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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용호상박 (7/85)


7. 용호상박
2022.08.22.



 


“내가 이럴 줄 알았다니까요. 본부장님 다시 오신 건 너무 좋은데, 업무가 정말 엄청나게 늘어나네요. 차 한잔 마실 시간이 없어요. 안 그래요 과장님?”

옆자리에서 주연 대리가 지연에게 우는소리를 했다.

강현은 매우 공격적으로 업무 영역을 확장하려 했고, 매일 야근을 불사하며 일하였다.

그것은 그에게 속한 모든 팀의 업무량이 늘어나는 것으로 연결되었다.

지연도 평소보다 업무가 20% 정도가 늘어나 더욱 정신을 바짝 차리며 일해야만 놓치지 않고 일할 수 있었다.


“남자친구가 저에게 요즘 왜 이렇게 늦냐고 만날 때마다 뭐라 하는데, 이게 일 때문에 그런 거니 화내지는 못하고. 아무튼, 어려워요.”

“어머! 주연 대리님 남자친구 있었어요?”

지연이 깜짝 놀라 물었다.

이강현 본부장이 복귀했을 때 너무 좋아하길래 본부장님을 짝사랑 중인가 했는데.


“네, 그럼요. 저희 벌써 2년 넘었는걸요? 저희 원래 C&C에서 만난 사내 커플이었는데 남자친구가 다른 곳으로 이직했어요. 확실히 사내 커플일 때는 이래저래 눈치 많이 보며 쉬쉬하고 만났는데 요즘은 자유롭게 만날 수 있어서 너무 좋아요.”

주연 대리가 그때를 추억하는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전 대리님이 본부장님 짝사랑하는 줄 알았어요. 제가 완전히 오해했었네요.”

지연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에이~ 이강현 본부장님은 완전 그림의 떡이죠! 절대 가질 수 없는 연예인 같다고나 할까? 그리고 진짜 럭키하게 본부장님 여자친구가 된다고 해도, 얼마나 괴롭겠어요. 저 정도 생기고 저런 능력 가진 남자친구 있으면 전 누가 채갈까 걱정돼서 잠도 못 잘 것 같은데. 어휴~ 생각만 해도 피곤한 인생이 될 거예요.”

주연이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음……. 그래도 딱 한 달만 내 남자였으면 좋겠네요. 어떤 기분인지 한 번만 느껴보게.”

그렇게 말하면서 주연은 무슨 상상을 하는지 즐겁게 소리 내어 웃었다.


“아, 맞다! 과장님 이따 영업부와 함께하는 미팅에 들어오세요?”

“네, 저도 초대되어 있더라고요.”

지연이 속해 있는 기획실은 이강현 본부장이 이끄는 전략기획실 산하에 있는 팀 중 하나였고, 오늘은 분기마다 진행하는 영업부와 전략기획실의 회의가 있는 날이었다.


“과장님, 오늘 회의 참석하시고 놀라시면 안 돼요”

“놀라다니요? 왜요”

“과장님 말로만 들어보셨던 용호상박을 실제로 보게 되실 거예요.”

“용호상박?”

“저희가 붙인 말인데, 용은 영업부 차민우 상무님이고 범은 우리 이강현 본부장님. 아, 우리 본부장님 직함은 전무님이에요. 근데 다들 본부장님으로 불러요”

“그런데 왜…….”

“차민우 상무님이랑 이강현 본부장님이 사이가 별로 안 좋거든요. 평소에 어떤지까지는 잘 모르겠는데, 회의 때는 의견 충돌이 꽤 세요. 어쩔 땐 진짜 용이랑 범이 싸우는 느낌, 막 물어서 뜯어먹을 듯한 분위기라니까요.”

주연 대리는 잠시 상상하듯 먼 곳을 쳐다보았다.


“두 분 다 잘생겨서 좀 친하게 지내면 모두가 보기에도 좋겠구만. 근데 두 분 모두 얼굴들이 너무 잘생겨서, 싸우는 모습도 멋지다는 아이러니가 있어요.”

지연은 주연이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었다.


‘차민우, 남자답게 잘생기긴 했지. 그런데 차민우 얼굴이 이강현 본부장님 얼굴에는 비할 바가 아닌 것 같은데?’

차민우는 선이 굵고 조금은 거친 남자다운 느낌이 강했다.

반면에 이강현 본부장은 팔다리가 길고, 슈트 차림으로도 알 수 있는 잔근육이 발달한 최적의 비율을 가진 외국 모델 같은 느낌?

피부도 하얗고, 어쩔 땐 여자보다도 더 예쁜 곳도 있어 보이고.

그 서늘한 눈빛만 아니면 영락없이 모델이라고 오해할 듯했다.


‘아무튼 회의에서 차민우 눈에 안 띄게 조심조심해야지.’

몇 시간 후, 약 50여 명이 회의실에 모였고, 지연은 조금이라도 덜 눈에 띄게 최대한 회의실 구석으로 가 앉았다.

곧 시작된 지난 분기 리뷰, 각 팀의 팀장들이 나와 발표를 끝내고 나서 질의응답 시간이 되자 치열한 논쟁이 오고 갔다.


“지난 분기는 작년과 비교하면 서포트가 많이 부족했습니다. 상품 기획은 그렇다 쳐도 특히 광고 쪽이 많이 약했다는 현장 피드백이 많았어요. 각 광고 뷰 수를 체크하고 계신 겁니까?”

영업 팀장들에 이어 차민우가 공격적인 의견을 제시했다.

오늘의 먹잇감은 기획, 특히 마케팅이었다.

광고 뷰 수를 묻는 의도는 뻔했다.

너희가 쓴 돈에 비해 광고를 본 사람이 대체 얼마냐고, 그게 제품 판매에 얼마나 도움이 되었냐고 돌려 묻는 거였다.


“광고 뷰 수는 충분했습니다. 오히려 지난 분기 대비 15% 늘어났죠. 하지만, 광고비는 아시겠지만 영업 이익 대비 투자하게 됩니다. 영업에서 충분하게 매출 타깃을 맞추지 못하고 있는데 광고만 계속 내보낸다고 될 일이 아니죠. 아까 발표하셨듯이 영업 이익이 마이너스 12%입니다. 대체 안부터 보여주셔야 그에 맞춰 제안하지 않겠습니까, 차민우 상무님?”

강현이 고저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목소리에 감정이 섞여 있진 않았지만, 지연은 왜인지 그의 목소리에서 으슬으슬한 서늘함이 느껴졌다.


“오! 드디어 시작됐네요, 강현 본부장님 파이팅!”

옆에서 주연이 아주 작은 목소리로 지연의 귀에 소곤댔다.

그 뒤로 30분이 넘게 차민우와 이강현의 날카로운 설전이 오고 갔다.

처음 참석한 지연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이 상황이 매우 익숙해 보였다.


‘강현 본부장님 멋지네. 나도 언젠가…… 저렇게 강하고 멋지게 팀을 대변하고 싶다.’

논쟁하는 강현은 막힘이 없었고, 거기에 공격적인 전략을 제안하여 상대방을 제압했다.

차민우도 언변으로는 뒤지지 않는 캐릭터였지만, 이번 회의에서 좀 밀리는 듯 보였다.


“그래서 전략기획실에서는 다음 분기 준비를 위해 TF를 구성할 예정이며 프로젝트 유닛에는 기획실에서 총 5인이 참여할 예정입니다. 저와 설동석 차장, 은지연 과장, 이주연 대리, 고강식 사원입니다. 기획안 업데이트 완료되면, 영업 쪽에 관련해서 미팅 요청하겠습니다.”

갑자기 강현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호명되자 지연은 깜짝 놀랐고 자신도 모르게 번쩍 고개를 들어 차민우를 쳐다보았다.

미팅룸 앞쪽에 앉아 있던 민우가 그녀를 발견하고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지연은 퍼뜩 놀라, 모르는 척 눈길을 돌렸는데, 하필이면 민우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강현의 눈과 딱 마주쳤다.


‘왜 둘 다 지금 나를 쳐다보는 거야!’

지연은 서둘러 눈을 내리깔고 컴퓨터를 보며 메모를 하는 척했다.


“알겠습니다. 새로운 광고는 현장에서 소비자들의 반응을 피부로 느낄 수 있게 좀 만들어 주셨으면 좋겠네요. 기대하겠습니다, 이강현 본부장님.”

민우가 강현에게 말을 하며 지연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회의가 끝나고 얼마 안 있어 도착한 민우의 메시지를 보고 지연은 크게 한숨을 쉬었다.


[같은 회의에 들어왔었는데 자리에서 인사도 못 했군.]

[인사 안 해주셔도 돼요. 아니, 그냥 모르는 척해주시는 게 제일 좋습니다. 차민우 상.무.님.]

인사는 무슨 인사. 우리가 인사할 사이야?

곧 이혼할 사이에 뭘 그렇게 살갑게 인사하겠다고.


[그날은 얘기 없이 나와서 미안해. 내가 경황이 없었어.]

그런 얘기를 들었는데 경황이 없었겠지.

지연은 답장조차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예전에 그런 말을 진짜 했다면, 미안해. 제정신에 한 말이 아닐 거야.]

3년간 그와 함께 사는 동안 한 번도 듣지 못했던 ‘미안하다’는 말을 그에게서 처음으로 들었다.

그런데 이 미안하다는 말이 지연의 기분을 더 나쁘게 했다.

차민우, 너에게는 그런 말을 한 것만 미안한 거야? 뭐가 정말 미안한 건지 모르는 거야?

지연은 그의 메시지를 더는 보고 싶지 않아 핸드폰을 가방에 넣어버렸다.

민우는 지연의 답장을 기다렸으나, 기다려도 오지 않자 한참을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 내려놓았다.

지난번 둘의 만남 이후 지연에게 뭔가 미안한 마음이 생겨버렸다.

함께 살면서 한 번도 이런 감정이 생기지 않았었는데.

게다가 오늘 아침에는 여러 가지 생각으로 기분이 좋지 않았는데 지연에게 답장도 없자 기분이 더욱 나빠졌다.

아침, 세아는 출근 준비로 바쁜 민우를 붙잡더니 갑자기 머뭇거리며 말을 꺼냈다.


“민우 씨, 나 말할 게 있는데 말하면 들어줄 거죠?”

“응, 말해봐.”

“사실 필요한 게 좀 있어서요.”

“뭐가 필요한데? 필요한 거 있으면 나에게 말해. 사줄게.”

“아니 그게, 내가 매번 당신에게 말해서 뭘 사려면 당신도 나도 매번 번거로울 거고, 나도 또 개인적으로 필요한 것도 많이 있고 해서요. 특히나 집안일 할 때 필요한 게 좀 많아요.”

집안일? 민우는 세아의 말에 잠깐 의문이 들었다.

뭔가 원하는 건 따로 있는데 말을 빙빙 돌리는 것 같아 민우가 빤히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냥 당신 카드 하나 나에게 주면 안 돼요?”

“카드?”

“아까 말했듯이 생활비 할 돈이 필요해서요. 저도 당장 사야 할 것들이 좀 있고…….”

민우가 지갑에서 카드 하나를 꺼내 세아에게 건넸다.


“여기 있어. 한도가 작지 않으니 이것저것 간단한 거 사거나 쓰는 데 큰 문제는 없을 거야.”

“고마워요. 민우 씨~ 최고!”

출근하는 차 안, 민우는 눈을 감고 있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미세하게 인상을 썼다.

생각해 보니 지난 3년간 지연과 함께 살면서, 그녀에게 생활비라는 걸 준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거였다.

물론 그녀 집이 워낙에 잘사니 돈 걱정을 할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에게 남편으로서 생활비를 준 적은 없었다.


‘은지연은 뭐로 생활한 거였지? 친정에서 돈을 받아썼던 건가?’

잠시 이런 생각을 하며 찜찜한 마음이 들었지만, 곧 고개를 저으며 머릿속에서 생각을 지웠다.

이미 지나간 일, 궁금해봤자 해결도 안 될 일이었다.

***

토요일 아침, 이삿날이 되었다.


“그건 가져가시면 안 되고요, 아니 아니요~.”

이사도 혼자 살게 되는 것도, 모든 게 처음인 지연은 이사가 이렇게 큰일인지 몰랐던지라 몸이 10개라도 모자랄 것 같았다.

포장 이사의 광고만 보고 순진하게 몸만 새로운 집에 가면 되는 줄 알았던 지연의 새로운 경험이었다.

게다가 지연 자신의 짐만 가져가고 민우의 것은 두고 가야 하다 보니 지연이 이리저리 다니며 이삿짐센터 직원분들에게 하나하나 알려줘야만 했다.

가져가는 짐에는 미리 포스트잇을 붙여 두었지만 그래도 혹시 뭔가 두고 가면 안 되니 하나하나 살폈다.

잘못해서 짐을 두고 갔다가 혹시라도 다시 이곳에 와야 한다면! 생각만 해도 싫었다.


“고객님, 이건 어떡할까요?”

“그건 넣어주시면 돼요.”

“이 상자는요? 저 작은방에서 나왔는데요.”

“그건 넣어주세요!”

가구 대부분은 지연이 결혼하며 혼수로 가져온 가구인지라 가져가도 되었지만, 지연은 한두 가지를 제외하고는 두고 가기로 했다.

두고 가면 차민우가 알아서 하겠지.


“침대는 가져가시나요?”

“아니요, 그건 분리해서 버려주세요. 처리 비용 드릴게요.”

빠르게 짐 대부분을 뺐고, 이제 새로운 집으로 출발할 시간이었다.


“진짜 안녕이다. 나에게 다시는 그런 시간이 오지 않기를 바라.”

이사한 집에는 아직 새로운 가구가 다 들어오지 않아 우선은 일부 짐은 상자째 두기로 했다.

모두 정리하려면 몇 주 더 걸릴 듯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이삿짐센터 사람들이 돌아가고 새로운 집에 혼자 남자 지연은 거실에 벌렁 드러누워 통창 가득 들어오는 햇살을 가득 느꼈다.

이제는 진짜 혼자가 되었는데, 오히려 외롭지 않았다.

짐들을 대충 정리하니 저녁 시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지연은 우선 집 주변을 살펴보기로 했다


“아, 맞다. 여기 2층이 프라이빗 운동센터였지! 당장 할 것도 없는데 가서 구경이나 해 볼까? 이후에는 근처에 뭐 있나도 살펴보고.”

체력 좋은 지연은 바로 레깅스와 티셔츠로 갈아입고 밖으로 나왔다.

두 집만 쓰는 프라이빗 운동센터라니. 참 자신이 산 집이지만 좋구나 싶었다.

문을 열자 보이는 운동센터 내부는 크지 않은 거실만 했고, 2대의 러닝머신과 근력 운동 기구 3~4가지가 배치되어 있었다.

들어가자 이미 누군가 운동을 하고 있었는데, 그 사람은 큰 통창을 바라보면서 뛸 수 있는 러닝머신에서 빠르게 뛰고 있어 뒷모습만 보였다.

지연이 들어온 지도 모르는 듯싶었다.


‘윗집 이웃이겠지?’

아직 인사도 안 한 이웃과 함께 여기에서 첫 인사를 하는 건 영 어색할 듯싶어 뒤로 돌아서려던 찰나, 운동하던 이웃님이 갑자기 러닝머신에서 내려 땀에 흠뻑 젖은 티셔츠를 벗기 시작했다.

웃옷을 벗고 숨차하는 그와 눈이 마주친 지연은 ‘오마이갓’을 마음으로 외쳤다.


“은지연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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