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새로운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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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새로운 시작
2022.08.08.
“그렇게 좋아하던 일을 왜 그만둔 거지?”
민우의 물음에 지연이 그를 어이없다는 듯 쳐다보다 자신도 모르게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의 웃음에 민우가 눈살을 찌푸렸다.
“뭐가 웃긴 거지?”
“당신, 정말 몰라서 물어보는 거예요? 아니죠?”
“모르니까 물어보지 않겠어?”
차민우는 과거 자신이 내뱉었던 말들을 정말 까맣게 잊어버린 듯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얼굴로 지연을 쳐다보았다.
지연은 이런 그가 어이가 없었다.
‘당신과 당신 어머니 때문이잖아’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었다 내려갔다.
그의 이런 모습을 보니, 결혼식 며칠 전 지연의 회사 앞에 갑자기 찾아왔던 강주란이 문득 생각났다.
미리 약속도 없이 회사 앞에 찾아와서는 그녀의 얼굴에 대고 대뜸 한다는 말이 ‘결혼하자마자 아기를 가지라’는 말이었다.
그리고 회사를 빨리 그만두고 차민우의 내조에나 신경 쓰라던 그녀.
허구한 날 이어지는 주란의 패악과 민우와 좁혀지지 않는 사이 때문에, 지연은 결혼 1년 만에 백기를 들었고 회사를 그만두었었다.
“지금 굳이 그 이유를 알 필요 없잖아요? 그냥 관심 없던 이전처럼 모른 채 있어요.”
굳어진 입매의 지연이 창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집에 도착할 때까지 어색한 침묵이 다시 차 안을 채웠다.
“입사하는 건 내가 최 비서님 통해 체크해서 알려줄 테니 그리 알고 있어.”
“민우 씨.”
“그냥 내 말 들어.”
자신이 아직도 뭔가 되는 양 이야기하는 민우의 태도에 지연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이건 아닌 것 같아요. 제가 왜 거기에 가요, 몇 개월 뒤면 서로 안 볼 사이인데.”
“우리 아버지 성격 알 텐데. 한번 하자면 하시는 분인 거 네가 더 잘 알잖아. 네가 지금 다른 회사에 다니는 건 절대 안 보실 거야. 너 6개월 뒤에 이혼 알리고 싶다며? 그 사이에 이것저것 준비한다며. 큰소리 안 내려면 그냥 나와, 나중 일은 나중에 생각하고.”
“하지만…….”
“어차피 할 일을 장소만 다르게 하는 것뿐이잖아. 뭐가 문제야 도대체? 괜히 일 크게 벌이지 말고 그냥 조용히 나와. 난 네가 우리 회사 나와도 아무렇지 않고 신경도 안 쓰여. 하지만 네가 정 불편하다면 6개월 뒤 우리 이혼하고 나서 그만두면 되잖아.”
‘당신에겐 아무것도 아닌 일이겠지만, 나에겐 새로운 시작을 하는 중요한 사안이라고.’
지연의 입사가 뭐 그리 대단한 것이냐며 별것 아니라는 듯 얘기하는 민우의 모습에 부아가 치밀었지만, 그의 말대로 차 회장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지연이었다.
여기서 수그리고 들어가지 않으면 눈치 빠른 차 회장은 분명 이상함을 눈치챌 테고, 지연의 집에도 말이 갈 수 있었다.
아직은 안 되었다. 지금은 자신의 마음만 추스르기에도 버거웠다.
그리고 가슴 깊숙이 가라앉아 있던 속마음이 부유하며 지연의 머리를 어지럽혔다.
꼭 한 번은 가보고 싶었던 팀.
이렇게 거절하고 민우와 헤어진다면 앞으로 영영 기회가 없겠지.
잠깐이잖아. 그와 헤어지기 전 잠깐.
갈팡질팡하는 지연의 마음은 어느새 한쪽으로 기울어져 갔다.
Rrrr Rrrr-
그 시각, 세아는 계속 민우에게 전화하고 있었다.
“민우 씨, 사람을 왜 이렇게 불안하게 만들어.”
하지만 몇 번을 다시 걸어도 민우는 전화를 받지 않았고, 신호음만 들릴 뿐이었다.
오늘은 그 여자와 함께 부모님을 찾아뵙는다고 했다.
이혼할 사람들이 왜?
민우의 전처, 아니 아직은 전처라고 부를 수는 없지만, 은지연은 분명 민우를 놔 줄 생각이 없는 거였다.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서 어떻게든 민우에게 매달리려는 것이 눈에 선했다.
그렇게 시간을 끌면서 결국 민우 씨를 안 놔 주겠지.
민우가 말해준 것은 정식 이혼 절차는 6개월 뒤에 밟는다는 거였다.
하지만 뭔가 더 있는 것 같은데 속 시원하게 뭔지를 알려주지 않았다.
1시간 정도 후, 민우에게서 전화가 왔다.
“민우 씨!”
-세아야! 무슨 일 있어? 전화를 왜 이렇게 많이 했어. 내가 핸드폰을 진동으로 해놔서 전화 온 줄 몰랐어.
‘거짓말. 그 여자랑 있느라 안 받은 거잖아.’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는 생각들이 머리에 꽉 찼다.
“몇 시에 돌아오는지 궁금해서요. 혹시 일찍 오면 같이 밥 먹으려고 했었는데, 밥은 먹은 거죠?”
-내가 저녁 식사라고 말했잖아. 지금 가는 중이야. 얼마 안 걸릴 거야.
“알겠어요. 보고 싶어요 민우 씨, 빨리 와요.”
세아는 손톱을 잘근잘근 씹으며 대답했다.
약 20분쯤 후,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려오자 세아는 달려나가 집 안으로 들어선 민우의 품에 폭 안겨들었다.
“민우 씨. 보고 싶었어요.”
“그새를 못 참고 내가 보고 싶었던 거야? 우리 세아, 저녁은 먹었어?”
민우가 세아의 입술에 쪽 하고 입을 맞추며 사랑스럽다는 듯 쳐다보았다.
“그냥 배달 앱으로 간단한 거 시켜 먹었어요. 중심가라 그런가 이 근처에 맛집 많더라고요.”
민우의 눈길이 세아 뒤 식탁 위에 놓인 플라스틱 그릇들로 향했다.
“또 시켜 먹은 거야? 난 밖에서 먹는 음식 금방 물리던데.”
“그냥 뭐……. 만들어 먹기도 귀찮아서 시켜 먹었는데 다행히 맛은 괜찮았어요.”
민우는 겉옷을 벗고는 세아를 데리고 거실로 가 앉았다.
“오늘 부모님과 식사한 거예요?”
“응 아버지가 갑자기 호출하셨다고 했잖아.”
“그 여자도 같이요?”
“응, 뭐 말씀하실 게 있다고 하셔서.”
“뭘 말씀하셨는데요?”
‘지연이가 회사로 출근하게 된다는 건 말하지 않는 게 좋겠지?’
날카로운 말투로 꼬치꼬치 묻고 있는 세아를 보며 민우가 잠시 고민하였지만, 결론적으로는 말하지 않기로 했다.
“그냥 이것저것. 별거 아니었어.”
세아는 더 자세하게 묻고 싶었지만, 꾹 참고 부드러운 목소리를 내려 노력했다.
“이혼하는 건, 정말 6개월 뒤에나 할 수 있는 거죠? 그전에는 정말 안 되는 거예요?”
“응. 조금만 참아줘.”
“…….”
“너에게 맘 고생시켜서 미안하다.”
“알겠어요.”
세아가 민우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더니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민우 씨, 나 궁금한 게 있어요.”
“응, 말해봐.”
“예전에…… 우리 헤어지기 전에 당신이 말했었잖아요. 그 여자와 결혼하더라도 1년만 결혼생활할 거라고. 그 뒤엔 가차 없이 이혼할 거라고.”
“…….”
“그래서 전 당신이 그 여자와 이미 이혼했을 거로 생각했어요.”
그 뒤의 말이 세아의 입 밖으로 나오지는 않았지만, 민우의 귀에는 들리는 듯했다.
그런데 왜 아직 이렇게 같이 있나요?
민우는 세아를 끌어당겨 꼭 껴안기만 할 뿐, 그녀의 말에 아무 대답을 할 수 없었다.
***
3년 전.
민우가 자신의 결혼 이야기를 꺼내며 세아를 붙잡고 어떡해서든 그녀를 설득하려 했다.
“세아야 제발 1년만 참아줘. 절대 그 여자와 잠도 안 자고 방도 같이 안 쓸 거야. 그냥 말만 부부지 룸메이트나 다를 게 없는 관계일 거라고. 약속할게! 1년 뒤에 무슨 일이 있어도 바로 헤어질게. 각서를 쓰라면 쓸 수도 있어!”
“이 기회를 잡지 않으면 난 후계 구도에서 완전히 제외될 거야. 세아야 제발! 제발 나 좀 살려주라!”
누가 들어도 어처구니없을 민우의 말에 세아는 한가득 상처받은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민우 씨, 이건……. 말이 안 되잖아요. 내가 사랑하는 남자가 다른 여자와 결혼한다는데 그걸 어떻게 참고 있어요. 당신은 제가 다른 남자와 그렇게 산다면 이해가 가겠어요?”
“내가 나쁜 놈인 거 알아. 아는데, 이번만 나를 좀 이해해 줄 수 없겠니? 내가 평생 어떤 마음으로 살았는지 네가 누구보다도 제일 잘 알잖아, 세아야.”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지도 못하며 울고 있는 세아를 민우가 강하게 끌어안았다.
“너, 나 사랑하잖아. 네가 사랑하는 남자……. 잘 돼야 하잖아.”
“당신은 왜 이렇게 저에게 잔인해요.”
C&C 안에서의 명실상부한 확고한 위치.
그 하나를 평생 바라보며 목표하고 살아온 차민우였다.
그랬기에 평생에 가까운 시간 동안 아버지 차승조 회장의 눈에 들려고 얼마나 피나는 노력을 했던가.
다른 이복형제들과 같은 그의 자식이자 아들이었지만 혼외자라는 이유만으로 차별받았고, 차 회장은 그런 민우의 약점을 알고 뒤흔들고는 했다.
‘네가 후계 구도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이 방법밖에 없다’고 돌려 말하는 차 회장의 말에 민우에게 선택지는 한 가지밖에 없었다.
하지만 민우의 결혼 이야기가 나오고 얼마 후, 세아가 사라지자 민우는 처음으로 자신의 선택을 후회했다.
그녀는 원래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고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녀가 살던 원룸, 사용하던 핸드폰, 일했던 곳.
그 어느 곳에도 그녀의 흔적은 없었다.
한동안 미친 듯이 정세아를 찾아 헤매며 매일매일을 후회로 괴로워했던 차민우였지만 결국 예정된 은지연과의 결혼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세아에게 말한 대로, 은지연과 결혼하고 한동안은 1년 뒤 할 이혼만 생각하며 이를 악물었다.
‘세아까지 떠나가게 하면서 잡은 기회야 차민우! 1년, 단 1년 만이야.’
하지만 시간이 약이라고 했던가.
점점 시간이 흐르자, 자신도 모르게 서서히 은지연과 함께 지내는 것에 익숙해져 갔다.
지연이 좋아진 것은 결코 아니었지만, 그녀는 직장을 다니면서도 여러모로 최선을 다했고, 또 하는 것마다 잘했기에 민우가 특별히 불만을 가질 일이 없었다는 것이 어쩌면 더 적절했겠지만.
그런 시간이 켜켜이 쌓여 어느새 3년이 되어 있었다.
***
몇 날 며칠을 고민한 지연은 결국 C&C로 출근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온전히 자신의 커리어와 꿈에 집중하여 고민을 거듭한 결과였다.
“조금 전까지 설명해 드린 내용은 이 안내 자료에 자세히 적혀 있으니 살펴봐 주시기 바랍니다. 우선 이력서와 경력증명서, 통장 사본 등 급한 서류는 제출해 주셨으니 나머지 서류들은 준비되시면 저희 팀에 제출하여 주세요.”
C&C로의 출근 첫날, 인사팀의 오리엔테이션 후 안내를 받는 지연은 그 어느 때보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동안 자신이 얼마나 이 순간을 기다려 왔는지, 생각보다 더 흥분되었다.
“안녕하세요. 다시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부장님.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지연은 자신이 속하게 된 팀의 부장을 먼저 만났다.
차승조 회장의 지시를 통해 지연의 이력서가 HR에 전달되기는 했지만, HR에서는 차 회장이 아닌 회사 내부 추천인에게 이력서를 전달받은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지연은 일반 입사 프로세스대로 부장의 면접은 똑같이 진행하고 들어왔다.
물론 지연이 면접에서 좋지 않은 피드백을 받았다고 해도 차승조 회장이 손을 썼겠지만, 다행히 그럴 일은 없었다.
“인터뷰 이후 긴급하게 입사 요청했는데 빨리 와줘서 고맙습니다, 당분간 업무는 제가 인수인계할 예정입니다. 잘 부탁합니다.”
부장은 지연을 다른 팀원들에게 소개하고 자리로 안내했다.
“출근 첫날부터 일 폭탄을 줘서 미안한데, 전임자가 추진하던 광고 건이 곧 촬영이라 업무 파악이 시급합니다. 이전 회사에서 마케팅팀에서 근무하여 광고 촬영은 많이 해보셨다고 들었어요. 맞나요?”
“네 광고 기획에도 많이 참여해서 이 부분은 어렵지 않을 것 같아요. 자료만 주시면 빠르게 파악해 보겠습니다.”
“은 과장님, 대답이 참 든든하네요.”
그녀의 시원한 대답이 만족스러웠는지 부장이 소리 내 웃었다.
그로부터 며칠 동안 넘겨받은 수많은 자료를 받아 하나하나 꼼꼼하게 점검했다.
회사마다 진행하는 프로세스는 조금씩 달라도 크게 보면 비슷한 일들이었다.
‘몇 년간 쉬었는데 잘 적응할 수 있을까?’
하지만 고민했던 것은 금세 잊을 정도로 빠르게 적응하며 일을 익힌 지연은 오랜만에 느껴보는 회사 분위기와 업무에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업무 파악에 집중했다.
바쁜 와중에도 지연의 얼굴에는 그 어느 때보다도 생기가 넘쳐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