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나는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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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나는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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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나는 안 돼?
2022.08.18.
당황한 민우가 들고 있던 와인잔을 넘어트려 와인이 바닥으로 뚝뚝 흘러내렸다.
“그럴 리가 없어. 내가…… 내가 그랬다고? 네가 뭔가 착각을 했겠지.”
“하! 착각?”
부정하는 민우의 대답에 지연의 입에서 실소가 터져 나왔다.
그 밤, 밤새 그녀를 놓아주지 않고 몇 번이고 파고들던 민우에게서 잔인하게도 그 이름을 수십 번 넘게 들어야만 했었다.
정세아 사랑해, 사랑해 세아야.
“한 번도 아니고 수십 번을 들었는데 착각이라고요? 당연히 당신은 기억에 없겠죠, 그날의 당신은 인사불성이라 어떻게 집에 돌아온 지도 기억하지 못했는데. 아닌가? 기억하고 싶지 않아서 지워버린 건가?”
지연의 말에 민우의 두 눈은 경악으로 물들어갔다.
배려 없는 처음을 맞이한지라 온몸이 찢어질 듯 아팠던 그녀였지만, 그보다도 상처 입은 마음이 더욱 아팠다.
울고불고 밀어보고 때려보아도, 밀어내면 낼수록 그녀에게 더욱 파고들며 정세아를 찾던 차민우.
왜 그때 포기하지 못했을까.
뭐 그리 대단한 사랑이라고, 그 모진 수모를 겪어가며 견뎌냈는지.
아마도, 난생처음으로 심장에 각인된 사람이라서 그런 것이었겠지.
어리고 순진했던 나의 마음에 들어섰던 단 하나의 사람이라 그랬던 거였겠지.
민우는 지연의 말을 듣고는 더는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지 못했다.
지연은 그런 그를 한동안 차갑게 쳐다보다가 자리에서 일어서서 등을 돌렸다.
“조심히 가세요.”
지연이 방으로 들어간 뒤 한동안 거실에서 멍하니 앉아 있던 민우는 머리를 감쌌다.
‘말도 안 돼. 은지연이 거짓말하는 거야. 내가 그럴 리가 없잖아.’
자신이 좋은 사람은 아니었어도 그 정도로 쓰레기 같은 말을 했었다니…….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졌다.
민우는 어제 그 대화 후에 바로 나갔는지 아침에 거실로 나오니 보이지 않았다.
다음 주가 이사인지라 지연은 당장 해야 할 일들이 많았고, 우선 정신을 가다듬고 짐을 싸기로 했다.
포장이사라지만, 중요한 물건들은 꼭 분리해 둬야 한다고 하니.
“이상하다, 어디 갔지?”
가장 먼저 옷과 귀중품을 정리하려고 보니, 얼마 전에 큰맘 먹고 구매한 명품 원피스가 보이지가 않았다.
작은 진주들이 촘촘히 박힌 아름다운 원피스에 첫눈에 반해 평소라면 절대 사지 않을 높은 가격에도 불구하고 바로 구매했었는데.
“가격표도 떼지 않고 잘 모셔 뒀었는데 어디로 간 거야? 내가 도대체 어디에다 둔 거지?”
이곳저곳 한참을 찾았지만 보이지 않아 결국 포기하고는 다른 짐을 먼저 싸기로 했다.
“요즘 내가 정신이 없네. 없어져 봐야 집 어디엔가 있겠지. 나중에 다시 찾아봐야겠다.”
보석이나 시계 그 외 귀중품은 잘 포장해 두었고, 이제 뭘 정리해야 하나 고민하는데 거실 벽의 커다란 결혼사진이 눈에 띄었다.
3년 전의 지연과 민우.
민우는 무표정이고, 지연만이 어색하게 웃고 있는 둘의 결혼사진.
저것도 안 찍겠다는 걸 지연의 모친이 민우에게 엄청나게 잔소리해서 겨우 찍은 것이었다.
“엄마, 미안해. 괜히 찍었었네, 저거.”
바로 의자를 가져와 올라가서는 낑낑거리며 벽에서 액자를 떼어냈다.
잠시 멍하니 사진을 보던 지연은 퍼뜩 생각난 듯이 액자에서 사진을 분리해 옆에 있는 가위로 사진을 주욱- 잘라냈다.
처음에는 자신과 민우의 사이를, 그다음은 민우의 몸 부분을 가위로 잘게.
그러다 가위를 던져버리고 손으로 쭉쭉 찢어냈고, 찢다 보니 갑자기 화가 나 잘라낸 사진을 마구 구겨 버렸다.
“야 이 나쁜 놈아! 아아악!”
그를 생각해도 아무런 감정의 영향을 받지 않고 싶었는데, 아직은 무리였나 보다.
이런 화나는 감정조차 느끼고 싶지 않은데.
지연은 갑자기 바닥에 누워 집 안을 둘러보았다.
이 집에서 거의 3년의 시간을 보냈는데, 좋은 기억이라고는 단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뭐가 있지? 이 집에서의 추억?’
일찍 출근하는 민우를 위해 5시에 일어나 아침을 차리던 모습.
주란이 갑자기 쳐들어와 아기를 빨리 가져야 한다며 잔소리를 하고는 자신에게 붕어즙을 먹이던 모습.
시도 때도 없이 아무 때나 찾아와 자신이나 고용인에게 악다구니를 쓰던 주란의 모습.
종종 자신이 집에 없을 때, 주란이 집에 와서 자신의 물건을 버린 걸 나중에 알고 속상해 울던 자신의 모습.
그런 모습을 보고도 무심히 지나치던 차민우의 차가운 얼굴.
생각해 보니 어처구니가 없었네, 이곳에서의 지난 3년이.
지연은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크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면서 조용히 자신에게 말했다.
“이제 다시는 그렇게 살지 않을 거야. 앞으로는 온전히 나의 행복을 위해 사는 거야. 네가 하고 싶은 대로, 네가 원하는 대로.”
***
“하영아~ 여기!”
지연이 손을 흔들며 오랜만에 만난 친구를 반갑게 불렀고, 친구 하영이 지연을 발견하고는 그녀가 앉아 있는 자리로 쪼르르 뛰어와 냉큼 곁에 앉았다.
“지연아! 진짜 오랜만이야! 너무 보고 싶었어! 내 친구.”
“나도 하영아, 너무 보고 싶었어.”
둘은 반가움에 서로를 부둥켜안았다.
“우선 우리 뭐 좀 시키자. 뭐 시킬까? 와인 어때?”
“와인 좋지! 그나저나 요즘 같은 시대에 이렇게 갑작스럽게 취업을 하다니, 역시 넌 능력자였어! 재취업 축하 선물로 내가 쏠 테니 먹고 싶은 거 다 시켜!”
둘이서 와인 한 병을 다 마시고 두 병째 와인의 코르크 마개를 열 때쯤, 지연은 조심스레 아무에게도 꺼내지 못한 얘기를 넌지시 시작했다.
가족만큼 믿는 하영이었기 때문에 그녀를 믿었고, 이 답답한 속을 누구에겐가는 이야기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한참을 지연의 이야기를 들은 하영의 표정은 심각했다.
“지연아! 6개월 정도의 시간이 너에게 필요하다는 건 이해된다고 쳐. 그리고 회사도, 사실 나는 이해는 안 가지만, 네가 예전부터 그렇게나 가고 싶었던 곳이니 이것도 이해해볼게. 하지만 한 달에 한 번, 왜 만나 그 자식이랑. 너 이렇게 해서 그 자식 마음 돌려보려고 하는 거야? 안 돼 지연아! 미쳤어?”
예상했던 대로 하영이 펄쩍 뛰며 말했다.
“네가 뭐가 모자라서 차민우한테 매달려 매달리기를. 네가 얼굴이 모자라, 돈이 없어, 집안이 부족해. 능력까지 있는데 왜 이래 지연아. 무슨 이유가 있는 거지? 말해봐, 뭐라고 안 할 테니. 네가 이런 결정을 하게 된 이유를 말해봐. 말이라도 해야 속이 덜 답답하지!”
“하영아.”
슬프지도 않았고 그녀의 말에 서운하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두 눈에서 눈물이 툭 떨어졌다.
아니, 슬프고 억울했던 마음을 빗장 속에 가둬두고 ‘괜찮아, 나는 괜찮아’라고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며 참아내고 있던 마음이었는데, 하영의 진심 어린 걱정 한마디에 그 빗장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지연아.”
하영이 속상한 목소리로 지연을 위로하며 꼭 안아주었다.
“많이 힘들었지, 휴…… 널 어쩌니. 나도 널 위로해 줄 생각부터 해야 했는데. 미안해.”
평소 둘은 자주 통화를 했던지라 지연의 상황이 대충 어떤지 하영은 알고 있었다.
지연의 가장 가까운 친구로서 큰 힘이 되어주지 못해 안타까워만 하고 있었는데.
그녀에게 이렇게 더 큰 일이 있었다니, 하영은 마음이 너무나도 아팠다.
“그 자식, 아니……. 민우 씨 아직 완벽하게 포기가 안 되는 거지?”
하영이 조심스레 물어보자 지연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에게 그 사람 오지 않을 거라는 건 3년 동안 뼈저리게 느꼈는데도, 마음이 확 끊어지지 않아. 나도 왜 그런지는 모르겠어. 그래서 그랬어. 나에게 그 사람을 지우는데, 시간이 필요해서. 하지만 미련만으로 그 사람 잡고 싶어서 한 달에 한 번을 그 사람과 보내려는 건 아니야.”
지연은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말을 이었다.
“나도 그 사람에게, 그리고 그 여자에게 뭐라도 갚아 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나 봐.”
지연이 마치 조금 전 그런 일을 당한 듯 분함으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차민우, 내가 그렇게 싫고 그렇게 그 여자를 잊지 못하겠으면 나와 결혼하지 말았어야지. 나를 냉정하게 차버렸어야지. 그 여자를 사랑하고 못 잊겠다면서 그 사람은 왜 나와 함께 밤을 보낸 거지? 손가락 하나 건드리지 말았어야지! 자신이 갖기에는 싫고, 남 주기에는 아깝다는 듯, 나의 사랑과 노력을 철저히 무시하고 짓밟은 그 사람. 그렇게 좋다, 그렇게나 사랑해서 못 잊었다는 여자에게 바로 보내주고 싶지 않았어, 사실.”
지연은 말을 하며 점점 흥분되어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 여자도 그래. 그 사람과 미치도록 사랑했으면, 나와 싸우든 울고불고 매달리든, 어떡해서든 자신의 남자를 잡았어야지. 그렇게 사라져놓고 갑자기 다시 나타나 유부남이 되어버린 옛사랑을 붙잡아 살아가다니.”
지연이 절규하듯 말을 뱉어내더니 헉헉대며 거친 숨을 쉬었다.
“그 여자도 당해봐야 알지, 자신과 함께 사는 남자가 다른 여자와 시간을 보낼 때 어떤 기분인지. 나도 괴로웠듯이 그 사람들도 괴로우면 안 돼? 나는 이렇게 잠시라도 상처 주면 안 되는 거야?”
지연은 뭔가를 갚아 주고 싶어 그랬다지만, 하영이 보기엔 그녀는 그저 차민우를 놓지 못해서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그와의 시간을 잠시라도 가지려는 것 같았다.
여린 마음에 미련이 철철 넘쳐흘러서.
하지만 지금 지연에게 그런 말로 상처 주고 싶지 않았다.
그저 힘들 그녀에게 공감해 주고, 이해해 주고, 위로해 주고 싶었다.
“지연아. 난 다만, 네가 더 상처 입을까 봐 걱정일 뿐이야.”
하영이 지연을 꼭 안아 들썩이는 그녀의 등을 쓰다듬어주었다.
“너는 민우 씨를 좋아한 마음만이 있었을 뿐인데, 왜 이렇게 된 거니. 대학교 때부터 좋아한 거면 거의 10년인데.”
***
11년 전, 그날은 지연이 TV 드라마에서만 보았던 대망의 신입생 환영회에 참석한 날이었다.
그날따라 친한 하영은 아파서 학교에 오지 못했고, 동기들과 선배들은 술에 취해 흔들거리고 있었다.
그 사이에서 오도카니 홀로 앉아 콜라를 홀짝이고 있자 지연을 잘 모르는 선배 두 명이 지연에게 분위기를 맞추라며 자꾸 귀찮게 하고 있었다.
“야, 넌 뭐라고 혼자 음료수를 마시고 있어, 원래 이런 날은 알코올을 마시라고 모인 거라고. 어디서 신입생이 빼기를 빼! 자, 잔 들어!”
이미 좀 취해 있는 선배가 큰 목소리로 지연을 향해 말했다.
“아, 저는 마시면 안 돼서요.”
지연은 아직 미성년인지라 술을 마시면 안 되었기에 조그맣게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안 되는 게 어딨어, 마시면 마시는 거지. 나도 한약 마셔서 원래 이런 거 마시면 안 되는데 마시고 있다고.”
하지만 그걸 알 리 없는 선배는 이렇게 말하더니 혼자 킥킥거렸다.
“야, 나도 몸이 너무 약해서 마시면 안 되는데 마신다고. 술이 약이지 술이 약이야~ 안 그러냐?”
두 명의 꼴값 선배들은 말도 안 되는 농담을 주고받으며 지연 앞에 놓여 있는 콜라 잔을 집어 들어 옆에 있던 맥주를 따르려고 했다.
지연이 선배들의 이런 행동에 안절부절못하고 있을 때였다.
“그만해라 너희들, 얘가 싫어하잖아. 안 마시겠다는 애한테 왜 이래?”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머리가 짧고 키가 큰 남자가 꼴값 선배들에게서 지연의 콜라 잔을 다시 빼앗고 있었다.
“어, 민우 선배! 선배에~ 오늘 못 오신다더니 오셨네요! 그나저나 아직 군바리의 때를 못 지우셨군요. 머리가 이게 뭐예요.”
지연의 콜라 잔을 뺏긴 선배 하나가 짜증을 내다가 곧 그를 알아본 듯 목소리를 바꿔 반갑게 물었다.
“그래 군바리의 때를 벗으려면 아직 멀었지. 근데 너도 2개월 뒤에 간다며? 이것보다 짧게 깎일 테니 기대하고.”
민우라는 선배가 웃으면서 앞에 있는 꼴값 선배의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놀렸다.
“아, 선배~ 그렇게 슬픈 말을 웃으면서 하다니! 나 오늘 선배랑 마시고 진상 부릴 테다!”
“그래, 그 진상 내가 다 받아줄 테니 저쪽으로 가자. 오늘 함께 밤새 봐야지?”
“좋습니다. 선배!”
민우라는 선배는 자연스럽게 이야기의 흐름을 다른 쪽으로 바꾸며 두 꼴값 선배들을 이동시켰고 그들은 더는 지연을 귀찮게 하지 않았다.
“저 둘만 피하면 여기에 너 귀찮게 하는 사람 없을 테니 참고해. 우리 과에 온 걸 환영한다, 꼬맹이. 종종 보자.”
두 선배가 다른 쪽으로 이동하자 민우가 지연에게 나직이 말하며 어깨를 톡톡 쳤다.
목소리에 꿀을 발라놨다는 게 이런 목소리인가,
그의 목소리를 듣는데 소름이 오소소 돋으며 심장이 마구 뛰었다.
아직 머리도 짧고 얼굴도 까무잡잡하여 군인의 느낌이 남아 있었지만, 선 굵은 그의 얼굴의 잘생김을 가릴 수 없었다. 더욱이 큰 키에 다부진 몸은 남자다움이 물씬하였다.
지연은 난생처음 남자에게 설레었다.
그의 주변에서 하얀 오라가 발산하는 느낌.
보답 없는 사랑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