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그의 이름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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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그의 이름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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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그의 이름은 없었다
2022.09.01.
다음 날 아침, 번쩍 눈이 떠진 지연은 이불에서 꼬물거리면서 시간을 끌었다.
‘본부장님, 농담은 아니시겠지? 근데 몇 시에 어디서 만나는 거지? 혹시 이미 문자를 보내셨나?’
이 생각이 들자 벌떡 일어나 앉아 핸드폰을 찾았다.
[11시까지 주차장으로 와요. 혹시 특별히 먹고 싶은 것 있으면 알려주고.]
예상대로 아침 일찍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진짜 본부장님과 일요일을 보내는 거였어.”
고개를 가로저으며 한숨을 내쉬었지만, 눈앞의 문자는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였다.
[본부장님이 메뉴 정해주세요. 추천을 환영합니다!]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바로 답장이 왔다.
[그럼 제가 특별히 좋아하는 곳으로 가죠. 분명 좋아할 겁니다.]
11시에 맞춰 주차장으로 내려가니 처음 보는 까만색 독일 브랜드 스포츠카가 앞에 있었다.
‘저번에 탔던 본부장님 차는 이 차가 아니었는데?’
머뭇거리는 지연의 앞에서 차량의 유리창이 내려갔고 안쪽에 이미 타고 있는 강현이 보였다.
“왜 안 타고 멍하니 보고만 있어요? 타요.”
“본부장님 차가 2대예요?”
“스피드를 좋아해서 주말에는 이 차를 탑니다. 어서 타요.”
지연이 쭈뼛거리며 강현의 옆쪽 조수석에 앉았다.
“물론 안전운전할 테니 걱정하지 말아요.”
회사에서는 많은 시간 함께 일하고 바로 어제만 해도 그의 집에서 밤새워 일했건만, 작은 공간 안에 둘만이 있게 되자 뭐가 그리 어색하고 긴장되는지 괜스레 고개를 돌려 밖을 바라보았다.
“왜……왜요, 본부장님?”
갑자기 강현이 상체를 기울여 다가오자 지연은 깜짝 놀라 흡~하고 숨을 들이켜며 몸을 뒤로 물렀다.
“출발하려면 안전벨트를 매야죠.”
“아……그건 제가.”
하지만 강현이 재빠르게 지연의 안전벨트를 끌어다 채워주었다.
“감사합니다.”
긴장해서 그런지 목이 잠겨 삑사리가 나왔다.
“저와 있는 게 어색합니까?”
“아닙니다. 전혀 안 어색합니다.”
새빨개진 얼굴의 지연이 눈 둘 곳을 몰라 당황하며 크게 외쳤다.
“지연 과장, 정말 재미있는 사람이에요.”
강현이 슬며시 웃으며 즐거워했다.
이렇게 많이 웃고 즐거워했던 감정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지연은 놀리는 재미가 쏠쏠했다.
일할 때는 숨기는 건지, 새침하게 감정이 드러나지 않았는데.
평소의 얼굴에는 감정이 하나도 필터링 안 되고 드러나서 놀란 표정, 좋아하는 표정, 재미있어하는 표정, 싫은 표정, 난감한 표정을 다 읽을 수 있었다.
차는 미끄러지듯 출발해 곧 고속도로 위를 달렸다.
“어디 가시는 거예요?”
“춘천으로 갑니다.”
“춘천까지요?”
“혹시 오후에 약속 있어요? 시간 안 되면 다른 곳 갈 테니 말해요.”
“아니, 그런 건 아닌데…….”
“그럼 몇 시간만 나에게 맡겨봐요.”
‘도대체 한 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본부장님과 무슨 대화를 해야 하지?’
하지만 지연의 고민은 아무것도 아니게 둘은 끊임없는 대화를 나눴다.
특별한 소재는 아니어도 소소한 이야기 속에 둘은 생각보다 많은 부분이 통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본부장님, 무슨 음식 좋아하세요? 아니다, 무슨 음식 싫어하세요?”
“싫어하는 음식 별로 없습니다.”
“그래도 별로 안 당기는 건 있을 거잖아요.”
잠시 고민하던 강현의 입에서 의외의 답이 흘러나왔다.
“굳이 말하자면, 카레에 들어가는 당근?”
“우와! 저도예요! 전 생 당근은 너무 좋아하는데 이상하게 익힌 당근은 맛이 없더라고요. 이걸 이해해 준 사람이 없었는데, 신기해요!”
“그렇군요.”
“그럼 한 가지 더! 집에서 제일 좋아하는 공간은 어디에요? 저는 책만 모아둔 방이요!”
“그것도 비슷하군요.”
“책이 방 한편을 채우고 있는 걸 보면 항상 기분이 좋아서 공간을 따로 만들어 뒀거든요. 본부장님과 제가 이렇게 공통점이 많다니!”
‘이런 사소한 거로 이렇게나 좋아하다니.’
강현이 자신도 모르게 미소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소소한 대화들을 나누다 보니 금세 목적지에 도착했다.
“자, 이제부터는 우리 영어로 대화하는 겁니다. 한국어 하면 딱밤 한 대씩.”
“옛 썰~!”
지연이 장난스레 군인처럼 경례하는 포즈로 대답했다.
하지만 두 시간 뒤, 지연의 이마는 3대의 딱밤으로 살짝 빨개져 있었다.
“본부장님 진짜 딱밤 때리실 줄은 몰랐어요! 완전 아파요.”
“비즈니스의 세계는 냉정한 거예요. 오케이?”
강현이 지연의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말했다.
그의 얼굴에는 지연을 향한 부드러운 미소가 가득했다.
춘천에서의 식사는 환상적으로 맛있었고, 딱밤을 맞기는 했지만 강현과의 영어 스피킹 연습도 더할 나위 없을 정도로 좋았다.
웬만한 외국인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그의 스피킹 실력은 완벽했고, 지연이 어려워하는 발음 등은 반복해 주며 연습을 도와주었다.
이대로라면 강현에게 수강료를 지급해야 할지도 몰랐다.
“감사해요, 본부장님, 제 연습 상대가 되어주셔서요. 오늘은 밥도 쏘시고 운전도 하시고 다 하셨네요. 다음번에는 제가 쏠게요.”
“나도 스피킹 연습한 겁니다.”
본부장님. 연습이 필요하실 이유가 전혀 없던데요.
“그리고 고맙다면, 다음번에 한식 만들어 주세요.”
“……!”
“우리 집도 좋고, 지연 과장님 집도 좋고. 장소는 편한 곳으로.”
“그……그럴까요?”
“뭐, 싫다면 어쩔 수 없고요.”
“아닙니다! 좋습니다.”
강현과의 대화는 언제나 은근슬쩍 그리고 빠르게 뭔가가 진행되고 결정되어 정신을 차리기가 어렵다.
“스피킹 연습이라기보다, 놀러 갔다 온 기분이었어.”
늦은 오후 집으로 돌아온 지연은 잠시 창가 앞에 누워 멍하니 밖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더 게으름을 부리고 싶었지만, 아직 정리되지 않은 짐들을 보자 그럴 수가 없었다.
‘오늘이 지나면 또 주중에는 시간이 없어 다음 주말에나 정리할 수 있겠지.’
급하게 쓸 용품들과 옷가지 일부만 정리해둔 터라 아직 포장을 풀지 않은 상자가 여럿이었다.
미리 풀어두면 정리할 때 불편할 것 같아, 옷과 큰 짐 빼고는 상자째로 놔두라고 해둔 터였다.
‘오늘은 꼭 반 이상은 정리해야 해!’
옷은 대부분 정리했지만, 없어진 원피스는 결국 찾지 못했다.
‘이사하면서 잃어버린 건가? 아니면 그 집에다 두고 온 거 아냐? 다시 그 집에 가봐야 하나? 이사하는 날 좀 더 꼼꼼히 봤어야 했는데, 그날 정신이 너무 없었어.’
지연은 속상했지만, 다시 그 집을 가볼 용기는 없었다. 아니 다시는 가고 싶지 않았다.
“그냥 잊어버리기엔 비싸기도 너무 비싸고 무엇보다 너무 아까운데. 아냐, 아깝지만 액땜했다고 치자. 그 집에서의 모든 나쁜 기억들과 앞으로 생겼을지 모를 일들을 막아준 거야!”
속은 상했지만, 괜스레 이렇게 말하며 아름다웠던 원피스를 머리에서 지우려고 노력했다.
몸을 더 바쁘게 하면 다른 생각이 안 들 것 같아, 지연은 더욱 빠르게 몸을 움직이며 상자들을 풀었다.
신발이며, 가방, 책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이 책이 여기 있었구나. 어디 있나 했네.”
지연은 하나하나 정리하며 어디 갔는지 궁금했던 것들을 드디어 찾았다며 좋아했다.
책과 문구용품들이 들어 있던 상자들 사이에 작은 상자가 놓여 있는 것을 발견한 건 정리를 시작한 지 세 시간쯤 지나서였다.
포장 상자가 아닌 작은 서류 상자.
눈에 익은 이 상자는 처음 본 것이 아니었다.
생각해 보니 민우와 함께 살았던 그 집 창고 방에 있던 것을 몇 번 본 기억이 있었다.
“내가 산 게 아닌데, 민우 씨 것 잘못 가져온 거 아냐? 그런 거면 그 사람 만나든 가져다주든 해야 하잖아! 이거 귀찮은데.”
지연은 그냥 열면 될 것을, 상자를 앞에 두고 열지 말지 고민을 했다.
사람들 모두에게는 식스 센스가 있다고 하던데, 이럴 때 하는 말일 수도 있었다.
괜스레 찝찝한 마음이 들어 열기가 꺼려졌다.
“지금 내가 상자 하나 앞에 두고 뭐 하고 있는 거람. 안에 뭐가 있는 줄 알아야 정리를 하든 갖다주든 하지.”
작은 상자를 열자 각종 서류가 눈에 들어왔다.
한눈에 봐도 자신의 것이 아닌 차민우의 것이었다.
“역시나 내 것이 아니었네. 이걸 언제 갖다 준……담.”
투덜거리며 상자를 밀어두려고 하던 그때, 지연의 눈에 들어온 서류들 사이에 보이는 봉투.
그리고 그 위에 쓰여 있는 그녀의 이름.
마치 자석에 이끌리듯 지연의 손이 서류 봉투로 향했다.
조심스레 봉투를 열어 내용물을 꺼내 보았다.
거기에는 지연의 정보들이 빼곡히 적힌 민우와 지연의 혼인 신고서, 그리고 지연의 주민등록증과 각종 서류가 같이 들어 있었다.
평소 운전면허증을 신분증으로 썼던지라, 생각하지 못했던 신분증. 그리고 다른 서류들.
이건 내가 준비했던 자료들이야!
불현듯 생각나는 그때.
***
“민우 씨, 우리 혼인신고는 언제 하는 게 좋을까요? 시간 알려주시면 휴가 낼게요.”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회사에 다니고 있던 그때, 지연은 아직 혼인신고를 하지 않은 게 신경이 쓰여 조심스레 민우에게 물어보았다.
“급하게 할 거 뭐 있지? 1년 정도 살다 신고하는 게 요즘 트렌드라니까 우리도 그때 하지. 사람 앞일은 모르는 거니까.”
민우의 소름 끼치도록 냉담한 반응에 지연은 괜히 그의 기분을 거스르고 싶지 않아 알았다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한동안 잊고 살다 다시 생각났던 게, 둘이 함께 산 지 2년이 다 된 때였다.
지연은 이 문제를 조심스레 다시 민우에게 이야기했다.
“민우 씨, 혹시 시간 내기 어려우면 제가 혼자 가서 신고할게요. 서류만 가져가면 혼자 할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뭐가 그리 안달 나는 건지 모르겠네, 은지연 씨. 이런 거 신고 안 하면 나를 못 잡아둘 것처럼? 내가 어디 도망갈까 봐 걱정되나 보지?”
뭐든지 눈치 보이고 맘이 어려웠던 그때, 그의 비수 같은 말 한마디 한마디에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파도 꿀꺽 삼켜 넘겼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서류 챙겨 둬.”
“알겠어요, 민우 씨.”
일주일 뒤, 지연은 인터넷을 찾고 주민센터를 방문하며 필요한 서류들을 체크했고, 자신의 정보를 모두 기록하고 필요한 서류들을 모았다.
퇴근한 민우가 자신의 방에서 옷을 갈아입는 사이 지연이 노크를 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여기 필요한 서류들과 제 신분증이에요. 제 정보는 다 적어 넣었으니 당신 정보만 적어 제출하면 돼요. 혹시 더 필요한 거 생기면 알려주세요.”
“그러지.”
민우는 지연이 준 서류 봉투를 열어보지도 않고 휙 하고 책상 위에 던져버렸다.
그는 다시금 이런 상황이 짜증 났다.
이런 신고 따위 뭐가 중요하다고 그리 안달 나서 자꾸 하라 말라 보채는 거야.
내가 어디론가 사라질까 봐?
오히려 너 때문에 나의 세아가 괴로워하며 사라졌지. 너 때문에.
민우의 삐뚤어진 마음의 화살이 아무런 잘못도 없는 지연에게 향하며 잘못된 미움이 다시 올라왔다.
가슴 깊이 짜증과 화가 치솟았고 어딘가에 화를 풀고 싶었다.
갑자기 지연의 팔을 거칠게 잡아채고는 그녀를 끌고 침실로 가 침대 위로 내팽개쳤다.
“혼인신고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잖아, 부부 사이에. 네가 날 잡으려면 내가 널 선택할 만한 뭔가 특별한 게 있어야지. 나는 너에게 마음도 없는데 말이야.”
민우는 못된 말을 내뱉으며 제대로 준비도 안 된 지연에게 거칠게 파고들었다.
“민우 씨……. 좀 천천히. 아…… 아파요.”
“부인, 지금은 그런 말보다는 좋다고 해야지, 안 그래? 내가 널 이렇게라도 원하는데.”
민우의 못된 말을 들으며 마음이 갈가리 찢기는 것 같았지만 그를 사랑하는 지연으로서는 그를 도저히 밀쳐낼 수 없었다.
이렇게라도 그에게 닿는 것이 다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무심결에 하면서.
그는 싫다면서도 한번 그녀에게 파고들면 멈출 줄을 몰랐다.
밤새 파고들던 그가 새벽녘 잠들자 지연은 그의 품에서 빠져나와 가만히 엎드려 자는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래도 나를 아주 싫어하지는 않을 거야. 너무 싫으면 닿기도 싫다잖아.
괜찮아, 괜찮아질 거야. 언젠가는…….
그렇게 자신을 위로하며, 지연은 몸과 마음에 모두 버거웠던 밤을 견뎌냈었다.
***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지연이 마련해 준 서류에 민우의 정보는 하나도 기재되어 있지 않았다.
‘설마, 설마……. 말도 안 돼, 차민우. 설마 이렇게까지 나를 기만해도 되는 거야?’
기분 좋았던 일요일이 악몽같이 변해버렸다.
정신이 없어 인터넷으로 살펴볼 생각도 못 하고 뜬눈으로 밤을 새운 지연은 월요일 아침 9시가 되자마자 근처 주민센터를 찾았다.
“가족관계증명서 떼어주세요.”
신분증을 제출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지연이 말했다.
두근두근 심하게 떨리는 마음으로 받아 본 서류에는!
차민우, 그의 이름은 없었다.
서류를 이것저것 떼어보아도 변함은 없었다.
은지연이라는 존재에게 배우자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