날씨까지 끝내주게 화창한 금요일로 잡았을까.
은조는 묻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별로 힘도 들이지 않고 원하는 것을 얻는 그들이니까. 그냥 기쁘게 받아들이면 된다.
그녀가 고른 드레스는 드레스라고 할 수도 없을 정도로 심플 그 자체였다.
도비 실크로 만들어진 드레스가 우아하게 보디라인을 따라 흘러내렸다.
여전히 가녀리고 아름다운 어깨가 드러났고 동그랗게 솟아오른 배는 오히려 강조되었다. 티아라와 베일 등 과장된 모든 것은 생략했다.
“……어?”
“……이상하지?”
은조와 민아는 너무나 조용한 시청으로 들어서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차로 이곳까지 은조와 민아를 태우고 온 에디 강이 앞서서 걸어가고 있었는데 그 걸음에는 주저함이 없다.
“언니, 이 건물이 맞아? 뭔가 같은데 다르네?”
민아의 목소리를 들은 에디가 뒤를 돌아보는데 얼굴에 미소가 가득하다,
“같은데 다른 것 맞습니다. 민아 씨가 결혼한 곳은 본관이고 여긴 바로 옆 별관이요, 정확하게 말하면 시장님이 있는 곳입니다.”
“헐. 역시, 그런 거야!! 그래, 언니는 이제 알렉시스잖아!”
맙소사. 은조는 입안에서 탄식을 굴렸다. 그냥 평범하게 지나갈 리가 없지.
민아의 결혼식을 보고 조금 놀란 것은 사실이었다. 들어서 알고는 있었지만 마치 병원에서 대기표를 받고 접수하고 빠르게 진료를 보는 것과 다를 게 없는 결혼식. 건물은 낡았고 주례는 젊은 흑인 여성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순식간에 식을 치르고 부부간 된 이들은 기념으로 대충 사진을 남기면서도 매우 행복한 얼굴이었다.
어떻게 보면 한국의 그것보다 합리적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나중이 중요하지, 잘 사는 거. 행복하게 오래 곁을 지켜주는 것.
상념에 잠겨 계단을 하나씩 조심스럽게 옮기던 은조는 문득 걸음을 멈춘 민아를 바라보았다.
“왜?”
“……어떡해.”
또 울먹거리는 민아의 시선을 좇아간 곳에, 그가 있었다.
내 남자. 내 남편, 권재하.
은조에게 맞추느라 점잖고 단정한 셋업 슈트를 차려입은 그는 왠지 경직된 표정이었다.
“엄마!”
신랑보다 더 멋지게 턱시도를 빼입은 다온이가 손을 흔들며 환하게 웃었다.
“……어서 와, 기다리고 있었어.”
은조는 그가 내민 손을 바라보며 남은 계단을 천천히 밟았다.
“…….”
마침내 손끝이 닿고 그의 온기를 느끼고, 다정하고 깊은 눈빛을 마주하자 내내 평온하던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이럴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그저 담담할 줄 알았는데. 이미 부부처럼 살고 있는데. 이게 뭐라고…….
“괜찮아, 바보 같은 표정은 내가 담당할게 은조 너는 웃어. 예쁘게 실컷 웃어야 돼.”
이미 그녀를 알아차린 재하가 자연스럽게 내려뜨린 신부의 머리카락을 매만져주었다.
그 손이 또 어찌나 다정한지, 그게 왜 또 갑자기 엄마 생각으로 이어지는지. 웃기는커녕 커다란 눈 안으로 맑은 눈물이 그득히 차올랐다.
“이상해…… 나 되게 담담했는데. 갑자기…….”
결국 이렇게 될 걸. 너무 먼 길을 돌아서 왔다.
“……알아, 나도 그래.”
재하의 엄지가 부드럽게 은조의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방울을 밀어냈다.
새벽에 스르륵 눈이 떠지고 곁에서 곤하게 잠이 든 은조의 숨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처음 본 아홉 살의 윤은조.
열 살 소년에게 갑자기 찾아왔던 첫사랑은 이제껏 단 한순간도 변한 적이 없었다.
그 모양이 네모나 세모로 변해서 그를 당황스럽게 했고 혹은 녹아내려 어떤 형태라고 설명조차 할 수 없어 혼란스럽기도 했었지만.
그 본질은 항상 같았다.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뺨을 감싼 크고 따듯한 손 위로 은조가 제 손을 겹쳤다.
“그런 표정 짓지 마, 오빠. 오늘 나는 울어도 행복해서 우는 거야, 나, 너무 행복해.”
재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검은 눈동자가 촉촉하다.
“엄마, 이거 봐!”
“……?”
다온이의 손에 들린 붉은 벨벳 상자, 그 안에 있는 커다란 다이아몬드 반지가 반짝거렸다.
"엄마 거야! 96만 달러짜리야!”
“다온아!! 아빠가 그건 비밀이라고 했잖아! 그리고 벌써 보여주면 어떡해!”
“반지에 돈 좀 그만 쓰라고 말했는데.”
은조가 들고 있던 작은 부케로 재하의 가슴을 툭 때렸다.
“이런, 저기 증조할머니다!”
재빨리 화제를 바꾼 재하가 가리킨 곳에 카일과 제니스의 모습이 보였다. 어서 오라고 손짓을 한 제니스가 품에 안고 있던 릴리를 내려놓았다.
뛰어오는 릴리를 본 은조와 재하는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은조 대신 깜찍한 티아라와 베일을 쓴 릴리가 다온이의 품에 안겼고 아이는 언제나처럼 행복에 겨운 웃음소리를 냈다.
시작부터 완벽한 결혼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