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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6. 서울 (2) (98/100)


외전 6. 서울 (2)
2023.05.08.



 
새벽 6시, 은조는 두 번째로 알렉시스 가(家)의 전용기에 올랐다.

재하의 손을 잡고 조심스럽게 탑승계단을 밟았다.

마지막으로 돌아본 뉴욕은 차갑고 파란 새벽의 얼굴로 그녀에게 작별을 고하고 있었다.


“막상 떠나려니 기분이 묘하네.”

같은 비행기를 타고 뉴욕으로 오던 때를 떠올린 은조는 여러 가지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 결혼을 하고 이렇게 남편의 손을 잡고 다시 이 비행기에 오르다니.


“언제든 오고 싶으면 올 수 있는 곳이야. 공기가 차다 어서 안으로 들어가자. 따듯한 차부터 한잔 준비하라고 해야겠어.”

뉴욕 따위에 관심 없는 재하가 차갑게 식은 은조의 뺨을 손으로 감쌌다.


“응.”

드디어 서울로 돌아가는 것이다.

.
.

은조가 캐머마일 차를 두 잔 마시는 동안 재하는 자다 깨서 기분이 별로인 다온이를 토닥였다.


“채린이가 선물을 받으면 굉장히 좋아할 거야? 그렇지?”

“……네.”

시큰둥하다. 재하가 다온이를 부추겨 준비한 선물은 한두 개가 아니었다. 꼬마 숙녀는 굉장히 좋아하면서 동시에 굉장히 놀랄 것이 분명하다.


“우리, 카드를 하나 만들까? 네 마음을 담은 짧은 편지를 쓰는 거지. 아빠가 도와줄게.”

“……릴리는 언제 오는 거예요?”

결국 그게 문제였군. 은조를 바라보는 재하의 눈빛이 그렇게 말했다.

릴리는 최근 슬개골 탈구 초기를 진단받았다. 한국으로 가기 전에 다니던 병원에서 수술적 교정을 받기로 했기 때문에 다온이와 일시적 이별 중이었다.


“윤다온, 릴리가 좋은 병원에서 치료받고 건강해져서 오는 게 너도 좋다고 했잖아. 보고 싶어도 조금 참아.”

“힝- 릴리가 없으면 잠이 안 온단 말이야.”

“졸리면 눈을 꾹 감아 봐, 아니면 엄마한테 와서 필립이랑 이야기 좀 하든가.”

동생의 존재를 인정했다가 말았다가를 반복하는 다온이가 얼굴 가득 불만을 담았다. 괜히 졸려서 심술을 부리는 것을 은조는 잘 안다.

민아가 있었다면 둘이 투덕거렸을 거다.


“아들! 릴리가 최대한 빠르게 서울로 올 수 있도록 할 거야, 아빠가 약속할게.”

“네.”

은조가 다온이를 향해 곱게 눈을 흘겼다. 이제 그냥 ‘아들’이나 ‘아빠’라는 단어는 마법의 단어가 되었다.

재하가 은근한 저음으로 아들, 아들, 아빠가, 아빠가-를 붙이면 맹목적인 믿음이 샘솟는지 골이 났던 얼굴도 금방 풀어진다.

따듯한 차를 넘긴 은조는 새삼 인연(因緣)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재하를 아들로 삼은 숀 알렉시스. 이국에서 온 소년을 손자로 받아들인 제니스와 카일.

그리고 동생이 낳은 아이를 아들로 키우게 된 자신.

사랑하게 된 여자의 아이를 아끼는 최선우.

은조는 재하와 함께 채린이에게 줄 카드를 만들며 귀여운 표정을 짓는 아이를 바라보았다.

막 태어나서 핏덩어리 같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만감이 교차했다.

민아의 앞날을 생각해서 자신의 호적에 올렸지만 동생의 아들, 조카라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누가 뭐래도 다온이는 온전히 윤은조의 아들이다.

그게 결론이었다.

은조는 민아와 아이의 문제를 두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물론 선우와 재하에게도 의견을 물었고 아이에게 최선의 결론을 낼 수 있도록 노력했다.
 


[아무래도 하루아침에 이모가 엄마다- 그건 말이 안 된다고 봐요. 법적인 것이 중요할까요? 물론 민아의 아쉬운 마음도 잘 알지만 아이에게 혼란을 겪게 하는 게 저는 더 마음이 아플 것 같아요.]

 
처음부터 다온이를 제 아들처럼 대했던 선우는 조심스러웠다.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다온이는 아직 어려. 낳았다고 부모가 되는 건 아냐. 은조 네가 엄마로서 키웠으니 앞으로도 그렇게 해야 하는 게 맞지 않을까. 물론 언젠가는 처제가 생모라는 걸 말해 줘야겠지.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는 정도의 나이가 되면 말이야. 솔직히 미국적인 사고로는 그렇게 복잡한 게 아닌데, 막상 내 일이 되고 보니 생각이 많아지긴 하네. 그리고…… 이건 어디까지나 참고로 말해두는 건데, 나는 최선을 다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어. 무조건적으로 네 결정을 따를 거지만 알고 있으라고 하는 얘기야.]

 
재하는 적극적이었다. 선우만큼이나 다온이를 아끼는 그는 처음부터 아이의 아빠가 되지 못해 안달이었으니까.

내내 말을 아끼던 민아는 짧게 결론을 지었다.
 


[언니랑 떼어 놓으면 다온이는 울 거야. 언니도 그렇고.]

 
윤은조가 윤다온의 엄마가 맞는다고 말한 민아는 눈가를 문지르더니 작게 덧붙였다- 언니, 고마워.


“…….”

작은 종이에 글씨를 꾹꾹 눌러쓰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은 재하가 은조로 보고 씩 웃었다.


“남자한테 첫사랑은 아주 의미가 있지. 그 순수한 설렘, 살얼음판 위를 걷는 것 같은 긴장과…….”

“조심스럽게 쏟은 정성과 에너지? 그런데 내 기억에 오빠는 조심스럽지는 않았어. 10살이지만 매우 적극적인 계략 소년이었지. 아냐? 아무튼 첫사랑에 대한 그 얘기는 이번으로 백 이른 아홉 번째야.”

은조가 과장되게 이마를 짚는 시늉을 했다.


“엄마, 사랑은 자주 표현할수록 좋은 거라고 제니스 할머니가 말했어. 특히 뽀뽀를 하거나 안아주거나 칭찬을 해주면 최고래.”

“아아- 그렇구나. 전부 엄마가 너한테 하는 거네, 그렇지? 너는 요즘 릴리한테만 했고.”

“엄마는 필립만 사랑하잖아!”

“…….”

할 말을 잃은 은조의 표정이 난처함 그 자체다. 아니라고 반박을 해야 하는데 찔리는 면이 없지 않아 있어 말문이 막혔다.


“그리고 나는 능금이가 더 좋아!”

“너, 너 능금이를 아직 만난 적도 없잖아. 지금 필립이 듣고 있는 거 알지?”

흥- 쪼그만 게 어깨를 으쓱하더니 상관없다는 듯 건방진 표정을 지었다.

은조의 눈이 동그래졌다. 재하를 보고 배운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아빠, 채린이에게 선물 줄 때 꼭 같이 가는 거예요. 채린이 아빠는 키도 작고 뚱뚱한데- 히힣- 신난다!”

“다온아, 그렇게 말하는 거 아냐. 채린이 아빠는 컴퓨터를 엄청 잘하시잖아. 그래서 멋있다고 했었던 거 같은데 아니야?”

“……맞아.”

“은조야, 컴퓨터라면 뭐? 어떤 거? 나도 잘하는데.”

“맞아! 내 아빠는 부자야! 그리고 키가 크고 멋있어! 하아암~~.”

은조는 터지려는 웃음을 참았다. 뒤에 하품이 따라붙지 않았다면 재하가 또 눈시울을 붉혔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자, 윤다온. 멋진 아빠랑 침실로 가 볼까? 엄마와 필립한테 인사하고.”

“네.”

자리에서 일어선 아이가 은조에게로 와 안겼다.


“엄마 사랑해.”

“응, 엄마도 아들 사랑해.”

은조가 눈으로 자신의 둥그런 배를 가리켰다.


“필립, 형은 조금만 자고 올게- 너도 코 자-.”

은조의 배 가까이에 얼굴을 댄 다온이가 속삭였다.


 

.
.

아이와 남편이 자리를 뜨자 고요가 찾아왔다.

필요한 게 있는지 물으러 온 승무원은 숨소리도 내지 않고 움직였다. 넓은 의자가 참 편하다고 생각했었는데 깜박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비행기의 엔진 소리일게 분명한 작은 소음이 은조를 잠으로 이끌었던 것 같다.


“…….”

눈을 반쯤 뜬 은조는 도톰하고 보드라운 담요의 감촉을 느꼈다. 턱 아래까지 폭 덮여있는 게 꼭 애벌레 같은 모양이다.

맞은편 의자에 앉아 노트북과 서류를 번갈아 살피는 재하의 얼굴이 보였다. 눈빛이 서늘하고 날카롭다.

그는 다시 블랙스톤 파트너스의 한국 지사 대표로 돌아갈 것이다.

은조에게는 언젠가 그에게 하고 싶은 질문이 하나 있었다.

어릴 적 해바라기 언덕에서 한번 꺼냈다가 본전도 건지지 못한 민감한 질문. 왠지, 지금이 다시 그 질문을 꺼내도 될, 꺼내야만 될 순간인 것 같았다.

언젠가 반드시 한 번은 해야 한다. 그를 위해서.


“…….”

은조가 마른 입술을 혀로 살짝 핥은 순간.


“깼어? 안 불편해? 오빠가 침대로 옮겨줄까?”

쓸데없이 그윽한 미소를 만든 재하가 이마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하…… 제발.”

“으응? 뭐가, 달링?”

“그 표정, 몸짓 뭔지 잘 알아. 여기 비행기야. 그러지 마.”

흘러내린 담요를 무릎에서 접은 은조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비행기 맞지, 내 비행기. 침대칸도 세 개나 더 있고 뭐가 문제야?”

이제 대놓고 능글거리는 미소까지 장착했다.


“피, 필립이 듣는다고 말했지!”

“엄마가 즐거우면 아들도 즐거운 거라고 말했지!”

“권재하!”

“……흠.”

낮은 탄식을 뱉은 재하가 눈을 지그시 감았다.

어어- 저건 위험 신호다. 이게 아닌데- 은조는 실수를 깨달았다. 왜 변태같이 제 이름을 불러주는 것에 흥분을 하는지 모를 일이다.


“있잖아, 같이 와인 한잔할까?”

“의미가 좋다. 오케이.”

“아니- 무슨 의미? 그런 거 아냐! 난 당연히 입술만 적실 거고 오, 오빠가 좀 마셨으면 해서.”

“오케이.”

제멋대로 해석한 그가 한쪽 눈썹 끝을 들썩거렸다.

그리고 단 몇 분도 안 되어 꽃과 과일 향기가 환상적인 와인 잔이 두 사람 사이의 테이블에 놓였다. 언젠가 맛을 보고 반했던 치즈도 따라왔다.


“……나 전부터 궁금한 게 있는데, 오늘은 꼭 물어봐야겠어.”

“그래, 우리 은조가 작정했구나. 얼마든지.”

여유로운 얼굴로 와인 잔을 돌리는 재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턱 아래에 둔 유리잔에서 올라오는 향기를 들이마신 은조는 잠깐 눈을 감았다가 떴다.


“왜, 부모님을 찾지 않았어?”

느긋하던 재하의 움직임이 단번에 멈추었다. 부드러운 미소는 연기처럼 사라져버렸다.


“…….”

“살아 계실지도 모르잖아.”

“은조야. 그 얘기는 하고 싶지 않다고 전에도 말한 것 같은데.”

남자의 얼굴에 자연스러운 게 아닌, 아내를 배려한 옅은 미소가 만들어졌다.

예전에는 물러섰었다. 스물한 살에는 급작스럽게 변하는 그의 표정이 두렵기까지 했으니까. 어쩌면 벌써 알아보았지만 말하기 싫은 거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아닌 걸 얼마 전에 확실히 알았다.
 


[나는 이제라도 재하가 마음을 바꿨으면 좋겠어. 은조와 아이들이라는 축복을 얻었으니 이제 저를 낳아준 부모가 누구인지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는 알아야 하지 않을까. 그 애의 마음에 분노의 찌꺼기 따위는 더 이상 필요 없을 것 같아.]

 
은조도 제니스의 말에 동감했다.


“내가, 궁금해. 권재하를 낳아주신 부모님들이 어떤 분들이신지 살아는 계시는지 알고 싶어.”

하지만 쉽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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