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8. 서울 (4) (完) (100/100)


외전 8. 서울 (4) (完)
2023.05.15.



 
5월, 사과 꽃이 흐드러지게 피었을 봄날.

능금이가 세상 밖으로 나왔다!

예정일보다 2주 빠른 출산이었지만 산모도 아기도 건강했다.

선우가 찍어 보낸 아기의 얼굴을 본 다온이와 재하의 반응은 은조를 즐겁게 했다.

웩- 아이답게 지나치게 솔직한 반응을 보인 다온이는 다소 겁을 먹은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귀, 귀엽네- 눈썹을 치켜세우고 잠시 뜸을 들인 재하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다.


[갓난아기는 무섭지도 귀엽지도 않아. 신기할 뿐이지. 다온아, 너도 이렇게 생겼었어!]

[거짓말! 능금이는 너무 빨개!]

[……신기하긴 하네.]

[우리 필립도 크게 다르지 않을 거야, 각오들 해두세요!]

재하와 다온이는 난감한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리고 정확하게 2주 뒤, 은조는 꼬박 24시간 동안 난생처음 겪어보는 통증에 시달리다가 필립을 낳았다.

긴 진통을 이겨낸 것은 은조였는데 초주검이 된 것은 재하였다.

흐트러진 머리에 창백하게 질린 얼굴을 한 그가 필립을 품에 안고 말했다.


[우, 우리 필립이 능금이 보다 훨씬 예쁘잖아! 하나도 똑같지 않아!]

[……뭐?]

맙소사- 은조는 아직도 아픈 배를 잡고 웃었다.

하지만 필립의 사진을 본 민아의 반응에 은조는 제 아들의 얼굴을 한참이나 뚫어지게 구석구석 살펴보기도 했다.


[뭐야! 갓난아기 주제에 그 높은 콧대는 뭔데! 보정한 사진이야? 장난치지 마, 언니!]

민아가 괜히 발을 동동 구르는 게 느껴졌다.

권필립이 처음으로 여자의 마음을 아리게 한순간이었다.

뭐, 이모여도 여자는 여자니까.

***

시간은 빠르게 흘렀고 필립은 누가 보아도 재하의 축소판임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높은 콧대는 기본이었고 까맣고 큰 눈망울을 담은 눈. 싫고 좋은 것을 분명하게 표현해 주는 야무진 입매까지. 손과 발 모양도 제 아빠를 그대로 닮았다.

가끔 은조는 그것에 대해 불만을 표시했는데 재하의 반응은 늘 똑같았다.

딸은 너랑 똑같을 거니까 걱정 말라고.

은조의 반응도 항상 같았다.


[두 번 다시 그런 고통을 겪을 생각은 없어, 진심이야! 아이는 둘로 충분해, 꿈도 꾸지 마!]

하지만 늦게 출근하고 일찍 퇴근하는 아빠 권재하. 필립을 목욕시키고 안아서 재우는데 불평불만이라고는 일절 없는 그를 보면서 딸이 하나 있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문제는 절대 선택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에- 집안에 남자만 넷이 된다면- 상상만으로도, 음…….

***

여름이 성큼 다가온 어느 날, 은조의 집에 에디가 찾아왔다.

거실 통창 밖으로 푸른 잔디를 적시는 비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평온했다.

시원한 아이스티를 테이블에 내려놓은 은조가 물었다.


“강의는 재미있어요? 학생들한테 인기 많다고 들었어요.”

“나쁘진 않은데, 솔직히 형과 일했을 때가 그립기도 해요.”

필립이 잠들어있는 걸 아쉬워한 그는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차분한 목소리로 자신이 알아낸 이야기를 들려준 에디는 전화번호와 사진 한 장을 건넸다.


“적당한 타이밍에 형수님이 이야기를 꺼내셔도 무리가 없을 것 같아요. 제 생각에 현재 카일의 상태는 최고로 안정적이거든요.”

“……네.”

세상을 촉촉하게 적신 비가 은조의 마음에도 내렸다.

강요는 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재하가 오랜 시간 가슴에 품고 있을 미움과 분노, 원망과 슬픔을 이제 그만 떠나보낼 수 있게 보듬어 줄 것이다.

***

며칠 뒤 새벽.

빈 옆자리를 본 은조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필립이 있는 방으로 향했다.


“…….”

반 정도 열린 문가에 서자 재하의 너른 등이 보였다.

필립을 품에 안은 그는 느린 왈츠를 추는 것처럼 우아하고 조심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낮고 그윽한 목소리로 속삭이듯 오래된 사랑 노래를 부르는 그 모습에 코끝이 찡했다.


“……자기야.”

한동안 적당한 시기만 노리던 은조는 그런 때는 없다는 걸 깨달았다.


“어, 왜 깼어? 가서 더 자.”

“괜찮아 실컷 잤어. 음- 나 거실에 있을 게, 필립 눕히고 올래?”

“할 얘기 있구나? 그래, 금방 갈게.”

엷은 미소를 짓는 남편을 바라보던 은조는 바로 돌아섰다.

.
.



“왜 서 있어?”

피아노 앞에 서있는 은조는 재하의 목소리에 손에 들고 있던 무언가를 가슴으로 쪽으로 끌어당겼다.


“아, 놀래라.”

“그게 뭐야?”

“권재하 씨. 자기야, 일단 좀 앉을래?”

“내가 기절이라도 할까 봐? 이리 내, 뭔데 표정이 그래?”

은조는 제 손에 있던 것을 빼앗아가는 재하를 말리지 않았다.


“뭐야, 사진이네. 누군데- 액자에 넣었어.”

“내, 내가 사랑하는 분들. 우리 가족사진 옆에 둘 거야! 여기.”

은조가 피아노 위에 놓인 여러 개의 사진 중 결혼식 사진 옆을 콕 집어 가리켰다.


“이 남자랑, 임신한 여자가 누군데?”

어- 그게- 잠깐 망설이던 은조가 재하의 눈을 바라보았다.


“일단 사과부터 할게. 미안해, 내가 자기 모르게 알아봤어. 그, 그 두 분은…… 자기 부모님이야. 그 사진에 당신도 있어.”

“……?”

“잘 봐. 그분 얼굴에 자기가 있고 필립이 있어. 자기는, 엄마보다 아버지를 닮았어. 우리 필립처럼.”

“……윤은 조, 너.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왜 말이 안 돼? 나는 우리가. 아니, 자기가 지나간 모든 일들에 대해 알고 버려야 할 건 버리고, 인정해야 할 건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했어! 권재하는 버려진 아이니까, 무슨 이유건 아이를 버린 부모는 부모도 아니니까, 그냥 없었던 일처럼 외면하는 건, 옳지 않아!”

숨이 턱까지 차오른 은조를 바라보는 재하의 표정이 담담하다.


“난 네가 쓸데없이 흥분해서 우리 필립을 깨우는 게 더 옳지 않다고 봐.”

“권재하! 난 진지해! 당신은 버려진 적 없어! 부모님은 당신을 살렸고, 삼촌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했을 뿐이야. 이제 다 이야기할 거야!”

“이미 다 말한 것 같은데. 나 삼촌까지 있는 거야? 어디에, 살아는 있고?”

“당신이 찾지 않은 덕분에 열악한 요양원에 계셔! 게다가 자신은 핏덩어리 조카를 버. 린. 죄인이라고 생각하신대. 만족해?”

현기증을 느낀 은조는 끙- 앓는 소리를 내며 피아노 의자에 주저앉았다.


“새벽부터 폭탄을 투척하시네. 미세스 알렉시스.”

손에 든 사진을 찬찬히 뜯어보는 재하. 은조는 생각해 두었던 말들을 마저 쏟아냈다.


“권재하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30년 넘도록 원망과 분노를 끌어안고 산거야. 용기를 낸 나한테 고마워해야 해. 이제 진짜 성숙한 남자로, 아이들의 아빠로, 한가정의 가장으로…….”

“그만. 출마 연설 같은 건 거기까지 하고 아는 걸 제대로 알아듣게 말해 봐, 달링.”

은조는 재하가 들고 있던 액자를 피아노 위, 그녀가 말한 그 자리에 조심스럽게 놓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안도의 숨이 나왔다.


“……사고였대.”

은조는 옆으로 와 앉은 재하의 손을 잡았다.

어찌 보면 흔한 일일수도 있다. 가장 행복할 때 찾아온 불행.

크리스마스 즈음 남자는 만삭의 아내를 태우고 운전 중이었다. 혼자 지내는 몸이 불편한 형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맞은편에서 오던 차가 그들을 덮쳤다. 얼어붙은 도로에서 미끄러진 것이다.

남자는 아내를 온몸으로 감쌌다. 하지만 목숨을 건지건 아기뿐이었고 그 아기 곁에는 한쪽 팔과 다리가 불편한 삼촌이 전부였다.

다시 연락을 주겠다던 여자 쪽 부모는 결국 나타나지 않았다.


“……정말 별거 없네.”

아주 담담하게 말한 남편의 어깨에 은조는 가만히 머리를 기댔다.


“있잖아, 나한테는 아주 큰 의미가 있어. 실은 자기가 세상에 온 날을…… 정확하게 알게 됐거든. 이제 내가 그날 제일 먼저 축하해 주고 입 맞춰 줄 거야…… 그다음엔 다온이, 그다음엔 필립. 나는 그거면 충분해. 나머지는 자기 뜻대로 해. 더 알아봐도 그만 알아봐도 아무 상관없어, 이제.”

은조의 목소리에 기쁨과 슬픔이 섞여있었다.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재하가 아내의 이마에 입술을 누르더니 한마디 던졌다.


“열악한 요양원이라고 이미 나를 낚았잖아. 아냐?”

“눈치챘네- 자기가 안가면 나라도 뵈러 갈 거야. 물론 혼자는 아니고 작은 남자 둘 데리고.”

사랑해, 오빠- 재하의 품을 파고드는 은조가 속삭였다.

사랑하는 남자의 가슴속에 남아있던 마지막 가시 하나를 그렇게 부러뜨렸다.

***

창문을 내리자 가을의 향기가 자동차 안에 가득 퍼졌다.

풀냄새와 흙냄새. 눈을 감은 은조는 싱그러운 공기를 들이마셨다.

서울을 벗어난 지 30분 정도 되었다.

재하와 다온이는 함께 태블릿을 보고 있었다.

둘은 곧잘 영어로 대화를 나누는데 물론 재하의 생각이다. 불어가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은조는 조만간 남편에게 한마디 할 생각이다. 그의 교육열은 지나치다.


“어디 가는지 정말 안 알려 줄 거야?”

이미 눈치 채고 있는 은조가 넌지시 물었다.

그가 서울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최고 시설을 갖춘 요양원을 찾아본 사실을 알고 있다.


“응, 가보면 알아. 근데 자기 혹시 향수 뿌렸어?”

아침부터 코를 찡긋거리는 재하가 은조를 보며 또 그런다.


“아니, 내가 그런 거 뿌릴 여유가 어디 있어. 무슨 좋은 향기가 나? 공기가 너무 좋기는 해.”

태블릿을 넘기는 다온이의 머리를 쓰다듬은 재하가 미간을 살짝 좁혔다.


“재밌네. 새벽에 너무 생생한 꿈을 꿨거든, 근데 이상한 건 계속 그 꿈속에 있는 거 같다는 거야. 꽃향기가- 아니다,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네.”

“무슨 꿈인데?”

“천지가 온통 꽃밭이고 달큼한 향기가 진동을 하는데- 분홍색 꽃잎이 비처럼 내렸어. 큰 계약을 할 일이 있는데 그거랑 상관있나.”

하, 재하는 어이없다는 듯 웃었지만 은조의 얼굴은 달아올랐다.


“…….”

“필립 이리 줘, 요즘 되게 무겁지?”

“어? 어, 그래…….”

설마, 아닐 거야. 그럴 리가 없어. 절대 아냐.


“은조야, 이미 눈치챈 거 같은데 긴장할 필요 없어.”

“어? 뭐, 뭐가?”

“빠- 빠빠-”

필립이 끼어들었다.


“어, 봐! 또 하잖아! 내가 분명 아빠라고 했다니까 아무도 안 믿었지?”

[대디, 필립은 빠-라고 했어요. 분명히 빠-예요.]

[아들, 빠-나 아빠-나 같은 거야, 왜냐하면 필립은 이제 5개월이잖아!]

[아무튼 ‘아빠’보다는 ‘대디’라고 영어를 가르치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요.]

“그래? 달링 생각은 어때?”

“하…… 몰라, 달링은 속이 불편해. 다온아 삼촌 할아버지 앞에서 영어로 말하면 예의 없는 어린이야, 알았지?”

[오케이, 마미!]

맙소사- 이마를 짚은 은조는 자동차 창문을 더 내렸다.

시원한 공기를 깊게 들이마시자 들썩이던 가슴이 진정되었다. 잠깐이지만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한 자신이 멋쩍게 느껴졌다.

절대 그럴 리 없지만.

만약에 그렇대도 그건 분명 기뻐해야 할 일이다. 물론 딸이라는 가정하에 말이다!

가만히 눈을 접어 웃은 은조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눈이 부실 정도로 새파란 하늘이 참 예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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