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5. 서울 (1)
(97/100)
외전 5. 서울 (1)
(97/100)
외전 5. 서울 (1)
2023.05.04.
은조는 두고두고 ‘천만다행’이라고 말했다.
시청에서 치러진 제 결혼식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가족들만으로 구성된 최소한의 예식이었길 망정이지 걸핏하면 우는 남자와 결혼했다고 온 세상에 광고할 뻔했다.
식이 시작됨과 동시에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재하는 내내 그 모양이었다. 소리만 내지 않았지 거의 통곡 수준이나 다름없었다.
평온을 되찾고 은은한 미소를 머금은 신부와 상당히 대조되는 태도였다.
주례를 맡은 시장님은 제니스와 친분이 꽤 깊었는데 은조는 식전에 민아에게 그가 게이라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꽤 멋을 부린 시장님은 주례를 하는 동안 반지를 들고 있는 다온이를 대신해 릴리를 안고 있었다.
여러모로 재미있는 결혼식인데 자꾸 울음을 터트리려고 하는 재하가 그녀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결혼에 대한 그럴듯한 명언 두어 개를 들려주는 것으로 끝난 초스피드 주례가 다행스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자기야, 뭐가 그렇게 서러운데?]
[서러운 게 아냐…… 감격스러워서 그래. 믿어지지가 않아…… 기쁘고 슬프고 다시 너무 기뻐서…….]
[이제 좀 웃어 봐, 응? 꼭 내가 뭘 잘못한 거 같잖아. 사진을 전부 망칠 생각이야?]
[…….]
하지만.
사진에 대한 걱정은 기우(杞憂)에 불과했다.
어쨌든 월요일 뉴욕에서 발간되는 대표 일간지에 실린 한 장의 사진으로 은조는 세상 모두가 부러워하는 여자가 되었다.
어린 아들의 손을 잡고 있는 카일 알렉시스는 또 다른 아이를 가진 아내의 손을 잡고 활짝 웃고 있었다.
노련한 최고의 포토그래퍼를 고용한 덕을 톡톡히 본 것이다.
***
부자라고 해서 대단하고 특별한 크리스마스를 보내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특별했다고 말해야 하나?
제니스의 펜트하우스에서 식사를 했던 날. 은조와 다온이, 민아와 선우는 오랜만에 한식으로 배를 채웠다.
제니스 알렉시스는 손자며느리와 증손자, 그 가족들을 위해 한국 요리로 식탁을 가득 채웠다. 그야말로 한국식 잔칫상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다온이와 민아는 잡채를 특히 좋아했는데 이제껏 먹어 본 것 중 가장 맛있다면 엄지를 치켜세웠다.
오랜만에 맛있고 배부르게 식사를 한 은조는 디저트로 나온 식혜를 마시고 함박웃음을 웃었다.
도시 전체를 얼려버린 맹추위 속에 얇은 옷을 입어도 될 정도의 따듯한 실내에서 살얼음이 동동 뜬 식혜를 마시다니.
평생 잊지 못할 크리스마스였다.
***
서울, 이른 아침 차상윤의 집.
암막 커튼이 드리운 어두컴컴한 방으로 들어선 이혜정은 잠시 침대 위에 엎어져있는 왕나나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육감(六感) 하나는 끝내주게 발달했다고 자신하는 그녀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흥, 딴방을 쓰네 마네 주제에 무슨 요조숙녀라고 말만 그럴듯하게 잘도 하더니 제까짓 게 하는 짓이 그렇지 뭐.”
웅얼거리며 걸음을 옮긴 이혜정은 우선 무거운 커튼부터 젖혀버렸다. 그리고 바로 침대로 다가가 잠든 며느리 나나의 어깨를 흔들었다.
“얘, 그만 자고 일어나!”
“……?”
잠깐 실눈을 떴던 나나는 이내 얼굴을 우그러뜨리며 이불을 뒤집어썼다.
“참, 너같이 양심 없는 아이는 내 생전 처음이다. 어떻게 결혼하고 단 한 번을 시어머니보다 일찍 일어나는 꼴을 못 보니. 어서 일어나래도!”
이혜정이 나나가 뒤집어쓰고 있는 이불을 거칠게 잡아 끌어당겼다.
“아 정말! 왜 이러는데요! 아직 깜깜한데 뭘요?”
한동안 잠잠하더니 또 시작이네, *나 짜증 나, *발- 베개에 얼굴을 묻은 나나는 일어나기는커녕 마음에 있는 소리를 그대로 쏟아내며 몸을 웅크렸다.
“쯔쯔쯔, 입에 걸레를 물었어. 이 부회장은 너를 어떻게 이렇게 고약하게 키웠니. 어쨌든 오늘은 내가 봐준다. 어서 일어나지 못해! 오늘 당장 갈 데가 있어!”
길고 질긴 잔소리에 더 이상 눈을 감고 있지 못한 나나가 상체를 일으키며 소리를 꽥 질렀다.
“아악~~! 시끄러워서 죽겠네! 저 아프다고요! 몇 번을 말해요!!”
정말 고약한 게 누구인지 모르겠는 생각을 한 나나는 침대 아래로 떨어진 이불을 집으려고 손을 뻗었다.
“으이구…… 답답하기는.”
또 혀를 찬 이혜정이 발로 이불을 밟더니 근처에 있는 가운을 집어 냅다 나나의 얼굴에 집어 던졌다.
“악!!”
“그래! 아프지? 으슬으슬 추운 것도 같고, 여기저기 쑤시고 안 그래?”
“잘 아시는데 왜 이러는데요! 좀 자게 내버려 두 시라고요, 뭐가 또 불만이에요? 아버님한테 딴 여자라도 생겼어요? 뉴페이스?”
“말 같지 않은 소리 그만 지껄이고 병원 갈 거니까, 얼른 씻고 내려와. 간단하게 아침도 먹을 거야.”
“……뭐가요? 어디를 가요?”
“아, 병원! 몇 번을 말하게 해!”
.
.
약 3시간 후, 나나는 대학병원 산부인과 병동 vip 룸에 시체처럼 누워있었다.
“…….”
영혼이 빠져나간 눈을 하고 링거를 맞고 있는 그녀의 귀를 이혜정의 경박스러운 웃음소리가 후벼 팠다.
“그러니까요, 제가 예리하길 망정이지 큰일 날 뻔했어요.”
……망할. 이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임신이라니. 그것도 3개월이나 되었단다.
결혼 초반에 같이 방을 쓰지 못하겠다고 난리를 치던 차상윤. 나나라고 그와 같을 방을 쓰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우선 좁아터진 그 침대를 누구와 공유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차상윤과 한 침대에 누워본 경험은 셀 수 없을 정도였지만 그건 사랑이나 결혼, 뭐 그런 것과 전혀 관계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제 버릇 개 못준다고 하지 않았나. 상윤과 나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탐욕에 절은 불순한 마음으로 서로의 방에 숨어들었다.
결혼 전에도 하던 짓이라 둘 중 누구도 딱히 자신이나 상대를 탓하지도 않았다.
‘……3개월. 대체 언제지.’
맨 정신으로는 제가 처한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나나는 당연히 술에 의존했다. 그리고 자연스러운 수순처럼 취했다는 핑계로 차상윤의 침대로 기어들어 가곤 했다.
그런다고 스트레스가 풀릴 리는 없었다. 이혜정은 밤낮으로, 갖은 이유로 나나를 들들 볶아댔다.
왕나나 인생에 어울리지 않게 한복을 입고 난을 치기도 했다. 그 꼴이 어찌나 우습고 한심하기 짝이 없던지. 지금 생각해도 소름이 끼칠 정도다.
‘……미쳤지.’
저 여자도 미쳤고 나도 미쳤어. *발- 욕지거리를 씹어뱉은 나나는 언젠가 임신을 했다고 울고불고 난리를 치던 친구를 떠올렸다.
약혼자가 있는 상태인데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가진 상황이었다.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죽어버리겠다더니 정확하게 네 달 뒤 멀쩡하게 웨딩드레스를 입었다. 개미허리 뺨치게 가는 허리를 자랑하며 하던 말…….
[나중에 정보 필요하면 말만 해, 감쪽같더라? 자고 일어났더니 모든 근심이 사라졌더라고.]
[미친*, 좋기도 하겠다. 그러다 너 지옥 가는 거야! 나중? 내가 너냐? 병신 같은 실수나 하게?]
그때 나나는 배를 쥐고 웃었었다.
“…….”
“얘!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하게 하니?”
언제부터 지켜보고 있었는지 이혜정의 눈빛이 날카로웠지만 나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지옥에 가는 한이 있더라고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이미 지옥에 와있었다. 저 여자와 차 씨 집안에서 있다는 것 자체도 끔찍한데 임신까지 했으니 이게 지옥이 아니고 뭐겠는가.
마음이 이미 나쁜 쪽으로 굳어지고 있었다.
“…….”
“너, 그 머리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내가 한번 맞혀볼까?”
의기양양한 이혜정이 호로록거리며 차를 마시는데 그 모양새가 저는 다 알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시든가요, 관심 없어요.”
나나도 지지 않는다. 임신 같은 걸로 단번에 수그리고 어머니, 어머니 할 줄 아나- 콧방귀를 뀐 나나는 링거액이 얼마나 남았는지 올려다보았다.
쓸데없이 무슨 영양제.
“얘, 나나야.”
찻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은 이혜정이 며느리 이름을 부르는데 그 목소리가 어찌나 다정한지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어금니를 꽉 다문 나나는 미동도 없이 천장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저 미친 여자의 다음 멘트가 대충 예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
“경고하는데 허튼 생각은 꿈도 꾸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예상이 맞다. 시어머니의 음성은 그 어느 때보다 소름 끼칠 정도로 다정하기 그지없었다.
“너 오늘부터 내가 철저하게 관리 들어갈 거니까, 그렇게 알아. 당장 오늘부터 잠도 내 방에서 같이 자자꾸나.”
“네?? 뭐가요?”
이게 무슨 헛소리야- 나나의 커진 눈이 결국 이혜정을 향했다.
“뭘 놀라니? 내가 이제까지도 너를 예뻐했지만 오늘부터는 아예 신줏단지 모시듯 할 거야. 그렇게 알고 있어.”
아이라니. 어떻게 이런 행운이. 이혜정은 저절로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재벌 사돈을, 그것도 대(大) DL 그룹의 외동딸을 며느리로 얻었지만 아이라도 있어야 영원히 그 끈을 유지하지 않겠는가.
아들 녀석과 막돼먹은 며느리가 각방을 쓴다는 둥 뻗대는 바람에 걱정을 하기도 했지만 결국 영원한 돈줄을 잡은 셈이 됐다.
“너 그 입맛 없는 게 입덧이었잖니. 스트레스를 받아서 그렇다는 둥 어린애 같은 소리만 하더니. 먹고 싶은 거 있나 생각해 봐, 입맛 당기는 게 분명…….”
“없어! 그런 거 없다고요!!”
아아악- 나나의 새된 비명소리에 병실 문이 벌컥 열렸다.
***
“해피 뉴 이어.”
“응, 해피 뉴 이어.”
자정을 넘긴 시간, 재하는 도시 여기저기서 터지는 폭죽을 바라보는 은조를 뒤에서 껴안고 있었다.
“……멋지다. 눈이 부실 정도로 예쁘긴 한데, 좀 위험해 보여. 안 그래?”
“사고가 많다고 알고 있어.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 이제껏 관심 없었지만. 아무튼 저런데 근처에는 얼씬도 하면 안 돼.”
안은 팔에 더욱 힘을 주며 아빠 같은 소리를 하는 재하 때문에 은조는 픽 웃어버렸다.
“잠이 안 올 것 같아.”
“왜? 비행기 타는 거 부담스럽지? 컨디션 별로면 미루자.”
단번에 목소리 톤을 무겁게 바꾼 재하가 은조를 돌려세웠다.
“아냐, 어디 불편하고 그런 거 없어. 서울을 생각하니까…… 그냥 좀 떨려. 기분 좋은 긴장인가? 거기가, 진짜 내 집이잖아.”
“이제 우리 집이지. 실제로 보면 더 마음에 들 거야.”
고개를 끄덕인 은조는 재하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맞아, 우리 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