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7. 서울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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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7. 서울 (3)
2023.05.11.
어린 재하가 본 아이들은 그랬다.
대부분 쉽게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잠깐은 저를 낯선 곳에 두고 간, 정확하게 말하면 버리고 간, 부모를 잊고 보살펴주는 이들의 품에서 평온을 찾기도 했지만 그런 시간은 짧았다.
잠이 들기 전이나 잠에서 깨었을 때, 혹은 잘 놀다가도 문득 문득 서러운 울음을 터트리기 일쑤였다.
말문이 트이기 전인 어린 아기들이나 정확하게 ‘엄마’소리를 하는 아이들이나 모두 마찬가지였다.
제 어미의 냄새를 쉽게 잊지 못한다고 혀를 차는 어느 봉사자의 이야기를 들었다.
어미의 냄새?
어린 재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엄마의 냄새?
물론 아이들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냄새는커녕 얼굴도 잊어버리는 경우가 허다했지만.
소년에게 그런 기억은 처음부터 없었다.
재하는 갓난아이로 해바라기 언덕에 들어왔다.
‘권’이라는 성(姓)은 신부님의 것을 따라고 ‘재하’라는 이름은 신부님과 수녀님이 상의해서 지어주셨다고 했다.
얼어 죽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로 꽤 추웠던 날이었다고 말하던 수녀님은 대견하가는 듯 재하의 머리를 쓰다듬으셨다.
버릴 때 버리더라도 아기를 감싼 이불이 너무 얇았다는 소리였다. 한겨울이었기 때문이다.
버린 게 아니라 죽기를 바랐을지도 모르지- 지나칠 정도로 똑똑하고 세상을 일찍 알아버린 소년은 그런 생각도 했었다.
원장 수녀님은 재하가 네 살이 될 무렵부터 다른 아이들보다 똑똑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봉사 오는 대학생 하나를 붙여 주시기도 했다.
착실한 그 대학생은 졸업 전까지 3년 동안 해바라기 언덕을 찾아왔고 재하의 공부를 봐주는데 정성을 들였다.
[특히 숫자에 대해 이해가 빠르고 정말 똑똑해요. 꼭 책을 많이 읽게 수녀님이 도와주세요.]
그렇게 말하던 누나의 얼굴을 잊을 수가 없었다.
안됐어, 가엾다- 이전의 다른 이들이 보내는 눈빛과 같았지만 일곱 살 재하는 이미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너무 빨리 세상을, 사람들의 감정을, 제게 보내는 눈빛의 의미를 알아버린 것이다.
그건 이별이었다.
[누나가 취직을 했어. 당분간은 못 올 것 같아, 그래서 이거 주려고. 우리 재하 공부 더 열심히 하고 약속대로 책도 많이 읽어야 돼.]
고개를 끄덕인 소년의 손에 책가방이 든 종이 가방이 쥐어졌다.
충분히 울만한 상황이었지만, 누나를 잘 따르고 오랜 시간 보아 와서 정도 든 것 같았지만.
꾹 다문 입술을 한 어린 소년은 울지 않았다.
눈가를 붉히며 돌아선 대학생 누나의 뒷모습을 그저 한동안 바라보기만 했다. ‘당분간’은 분명 ‘영원히’가 될 것을 예감했지만 울음은 꾹 참았다.
[…….]
은조를 만났을 때는 열 살이었다.
귀여운 옷을 입고 더 귀여운 얼굴로 방긋 웃으며 저를 쳐다보는 소년에게 손 인사를 하던 계집애.
멀찍이 서서 그 얼굴을 바라보던 재하는 웃지 않았다. 인사를 돌려주지도 않았다. 또 보게 될 거니까. 앞으로 같이 살 게 될 테니까.
해바라기 언덕, 원장 수녀님의 방으로 들어가는 아이들의 미래에 대해 소년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
아이를 데리고 온 부모라는 사람들 중 열에 아홉은 아이를 방에 남기고 떠난다.
더 웃기는 것은 당장은 다시 제 부모의 손을 잡고 그 방을 나온 아이도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돌아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이었다.
재하는 소녀가 들어간 원장실 밖을 한참이나 지켰다.
그리고 역시나 혼자 나오는 여인, 소녀의 엄마를 보았다. 파리한 얼굴로 눈물을 훔치며 달아나는 모습이 소녀의 앞날을 얘기해주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곧바로 울먹이는 소녀가 부원장 수녀님의 손에 이끌려 방을 나왔다.
이제 아이가 지낼 방을 보여 주겠지. 낡았지만 제일 좋은 인형을 안겨 줄 거고. 눈물을 그치고 인형을 안으면 달콤한 카스텔라를 줄 거야.
아이답지 않게 건조한 눈을 한 재하는 열려있는 원장실 앞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놈의 돈이 원수지. 아프기 전에는 꽤나 고왔을 얼굴인데 불쌍해서 어째. 남편은 없어도 돈만 많았어 봐, 병도 고치고 팔자를 고쳐도 열두 번은 고치겠구먼.]
해바라기 언덕에서 원장님을 도와 살림을 하시는 아주머니가 끌끌 혀를 찼다.
입조심 하라는 원장수녀님 말씀이 뒤를 이었지만 아주머니의 말이 옳은 소리라는 걸 재하는 알았다.
지난 10년 동안 꾸준히 들어온 말이었기 때문이다. 수녀님들이든 봉사자들이든 둘이든 셋이든 혹은 혼잣소리로도 어른들이 자주하던 말.
‘돈만 있었으면.’
돈. 돈, 돈만 있으면…… 헤어질 일도 울 일도 없다. 되새기며 돌아서는데.
역시나 제 옷이랑 비슷한 꽃무늬 드레스를 입은 인형을 안고 나오는 소녀가 보였다.
[어, 재하야! 동생이 새로 왔는데 인사할래?]
네- 재하가 고개를 끄덕였지만 아기같이 엄지손가락을 입에 물고 있는 계집애는 그럴 마음이 아니었다.
부원장 수녀님의 뒤로 숨어 버리더니 훌쩍훌쩍 울음소리를 냈다.
아까 웃는 거 되게 예뻤는데…….
[아휴, 은조가 아직 수줍은가 보다. 그렇지?]
은조. 이름이 은조구나.
[빵을 주실 거죠, 수녀님?]
[어떻게 알았어, 우리 똑똑이! 같이 가고 싶어?]
[네, 같이 갈래요.]
소년은 정확하고 똑 부러지게 제 의사를 전달했고 어색하고 눈물이 떨어지는 발걸음을 같이 했다.
하지만…… 예상보다 더 나빴다.
계집애는 이제까지 본 울보 중 최고였다!
수도꼭지처럼 눈물을 줄줄 흘렸는데 꼴에 고집은 얼마나 센지 결국에는 안고 있던 인형마저 내동댕이치고 목청껏 울어댔다.
한두 번 겪어보는 일이 아닌 광경에 수녀님은 다소 태연한 모습을 보였는데 웬일인지 재하는 그러지 못했다.
얼마 전 차에 치여 다리가 부러진 강아지를 보고 눈물이 찔끔 나왔었는데, 또…… 그때 같은 심정이 되었다.
저도 모르게 테이블 맞은편으로 건너가 소녀의 눈물을 훔쳐 주었다.
이미 퉁퉁 부은 눈을 하고 엉엉 울며 엄마- 엄마- 소리를 하는데 그 모습이 불쌍하면서도 예뻤다.
기분이 이상했다.
[수녀님, 숀처럼 부자들은 정말로 울 일이 없어요?]
누가 제 눈물을 닦아주거나 말거나, 관심도 없을게 분명한 소녀를 바라보며 재하가 한 말이다.
[누구? 숀 알렉시스 대사님? 미국에서 오신 대사님을 말하는 거야?]
[네, 숀이라고 부르라고 하셨어요. 그리고 어른들이 숀은 되게 부자라고 말하는 걸 들었어요.]
[음- 수녀님 생각에 대사님은 부자가 아니어도 원래 잘 웃으시는 분 같아. 하지만- 글쎄…….]
똑똑이는 몰라서 질문을 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수녀님이 조심스럽게 말을 아낀다는 것도 알았다.
돈이 많으면 자식을 내다 버리지는 않았겠지.
돈이 많으면 결국 헤어질 일도, 울 일도 없는 게 맞다.
[저는 부자가 될 거예요. 숀보다 더 부자가 될래요.]
[그럼! 우리 똑똑이 큰~ 부자가 돼서 여기 동생들도 도와주고 그래야지, 아무렴!]
기운이 떨어졌는지 울음이 잦아든 계집애가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재하는 얼른 포크를 집어 작은 손에 쥐여 주었다.
은조- 예쁜 이름을 불러 주고 싶었지만 조금 부끄러웠다.
[먹어 봐, 이거 되게 맛있어.]
2002년 06월 20일이었다.
***
“써프라이즈!”
빈 집인 줄 알고 들어 선 집에 에디와 이연경이 있었다.
반갑게 집 주인 부부를 맞이한 연경은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재하는 얼굴부터 구겼다.
“새집 티 안 나게 썰렁한 기운을 없애랬지 누가 이렇게 난장을 치라고 했어?”
welcome home- 벽에는 길고 알록달록한 가랜드가 붙어있고 리본 꼬리를 단 풍선들이 공중에 떠 있었다.
“와!!”
재하와 다르게 환호성을 지른 다온이는 바로 잡을 수 있을 법한 풍선을 향해 달려갔다.
“헐- 에디, 내 말이 맞지? 남의 노력을 몰라주는 클라이언트는 버리고 나는 이제 윤다온 씨랑 일해야겠어.”
“어서들 오세요, 냉장고를 채우느라 여태 있었는데 저희 곧 나갈 겁니다.”
“그래, 나가서 데이트를 하든지 다른 거 더 좋은걸 하든지, 제발.”
“오빠, 왜 그래-.”
은조가 부드럽게 재하를 말렸다.
“녜?? 오, 빠, 라고요?? 대애박!!!”
이연경이 놀리듯 재하를 바라보며 입을 크게 벌렸다.
“야, 까불지 말고…….”
“은조 씨- 아니, 이제 언니라고 부를까요? 와! 이게 얼마만이야! 안아보고 싶은데- 그-.”
은조는 머뭇거리는 연경 때문에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보다 너무 다른 모습인건 분명하니까.
“안아도 아무 일 안 일어나요!”
은조가 먼저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너무 고마워요. 이번에는 집을 어떻게 꾸몄을지 기대가 커요, 당장 구경하고 싶은데…… 일단 같이 뭐 좀 먹을 까요?”
“아, 그래! 은조가 매콤한 찜닭 먹고 싶댔어, 아는데 있지? 주문 좀 해 줘.”
방금 전엔 사라지라 더니- 겉옷을 벗는 재하를 향해 연경이 눈을 흘겼다.
.
.
은조는 연경과 이야기를 나누며 천천히 매운 찜닭을 나눠 먹었다.
재하는 먼저 식사를 끝낸 다온이를 씻기고 재우겠다고 2층으로 올라갔고 에디는 재하의 부탁으로 정신없는 파타 용품들을 치우는 중이었다.
풍선을 폭, 작은 소리로 요령껏 잘도 터뜨리는 에디를 바라보던 은조가 문득 그를 불렀다.
“저기, 강 비서님.”
“그냥 에디라고 부르세요, 아님 제가 사모님이라고 부를 겁니다.”
“에디, 제가 부탁 좀 드릴게 있어요. 권재하 씨 모르게요.”
“벌써 비밀이 생긴 거예요? 저는요? 자리, 피해드릴까요?”
“아뇨, 연경 씨가 알아서 문제 될 건 없는데…….”
은조가 2층으로 뻗은 계단을 슬쩍 바라보았다.
“말씀하세요, 여태 잘 웃으시다가 갑자기 심각한 표정을 지으셔서 저 긴장됩니다.”
하던 일을 멈춘 에디가 두 여자가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젓가락을 내려놓고 콜라를 한 모금 마신 은조는 빠르게 하고 싶은 말을 전했다.
그가 모르게 그의 부모님에 대해 알아봐 달라고. 이런 걸 부탁할 사람이 있는 걸 방금 알았다고. 결과를 알고 나서 그에게 알릴지 말지 결정해야 할 때도 도와 달라고.
“에디도 연경 씨도 도와 줘요. 가족 같은 사이잖아요, 맞죠?”
단번에 모든 것을 이해한 에디가 고개를 끄덕이는데.
“셋이 붙어서 뭐해?”
재하가 나타났고,
“오빠, 빨리 와! 넷이 붙어서 놀자, 응?”
은조가 환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