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귀엽네, 은지연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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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귀엽네, 은지연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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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귀엽네, 은지연 씨
2022.08.29.
“네? 본부장님 집이요?”
자신이 잘못 들은 것 같아 앵무새처럼 반문하고는 놀란 눈으로 강현을 쳐다보았다.
“집에 가서 함께 작업합시다. 끝나면 바로 집으로 가기도 쉽고. 지금 시간으로는 수정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없고, 아침 회의 전까지 완료해서 최종 리뷰까지 하려면 메일이나 전화는 너무 번거로울 거 같습니다.”
“아……. 알겠습니다.”
강현이 너무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자, 지연도 왠지 그러는 게 맞을 것 같았다
“은지연 과장님, 오늘 차 가지고 왔습니까?”
“아니요, 오늘은 걸어왔습니다.”
“그럼 지금 바로 짐 챙겨서 제 차로 가시죠.”
둘은 곧 집에 도착했고, 정신 차리도록 각자의 집에서 씻고 30분 뒤에 강현의 집에서 만나기로 했다.
‘이렇게 늦게 본부장님 댁에 가다니, 이래도 되나 몰라. 근데 지금 상황에서는 시간 줄이는데 이게 최선이긴 하지. 그렇다고 본부장님이 우리 집에 오는 것도 웃기고.’
지연은 이런저런 생각이 많이 들었지만, 곧 머리를 흔들며 생각을 지웠다.
그러고는 늦지 않게 빠르게 샤워를 하고는 편한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고 노트북을 챙겼다.
딩동-
강현이 씻고 거실로 막 나오는 찰나, 지연이 집으로 왔다.
“들어와요.”
집 문을 열어주는 강현에게서 상쾌한 보디 샤워 냄새가 폴폴 풍겼다.
“앉아요. 저기 테이블에서 하도록 하죠. 디카페인 커피 괜찮습니까?”
강현의 집은 그의 성격만큼 깔끔하였고 군더더기 없는 심플한 디자인의 모던한 가구들이 채워져 있었다.
“네 본부장님. 감사합니다.”
둘은 시간을 더 끌 것 없이 바로 업무를 시작했다.
주연이 만들던 파일까지 지연이 업데이트를 해야 했기에 지연은 사력을 다해 초집중하였다.
새벽 3시가 되어가던 시간, 드디어 모든 파일을 업데이트 완료하고 강현의 승인까지 받고 나자 정말 하늘로 날아갈 것 같았다.
이제 설 차장과 고 사원의 파일을 받아 합치기만 하면 되었다.
지연은 혹시 몰라 핸드폰에 미국팀과의 온라인 회의 시간 30분 전으로 알람을 만들어 두었다.
“수고 많았어요, 지연 과장.”
강현이 환하게 웃으면서 지연을 칭찬해 주었다.
지연이 처음 보는 그의 웃음 짓는 모습이었다.
‘와……. 뭐 이렇게 잘생겼어.’
피곤함과 함께 이성적인 사고가 어려운 새벽 3시, 지연은 강현의 웃음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저는 유럽팀과 다른 전화 회의가 있어서 잠시 통화 좀 하고 오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강현의 일정은 정말 최악에다 강행군인 것 같았다.
매일매일 끊임없이, 쉬는 시간도 거의 없이 해외 팀과 통화나 회의를 이어가고 있었다.
‘프로젝트 때문에 우리 팀과 많은 시간 같이하시지만, 전략기획실 산하에 팀이 많으시니…….’
약 10분 후 자리로 강현이 돌아오자, 테이블에 엎드려 졸고 있는 지연이 보였다.
충분히 피곤할 만한 시간이었다.
깨워서 집에 보내야 하나 잠시 고민이 되었지만, 미국팀과의 회의가 4시간여 남은 시간이라 그냥 재우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강현은 지연을 조심스레 안아 들고 자신의 침대에 눕혔다.
[띠리리리- 오전 7시 30분입니다.]
지연의 눈이 번쩍 떠졌다.
저 소리는 지연이 미국팀과의 화상회의 30분 전으로 맞춰놓은 알람 소리였다.
“뭐? 오전 7시 30분?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어?”
지연은 한순간 멍-하게 방을 둘러보았다.
“근데 여기 어디지?”
몇 초 지나자 자신의 방이 아닌 것을 깨닫고는 두 눈이 커졌다.
어제 어떻게 잠든 지도 모르게 잠들어 버려, 자신이 이 방에 어떻게 들어왔는지 전혀 기억에 없었다.
‘아이고, 어쩌다가 잠든 거니 은지연아.’
지연이 냉큼 일어나 방 밖으로 나오자 막 욕실에서 샤워하고 나오는 강현과 마주쳤다.
“본부장님, 죄송합니다. 제가 저도 모르게 잠들어서. 빠르게 파일 확인하겠습니다. 설 차장님과 고 사원 파일도 얼른 점검하겠습니다.”
방금 막 일어난지라 목소리가 잠겨 이상한 소리가 났지만, 아닌 척 최대한 빠릿빠릿하게 이야기하였다.
“괜찮습니다. 제가 각 파일 확인했고, 최종 파일로 합쳐놨습니다. 다들 완벽할 정도로 잘 준비해 주셔서 수정이 전혀 필요 없었습니다. 25분 뒤 회의이니 얼른 세수라도 하시든가요. 새 칫솔은 거울 앞에 두었어요.”
지연은 그 말을 듣고 두 눈을 동그랗게 크게 뜨더니 바로 화장실로 뛰어갔다.
거울에 비친 경악할만한 자신의 모습에 신음이 새어 나왔다.
머리 뒤쪽이 까치집이 된 듯 엉키고 심하게 부풀어 올라 있었고, 눈은 엄청나게 퉁퉁 부어 있었다.
‘엄마야! 이 몰골, 이거 어째. 이러고 본부장님과 마주하다니!’
중요한 회의 준비라 머리를 많이 써서 그런지 강현은 잠이 전혀 오지 않았다.
토요일이니 필요하다면 이따 회의 후에 잠을 청해도 될 듯했다.
그래서 야근으로 굳어 있는 몸을 풀기 위해 새벽 운동을 했다.
운동 후 샤워를 하고 나오니 마주친 은지연은 눈은 퉁퉁 붓고, 머리는 까치집이 되어 업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본인은 똑 부러진 ‘은 과장’에 빙의하여 잠긴 목소리로 빠릿빠릿 이야기하는데 그녀의 얼굴, 머리와 매칭이 안 되어 너무 웃겼다.
그런데, 그게 또, 웃기는데 귀여웠다.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일하려는 스타일이라 회사에서의 그녀는 차갑고 조용한 이미지가 강했는데, 종종 마주치게 되는 평상시의 그녀는 허당끼도 보이고 귀여운 모습도 종종 보였다.
‘귀엽네, 은지연 씨.’
자신은 깨닫지 못했지만, 오랜만에 여자에게 보이는 강현의 관심이었다.
토요일 8시, 한 주를 치열하게 살아온 직장인들에게 아직은 이른 아침.
하지만 강현과 TF 구성원들은 북미팀과 함께 회의를 시작하였다.
새롭게 기획된 제품을 북미 시장까지 확대 판매하는 기획안을 전달하는 미팅으로, 북미 지역 기획팀과 하는 첫 번째 콘셉트 전달 미팅이었다.
강현의 팀이 본사이고 이들이 지사였지만, 북미 시장은 워낙 규모가 크고 예민한 시장이라 새로운 제품 발매나 광고 론칭 시에는 반드시 북미팀과의 조율이 필요했다.
완벽에 가깝게 준비된 자료들, 팀의 노력과 설득력 있는 전달, 그리고 평소 ‘프레젠테이션의 마왕’이라 불리는 강현의 발표까지 녹아든 회의는 더 말할 것도 없이 완벽했다.
거기에 화상회의에 노출된 퉁퉁 부은 눈의 지연 얼굴이 신의 한 수였달까.
「오마이갓! 강현, 그녀의 얼굴이 왜 이래? 어디 아픈 건가?」
북미팀 디렉터가 지연의 얼굴을 보자마자 놀라 물었다.
「아니, 너희들이 매일같이 바꾸고 급하게 요청한 자료들로 매일 밤 새로운 데이터를 만들어야 했기 때문에 그녀와 팀원들은 지난 5일간 잠을 거의 못 잤어. 그렇게 시시때때로 바꾼 자료로 이렇게 근사한 결과물을 만든 그녀와 우리 팀에게 너희는 감사해야 해.」
「강현과 팀, 너무 미안해. 우리는 최선을 다했지만, 너희에게 많은 불편을 준 것 같아. 다음에는 꼭 정리된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시간도 좀 더 여유를 가지고 자료를 요청할게. 너희의 노력과 헌신으로 만들어진 자료는 완벽했어. 너희가 말한 콘셉트를 잘 이해했고, 북미 시장에도 동일한 콘셉트로 세일즈를 시작할 수 있는 희망이 생겼어. 우리가 잘 준비할게.」
「부디 그래 주길 바랄게.」
프로젝트팀의 그간 노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물론 앞으로 다가올 더한 순간들이 예상되었지만.
10시쯤 미팅이 끝나고 북미팀이 온라인 미팅에서 나가자 강현이 팀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첫 시작이 아주 좋네요. 앞으로 더 기대됩니다. 지난주 야근도 많았고, 주말인 오늘까지 고생하셨는데 월요일엔 모두 오후 출근하시죠.”
“감사합니다! 본부장님 수고 많으셨어요!”
끝난 회의에 긴장이 한순간에 풀어져 지연이 테이블 위로 쓰러지듯 엎드렸다.
이런 치밀한 긴장감 넘치는 회의가 너무 오랜만이었던지라 생각보다 더 긴장했었나 보다.
“수고했어요. 오늘 자료 준비도 그렇고 PT도 훌륭했습니다.”
“수고 많으셨어요, 본부장님. 잠도 못 주무신 것 같은데 너무 피곤하시겠어요.”
“괜찮습니다. 그나저나 미팅 때 보니 영어 실력이 상당하던데 계속 연습하는 것 같군요.”
“감사합니다. 아직 많이 모자라서 얼마 전부터 다시 공부하고 있어요. 요즘은 앱도 많이 있고 온라인에 좋은 자료들이 많아서 집에서 혼자 하고 있는데 연습 상대가 없어서 확 늘지는 않네요. 바쁜 프로젝트 좀 끝나면 영어학원에 다녀야 하나, 여러모로 고민 중이에요.”
“그렇군요. 필요하면 말해요, 언제든지 스피킹 연습 상대가 돼줄 테니.”
“네?”
“영어 말할 일이 별로 없어서 연습 상대 있으면 좋겠다면서요. 제가 해 줄 테니 필요하면 말하라고요.”
강현이 노트북을 닫으며 지연을 쳐다보았다.
“원어민은 아니어도 제 영어 실력 꽤 쓸만합니다. 특히 발음은 좋다는 얘기 많이 들었어요.”
강현의 자신감 넘치는 말에 지연의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본부장님 영어 쓸만한 거, 당연히 알죠.
버터 듬뿍 바른 스테이크처럼 원어민 저리 가라 넘나드는 그 영어 발음, 거칠 것 없는 말솜씨, 알다마다요.
“네, 말씀만이라도 감사합니다. 본부장님.”
“농담 아니고 진심입니다. 저도 요즘 영어로 말할 일이 해외팀과의 미팅밖에 없던지라 말 상대가 필요했었는데 마침 잘됐네요. 언어라는 게 끊임없이 연습하고 말하지 않으면 잊게 되고 어렵게 되거든요. 내일은 뭐 해요? 괜찮으면 점심 먹으면서 한두 시간 연습하는 건? 전 주말마다 해도 좋습니다.”
“아……. 네? 내일?”
“아, 주말은 남자친구와 데이트가 있으려나?”
“아니에요! 남자친구 없습니다! 좋습니다, 내일 점심!”
얼떨결에 대답을 한 지연이 아차 싶었다.
“좋아요. 먹고 싶은 메뉴 있으면 미리 알려주세요. 어디 갈지 생각해 둘 테니.”
“네……. 감사합니다, 본부장님.”
“자, 그럼 아침 먹고 헤어질까요? 바로 가야 합니까?”
“아니요. 좋습니다, 아침.”
지연은 순식간에 결정되어 버린 이 사태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본부장님과 영어 연습? 주말마다 점심 먹으면서?
이거 이렇게 해도 되려나? 이분은 애인도 없는 거야? 아니면 애인 있는데 이해심이 좋으신 건가?
수많은 생각이 지연의 머릿속을 채우며 혼란스럽게 하고 있는데 갑자기 고소한 냄새가 훅 하니 났다.
“혼자 산 지 오래돼서 간단한 먹을거리는 쉽게 만들 수 있어요. 먹을 만은 할 거예요. 제가 한식은 잘 못하는데…….”
“한식은 제가 잘하니 전혀 걱정하지 마세요. 자신 있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오른손을 번쩍 들어 말했다.
하지만 곧 자신의 돌발 행동을 깨닫고는 지연이 헙! 하고 입을 다물며 팔을 내렸다.
‘한식은 내가 잘하니 뭘 걱정하지 말라는 거야. 팔은 또 왜 들어. 은지연, 피곤해서 정신이 나갔구나.’
후회가 가득한 표정을 하고는 고개를 가로저었지만 이미 늦은 후회였다.
지연의 말과 행동이 진심으로 재미있었는지 강현이 고개를 젖히더니 크게 소리 내 웃었다.
“좋네요. 한식은 지연 과장님 믿고 먹고 싶을 때 부탁하면 되니까. 잘 부탁합니다. 이웃님.”
“죄송합니다.”
“뭐가 죄송하다는 거예요. 덕분에 즐거웠는걸요. 자 음식이 되었으니 먹어요.”
지연의 시무룩한 표정을 보며 입에서 미소를 지우지 못하던 강현이 그녀 앞으로 음식을 내놓았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스크램블드에그와 베이컨, 거기에 프렌치토스트가 먹음직스럽게 큰 접시에 놓여 있었다.
크게 한입 입으로 넣으니 단짠단짠의 궁합이 최고여서 절로 ‘흐응~’하고 만족스러운 소리가 입에서 흘러나왔다.
창피했던 조금 전을 까맣게 잊은 듯, 맛있는 음식에 즐거워하는 지연이었다.
“맛있어요. 본부장님! 정말 입에서 살살 녹아요.”
“맛있다니 다행이네요. 저도 지연 과장님의 한식 먹어보고 싶으니 빨리 초대해 주세요.”
“앗! 네……. 한식.”
가벼운 대화와 함께 맛있는 아침을 먹으니 즐거웠지만, 역시나 밤을 새우다시피 한지라 훅 하고 피곤이 몰려왔다.
최근 잠도 거의 못 잔 데다 회의가 끝나 긴장이 풀렸기 때문이었다.
“본부장님, 너무 잘 먹었습니다. 설거지는 제가 할게요.”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주말마다 청소해 주시는 분이 오시는 분이 계셔서, 이따 오셔서 정리해 주실 겁니다. 어서 가서 쉬세요.”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맛있는 아침 정말 감사했어요, 본부장님. 너무 맛있었어요.”
“저도 함께 먹어서 더 좋았어요. 그리고 회의 수고했어요, 그럼 봅시다.”
“내일? 아, 네. 영어 연습. 내일 뵐게요.”
지연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집으로 향했다.
좀 전까지만 해도 등 대면 바로 잠들듯 피곤하더니, 막상 누우니 잠이 바로 오지는 않고 아까 상황이 머릿속을 가득 채워 이불킥만 해댔다.
“왜 자꾸 생각나는 거람.”
환하게 웃는 비현실적으로 잘생긴 본부장님의 얼굴이 눈을 감아도 눈앞에 자꾸만 떠올라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잠을 청하려 해도 자꾸만 떠오른 그의 모습을 지우지 못해 지연이 잠든 것은 한참이 지난 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