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아직 내 아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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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아직 내 아내니까
2022.08.04.
‘뭔가 이상해. 이렇게 나를 쉽게 놓아줄 은지연이 아닌데.’
민우는 차에 탄 뒤 떨떠름한 표정으로 잠시 앉아 있었다.
그에 관해서는 무한의 애정을 가지고 집착에 가까운 행동을 하던 은지연이었기에, 자신이 어떻게 행동을 하든 붙잡고 질척거릴 것이 눈에 선했었다.
그랬던 그녀가 이렇게 먼저 이혼 서류를 내밀다니, 놀라움을 넘어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곧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서둘러 생각을 지우고 차를 출발했다.
이렇게 쉽게 이혼해준다는데 좋아해야지, 지금 무슨 고민을 하는 것인지.
차를 출발한 뒤 세아에게 전화를 걸자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가 바로 전화를 받았다.
-민우 씨, 어디예요? 그 여자와 얘기는 잘 끝냈어요?
오늘 민우가 지연을 만나 이혼에 관해 이야기할 것이란 걸 세아도 알고 있었기에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어, 방금 이혼 서류에 사인하고 왔어. 지금 출발해서 집으로 가는 중이야.”
-그럼 이제 민우 씨 자유인 거예요? 이제 정말 내 남자인 거죠? 아 어떡해, 나 너무 기뻐서 눈물이 나려고 해요.
“세아야 내가 지금 운전 중이라, 집에 도착해서 자세하게 이야기해줄게.”
자세한 내용을 들으면 세아가 실망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당장은 말을 아꼈다.
-알았어요. 얼른 와요, 민우 씨. 너무너무 보고 싶어요.
그 어느 때보다도 달콤한 세아의 목소리가 전화기에서 흘러나와 민우의 귀를 간지럽혔다.
지연은 민우와 헤어지고 나서 허탈한 마음에 근처 공원을 잠시 걷다 눈에 띄는 벤치에 앉아 멍하니 주변을 보았다.
더도 말고 한 달에 한 번을 만나 달라고 하니 질렸다는 듯이 쳐다보았던 표정, 경멸의 눈빛, 이혼 서류에 사인하며 후련한 듯 떠올리던 미소.
그가 자신에게 느꼈을 감정이 미움과 경멸뿐이라는 생각이 들자, 괴로움이 칼날처럼 날카롭게 가슴을 할퀴었다.
자신도 알고 있다.
그를 좋아하는 마음이 아직 컸고, 이런저런 핑계로 한 달에 한 번을 만나 달라고 한 것은, 마음속 미련의 산물이라는 걸.
‘조금씩 조금씩, 남은 6개월 동안 내 마음속에서 차민우를 지워가면 돼. 그러면 되는 거야.’
지연은 복잡한 생각을 지우듯 머리를 세차게 흔들고는, 결심한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라도 해야지 이 마음에 가만히 있을수록 더욱 우울해질 것만 같았다.
***
[우리 따로 가면 어머님, 아버님이 이상하게 생각하실 수도 있으니, 집 앞에서 만나서 함께 들어가요. 7시까지 오라고 하셨으니 10분 전에 만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제가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시아버지 차승조 회장의 갑작스러운 호출로 예상치 못하게 며칠 만에 그를 다시 보게 되었다.
제시간에 도착한 지연은 집에서 조금 떨어진 공원 벤치에 앉아 민우를 기다리며 위치를 메시지로 남기고는 주변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느새 완연한 봄이네. 어쩜 꽃들이 이렇게 예뻐. 예전에는 이런 걸 봐도 아무런 느낌이 없었는데.’
살랑이는 바람결에 나무와 꽃 냄새가 풍겨와 기분이 좋아져 흐뭇하게 웃고 있는데 공원 안쪽으로 들어서는 차민우의 모습이 보여 지연이 손을 들었다.
“여기예요.”
지연이 벤치에서 일어나 그의 곁으로 걸어가자 민우는 다가오는 그녀를 바라보며, 놀란 듯 멈춰 섰다.
“은지연! 너, 머리가…….”
지금 보고 있는 지연은 민우가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결혼 후, 항상 머리카락 하나 흐트러지지 않고 단정하게 묶고 다녔던 칠흑같이 까맣고 긴 생머리는 밝은 갈색의 아름다운 웨이브로 바뀌어 그녀의 등 뒤로 찰랑거리고 있었다.
무릎까지 오던 무채색의 스커트와 라운드 넥 블라우스, 그리고 매번 하던 작은 진주 귀걸이는 온데간데없었다.
딱 붙는 청바지에 프릴 블라우스를 입고는 길게 늘어져 달랑거리는 드롭 귀걸이를 한 그녀가 민우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봄이라 스타일 한번 바꿔봤어요. 어때요? 잘 어울려요?”
“오늘…… 무척 새롭군.”
아니, 사실 지연은 너무나 상큼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뭐, 안 어울려도 어쩔 수 없어요.”
민우에게서 잘 어울린다는 말이 안 나오자 지연은 입을 장난스럽게 삐죽이다 웃었다.
“자, 그럼 이제 우리 들어가서 함께 다정한 부부를 연기해 볼까요?”
지연이 민우의 팔에 손을 올리며 가까이 다가섰다.
며칠 전, 세상이 무너진 듯 어두운 얼굴을 하고 이혼을 말하던 그녀는 온데간데없고 봄의 꽃처럼 만개한 그녀가 곁에 있었다.
흐드러진 꽃향기를 내뿜으며.
시댁에 들어서자 둘을 맞이하던 시어머니 강주란이 지연을 보고 놀라 입을 다물지를 못했다.
“어머머! 지연아 너 이게 무슨 꼴이야!”
주란의 반응은 지연이 충분히 예상했던 부분이었다.
시어머니의 선택으로 지연이 입게 되는 옷은 항상 무릎까지 오는 단정한 치마나 원피스였었다.
여자는 자고로 우아하고 품위 있어 보여야 한다면서.
정반대일 오늘 지연의 모습을 보고 진저리 치도록 싫어할 것이 뻔했다.
“봄이라 바꿔봤어요, 어머니. 안 어울리나요?”
“너무 이상해 얘! 이게 뭐니 싸구려 같이.”
며느리에게 ‘싸구려 같다’라는 어이없는 단어를 갖다 붙이는 것도 참 그녀답다.
“여보! 빨리 와서 이것 좀 봐요, 지연이 꼴이 어떤지.”
주란이 차승조 회장을 크게 불렀다.
“어머니, 그만하시죠.”
민우가 주란의 말을 자르더니, 지연을 데리고 식사가 차려져 있는 다이닝룸으로 향했다.
“왔구나.”
차승조 회장이 천천히 다가와 식탁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여보, 지연이 머리 너무 이상하죠? 아니 글쎄 얘가, 자기 맘대로 이렇게 이상하게 바꿨다니까요. 옷은 또 저게 뭐람, 꼴 보기 싫게.”
“왜, 잘 어울리는데. 대학생처럼 보이는구나, 지연아!”
차 회장이 지연을 향해 부드럽게 웃음 지었다.
“칭찬 감사합니다, 아버님. 봄이라 가볍게 바꿔봤어요.”
“그래, 잘했다.”
넷은 곧 식사를 시작하였고, 식사하는 내내 주란은 지연의 외모와 옷차림을 타박했다.
거의 다 먹어갈 무렵 차 회장이 갑자기 말을 꺼냈다.
“지연이는 일을 다시 시작하고 싶다고? 그제 은 회장님과 통화하는데 알려주시더구나.”
차 회장의 말에 민우와 주란이 깜짝 놀란 얼굴로 동시에 지연을 쳐다보았다.
며칠 전 부모님과 통화할 때 다시 일할 계획이라고 얘기했었는데, 그게 전해진 것 같았다.
부모님은 온유 제약에서 일하기를 권하셨지만, 경영에는 자신이 없고 하고 싶은 업무들이 있기에 아직은 다른 곳에서 좀 더 사회생활을 해보고 싶다고 정중히 거절한 상태였다.
“뭐? 지연이 너 일 다시 하려고? 안 돼! 얌전하게 집에서 민우 내조에 집중해야지 일은 무슨 일. 너 요즘 아기 가지는 거에 아예 신경 끊은 거야? 한동안 잠잠하게 말 듣더니 또 무슨 바람이 불어 이래!”
지연은 짜증을 내는 주란의 말에 따로 대답하지 않고 잠시 가만히 있다 차 회장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네, 아버님. 일 다시 시작해 보려고요. 민우 씨도 좋다고 동의해 줘서 힘을 얻었어요.”
지연은 눈빛으로 ‘이제 당신 허락은 필요 없으니 가만히 있어요’라는 듯이 민우를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지금 재우 그룹에 이력서 제출하였고, 1차 서류전형 통과해서 2차 면접 일정 기다리고 있어요. 잘되도록 응원해 주세요, 아버님.”
“어머 어머 얘 좀 봐, 그런 일은 우리 허락을 받고 진행해야지 그렇게 네 맘대로 하면 어떡하니? 당장 취소한다고 연락해!”
들고 있던 물잔을 내리치듯 식탁 위에 내려놓으며 말하는 주란의 목소리가 더없이 날카로웠다.
“그래 지연아. 지금 이력서 제출한 데는 취소한다고 연락하려무나.”
“아버님! 하지만 그건…….”
“그러지 말고, 우리 회사에 들어오렴. 은 회장 말 듣고 알아보니 마침 기획실에 자리가 있다는구나. 다른 데 갈 거 뭐 있겠니?”
경악스럽다는 듯 두 눈을 크게 뜬 주란의 시선이 이번에는 차 회장에게 향했다.
“여보!”
“당신, 그만 좀 하지.”
차승조 회장이 나직이 주란에게 말하자, 뭔가를 더 말하고 싶어 하던 주란이 불만스럽게 입을 꾹 다물었다.
“네가 얼마나 똑똑하고 일을 좋아하는지는 나도 잘 안다. 일 그만둔다고 할 때는 내가 다 속상했어. 다시 일할 생각을 했다니 반갑구나. 네가 다른 곳이 아닌 우리 회사에서 일한다면 나도 그렇고 민우도 맘이 놓일 거다. 안 그러냐 민우야?”
민우는 조금은 놀랐는지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 우리 회사로 나와. 내가 미처 그 생각을 못 했군.”
민우는 왜 미리 얘기하지 않았냐는 듯 원망 섞인 표정으로 지연을 쳐다보며 말했다.
“네가 우리 가족이라는 말도 안 하고, 더한 자리를 주지도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아라. 그리고 네가 예전에 말했었잖니, 우리 회사 기획실에서 꼭 일해보고 싶어서 지원했었지만 떨어진 적 있었다고.”
C&C 글로벌의 기획실.
광고, 디자인 회사가 아님에도 그쪽 분야의 사람들이 한 번쯤은 꼭 가보고 싶어 하는 그곳.
가전제품부터 핸드폰까지 여러 제품군의 디자인 기획부터 광고 참여까지, 팀 내에서 다양한 기획 업무들에 직접 참여하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특히 C&C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전략기획실 소속이라 단순 기획 업무가 아닌 확장된 업무를 경험하기로도 유명했다.
지연도 이전 회사에서 근무할 때 언젠가 자신의 힘으로 꼭 한번 가보고 싶다고 동료들과 항상 말했던 팀이다.
차 회장의 말대로 지연이 사회생활 초반에 이력서를 넣었다가 2차 면접에서 떨어진 적이 있기도 했다.
“내가 최 비서 통해 인사팀에 전달할 테니 그리 알아.”
“하지만…….”
“이제 이 이야기는 여기서 마무리하자꾸나.”
차 회장은 더는 왈가왈부하지 않겠다는 듯 이야기를 끝내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연의 마음은 이건 아니라고 하면서도, 반대로는 또 다른 달콤한 속삭임이 들려오고 있어 선뜻 확실히 거절의 말을 하지 못했다.
조금만이라면 괜찮지 않을까?
1년 만이라면. 아니, 6개월 만이라도.
그렇게 가보고 싶었던 그곳에서 일해 보는 게 나쁜 일만은 아니지 않을까?
지연의 재취업 선언에 주란의 짜증이 가득했던 시댁에서의 식사를 마친 후, 집에 각자 가자는 지연의 말에 끝까지 데려다주겠다고 민우가 고집을 피웠다.
집에서는 함께 나와야 했기 때문에 민우의 차를 타고 나오니 내려주질 않았다
“그냥 저는 큰 대로변에서 세워달라니까요.”
“그냥 가지.”
민우는 지연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고는 지연이 지금은 혼자 사는 그들의 집으로 향했다.
음악도 없고, 아무런 대화도 없이 달리는 차 안에는 숨 막히는 고요함만이 가득했다.
정적을 먼저 깬 것은 민우였다.
“왜 미리 말 안 했어.”
“제가 민우 씨에게 그걸 왜 미리 말해야 해요?”
“왜냐하면, 너는…….”
‘아직 내 아내니까.’
이 말이 민우의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안으로 삼켰다.
“참 이상하네요. 지난 3년간 제가 뭘 하던 한 번도 관심이 없더니, 새삼 이렇게 관심 두는 게.”
지연에게서 비꼬는 듯한 말이 흘러나오자 민우의 말문이 막혔다.
“일하는 거 원래 좋아했어요, 저는. 물론 당신은 전혀 몰랐겠지만.”
민우도 모르지 않았다.
아니,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얼마나 자기 일을 좋아했었는지.
지연은 결혼 전부터 다니던 회사를 결혼하고 난 이후 1년 정도 더 다녔었고, 함께 식사하는 날이면 회사에서 있었던 일을 묻지도 않았는데 재잘재잘 이야기해주고는 했다.
그때의 지연은 항상 얼굴에 생기가 넘쳤고 밝은 에너지가 보였었다.
하지만 민우는 그게 너무나 보기 싫었었다.
그녀가 즐거운 것도, 활기차게 살아가는 것도.
눈 감으면 생각나는 울먹이던 세아의 모습이 떠올라 더 그랬던 것 같다.
그래서였을까? 그녀가 회사 일을 즐거운 듯 이야기할 때면, 그녀에게 더욱 모질게 말했다.
시어머니의 말처럼 내조에나 더욱 신경 쓰라고.
일도 내조도 둘 다 제대로 못 할 거면 다 때려치우라고.
지연의 가슴을 후벼 파는 얘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했었더랬다.
그런 날이 하루하루 늘어가자 지연은 민우 앞에서 일 얘기를 하지 않게 되었고, 둘 사이의 대화는 점점 줄어들어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런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지연은 회사를 그만두었고, 그 뒤로 그녀가 예전처럼 활기차게 이야기하는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