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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아무것도 아니었던 시간 (11/85)


11. 아무것도 아니었던 시간
2022.09.05.


그렇게 은지연의 3년간의 결혼생활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있었다.

지연은 멍해진 정신을 가다듬으며 주민센터에서 나와 근처 벤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나쁜 자식, 미친 새끼. 신고조차 안 했었어. 차민우 이 쓰레기 같은 자식…….”

온갖 욕을 해도 울분이 가라앉지 않았다

갑자기 입안에 쓴 물이 올라오고 현기증이 나, 벤치에 고개를 젖혀 기대앉아 두 눈을 감았다.


‘차민우와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그를 사랑했던 그 시간, 나 자신을 희생하며 그에게 맞춰갔던 시간이 아무것도 아니었어?’

온몸이 후들거려 당장 자리에서 일어서기가 힘들었다.

다행히 본부장이 프로젝트팀은 월요일 오후 출근을 허락해 준 터라, 출근 전 정신 차리도록 마음을 가다듬어야 했다.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해. 허둥지둥할 때가 아니야.’

절대 이런 쓰레기 같은 자식 때문에 소중한 일상에 영향을 주고 싶지 않았다.

지연은 바로 이혼 관련 서류들을 맡겨둔 김 변호사에게 연락해서 그의 사무실에 방문하였다.


“뭐라고요? 지연 씨와 차민우 씨의 혼인신고 자체가 안 되어 있었다고요? 아……. 이런 상황은 아예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

김 변호사가 깜짝 놀라며 난감해했다.


“두 분의 정상적인 혼인이 유지되었다는 전제하에 이 서류들이 작성되었기 때문에, 혼인신고가 없었다면 이 내용은 무효가 됩니다. 혼인 자체가 없었으니 두 분은 법적으로는 남남, 즉 이혼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는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지연을 쳐다보았다.


“지연 씨가 사실혼이었던 것을 증명하고 소송을 하여 위자료와 재산분할을 받을 수는 있지만, 전에 전제한 위자료보다는 극히 적은 금액일 것입니다. 그리고 차민우 씨는 법적인 부부가 아니다 보니 저 위자료를 지급하지 않고 소송 판결 비용만 지급해도 될 테고요.”

돈은 전혀 문제가 아니었다.


“그리고 이 결혼에 차민우 씨의 외도가 문제 된 것이 맞다면, 사실혼 관계에서도 상간녀 소송도 가능합니다. 여러 가지 잘 고민해 보시고 알려주세요.”

등을 토닥이는 김 변호사의 손에 지연의 떨림이 전해졌다.


“지연 씨의 이혼도 놀랄 일이었는데, 혼인신고조차 안 되어 있었다니……. 어떻게 위로를 드려야 모르겠네요. 상상도 못 했던 일이라 그쪽으로 체크를 못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변호사님이 죄송하실 게 뭐가 있겠어요.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벌인 차민우가 나쁜 놈이죠.”

‘그리고 그 사람만 믿으며 서류 한 통 안 떼어보고 세상에서 떨어져 바보 멍청이같이 살았던 제 탓이기도 하구요.’

변호사 사무실을 나온 지연은 속이 쓰리고 메슥메슥 토할 것만 같아 한참을 벽을 짚고 서 있었다.

정신없이 흔들리는 몸을 이끌고 어떻게 집까지 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식탁에 앉아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 자신을 깨달았다.

하얗게 질린 얼굴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고 몸은 으슬으슬 떨렸지만, 몸 상태를 무시한 채 억지로 옷을 갈아입고 옷매무새를 매만졌다.

마치 유령처럼 보이는 자신의 모습이 거울 속에 비쳤다.


 
두 손으로 얼굴을 짝 소리 나게 때리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정신 차려. 약해지지 마.”

바짝 말라버린 입안으로 급하게 물을 한 모금 들이켜고는 지하 주차장으로 향했다.

지금 출발하면 아슬아슬하게 1시에 맞춰 사무실에 도착할 터라 몸을 바삐 움직였다.

출근한 지연은 일에 집중하기 위해 그리고 무너지지 않기 위해, 초인적인 힘을 써야 했다.

머릿속에서는 아까 김 변호사와 나눈 이야기들이 뱅뱅 맴돌았지만, 억지로 지우려고 했다.

사실 지금 지연의 몸 상태는 정신적으로 일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전혀 아니었지만, 지연은 고집을 부렸다.


‘차민우, 너 때문에 내 생활에, 내 시간에 티끌만큼도 흠을 내지 않을 거야. 너 같은 사람 때문에 이제는 그러지 않을 거야.’

아무렇지 않은 척 업무를 하고 서류를 챙기는 동안 점점 더한 어지러움이 몰려왔지만 이를 악물고 미련하게 버텼다.

갖은 모멸 속에서도 버틴 시간이 3년이었다.

그리고 그를 좋아하고 사랑한 시간은 10년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그런 시간이 아무것도 아니었다니…….

아무렇지 않을 리 없었다.


“과장님, 얼굴이 너무 안 좋아요. 괜찮으세요?”

“어제 좀 늦게 자서 좀 피곤한가 봐요. 요즘엔 조금만 덜 자도 이렇게 티가 나네요.”

“그런 얼굴이 아닌데…….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입술에 핏기가 하나도 없어요. 어머! 과장님! 과장님!”

아무리 독하게 마음먹는다고 해도 극도의 스트레스가 해일처럼 밀려들었고, 지연은 결국 주연 대리와 대화 중에 혼절하였다.

웅성웅성 사람들이 말하는 소리, 누군가 소리치며 부르는 소리가 멀리서 들리더니 곧 암흑이 지연을 덮쳤다.

무겁게만 느껴지는 눈을 힘겹게 뜨니 새하얀 천장이 보였고 고개를 돌리니 곁에 주연 대리가 앉아 있었다.


“과장님! 괜찮으세요? 정신이 좀 드세요?”

잠시 이 상황을 인지하지 못한 지연이 손에 꽂혀 있는 링거 줄을 멍하니 바라보다 바짝 말라버린 입을 열었다.


“대리님……. 여기 어디예요?”

이상하게 쉬어버린 목소리가 입에서 흘러나오자 지연이 얼굴을 찌푸렸다.


“아까 회의 중에 과장님이 갑자기 쓰러지셔서 급하게 근처 병원으로 왔어요. 조금 전까지 본부장님도 함께 계셨는데 중요한 회의 때문에 사무실로 돌아가셨고요.”

아까 회의 중에 들렸던 삐-하는 이명 소리 뒤엔 기억이 없다.


“제가 모두에게 폐를 끼쳤네요. 미안해요, 대리님.”

“아니에요, 과장님. 모두 놀라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데 본부장님이 자기 차로 병원까지 데리고 오신 거예요. 저도 함께 그 차 타고 왔고요. 좀 어떠셔요? 어디 이상한 데는 없으세요?”

“괜찮아요. 바로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은데…….”

억지로 몸을 일으키려 하자 천근만근 무거운 몸이 잘 움직여지지 않았고 어지러움이 느껴져 결국 다시 누워버렸다.


“무슨 말씀이세요. 우선 링거 하나 다 맞으시고 움직이셔야 해요. 그리고 본부장님도 똑같이 말씀하셨어요, 과장님 오늘 푹 쉬라고요.”

“그럴 수는 없는데…….”

“급한 건 저에게 말씀 주세요. 아무 걱정 하지 마시고 오늘은 충분히 쉬시고요.”

얼마 후, 주연 대리는 일 때문에 사무실로 가봐야 한다며 미안해하며 병실에서 나갔다.

그녀가 떠난 병실은 너무나도 조용했다.

남겨진 지연은 잠시 눈을 감았고, 곧 밀려드는 자책감에 머리가 아파져 왔다.


‘이게 무슨 난리야. 왜 사적인 일로 회사 일에 피해를 주니.’

당장이라도 일어나 다시 사무실로 가서 아무렇지 않게 일하고 싶었지만, 도저히 몸이 말을 듣지 않을 것 같았고 아직도 어지러웠다.

몇 분 더 눈을 감고 있자 불현듯 생각난 아침의 일들이 다시금 머릿속을 꽉 채웠다.

이럴 때 하소연할 수 있는 사람이 친구 하영인지라 잠시라도 연락하기 위해 핸드폰을 찾는데 메시지가 와 있는 것을 발견했다.


[6시쯤 데리러 갈 테니 꼼짝 말고 누워 있어요.]

강현의 메시지.


“죄송해서 본부장님 얼굴을 어떻게 보지.”

같은 팀에 빌라 이웃이라고 이것저것 챙겨주시는데, 자신은 자꾸 폐만 끼치는 것 같아 너무 미안했다.

Rrrr Rrrr-


“하영아”

-너, 아침에 전화했었더라? 미안, 내가 지금 출장으로 지방에 내려와서 계속 미팅하느라 전화 온 지도 몰랐어.

“지금 잠깐 통화 가능해?”

-응, 지금은 괜찮아. 그런데 너 목소리가 왜 이래? 무슨 일 있어? 무슨 일이야?

“하영아…….”

그간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하자 하영이 대뜸 소리 질렀다.


-차민우 진짜 미친 거 아니야? 말도 안 돼! 어떻게 사람이 그래. 와 씨……. 지금 내 앞에 그 자식 있으면 먼지 나게 패주고 싶네, 진짜.

“하아…….”

-그래서 넌 지금 병원이고? 몸은? 괜찮은 거야? 그 자식은 진짜 네 인생에 단 한 번도 도움이 안 되는구나.

전화기로 거친 단어들과 함께 화가 나 거칠어진 하영의 숨소리가 지연에게까지 들려왔다.


-지금 내가 지방이라 바로 못 가서 어쩌니. 지금 네 곁에 누군가 꼭 있어야 하는데. 오늘만이라도 부모님께 잠시 가 있으면 안 돼?

“아니야, 그랬다가는 부모님이 나 뭔가 이상한 거 눈치채실지도 몰라. 혹시라도 내가 실수해서 말 잘못할 수도 있고. 그냥 오늘은 집에서 쉬며 마음 삭이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러지 말지? 너, 너무 걱정되는데…….

“걱정하지 마, 괜찮을 거야. 마음이 너무 힘들면 지금처럼 너에게 또 전화할게.”

-지연아.

“……응.”

-이제 진짜 정리하자. 아직 네 마음이 그 인간에게 향하고 있는 거 알고, 또 다른 마음으로는 어떻게든 그 사람들에게 갚아주고 싶어 하는 거 모르는 내가 아닌데, 이건 아닌 것 같다. 아니 진짜 아니야! 그 자식 곁에 한시라도 더 있을수록 너만 상처받아. 차민우나 그 여자, 그럴 가치가 없는 사람들이야. 그리고 너희 시엄마도!

“…….”

-우리 인생이 얼마나 짧은데, 그리고 꽃같이 아름답게 보내야 할 순간들인데. 왜 그런 가치 없는 것들 때문에 네 인생을 허비해. 너 이제는 행복해지고 싶다고 했잖아. 그래서 다시 일도 하고 홀로서기 한 거잖아. 다른 사람이 아닌 네가 행복한 것에 집중해 보자, 응? 사람이…… 과감하게 포기해야 할 때가 있어. 특히 나쁜 것들, 아닌 것들은 한시라도 더 빨리 포기하고 끊어내야 해. 그래야만 너의 진정한 행복이 찾아와.

하영의 목소리에 물기가 서린 것이 통화 중에도 느껴졌다.

가족처럼 지연을 생각하는 친구의 절절한 말에 가슴에 뜨거운 것이 솟아올랐다.


“고마워 하영아. 나보다 더 나를 생각해 줘서. 내 남편이었던 작자보다 네가 더 낫구나.”

-야! 그런 미친놈과 나를 비교하지 마, 그건 욕이야!

“그러네, 미안. 고마워 하영아. 네가 한 말들 잘 생각해 볼게.”

-생각해 보긴 뭘 생각해 봐! 그냥 그렇게 해!

“알았어, 그럴게. 서울 올라오면 바로 만나자.”

-그래. 내가 얼른 일 끝내고 올라갈게. 그때 다 풀자, 알았지? 조금만 기다려 내 사랑스러운 친구야.

똑똑-

지연은 잠시 잠이 들었다가 노크 소리에 눈이 떠졌다.

하영과 통화한 지 어느새 1시간이나 지나 있었다.


“네, 들어오세요.”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강현이었다.

6시에 온다더니 아직 5시도 안 되었는데 그가 와 있었다.


“본부장님.”

“좀 일찍 왔습니다. 내가 늦으면 지연 과장 그 몸을 해서는 비틀거리며 먼저 갈 것 같아서.”

남에게 폐 끼치는 걸 싫어하는 지연은 강현의 말대로 그럴지도 몰랐다.

강현이 가깝게 다가와 섰다.


“몸은 좀 어때요?”

새파랗게 질린 얼굴에 억지로 미소를 짓는 지연의 모습이 안쓰러웠다.


“다 나았어요.”

“정말이에요? 지금은 그나마 조금 나아 보이는데. 아까는 너무 하얗게 질려 있어서 저도 많이 놀랐습니다. 퇴원해도 괜찮겠어요? 너무 안 좋으면 하루 이틀 더 입원해 있는 건 어때요?”

“아니에요. 많이 좋아졌어요. 남은 시간 집에서 쉬면 평소 몸 상태로 돌아올 것 같아요.”

“알겠습니다, 믿어보죠. 퇴원 준비는 다 했으니 바로 제 차로 가면 됩니다.”

집으로 가는 차 안, 둘 사이에는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오늘……. 몸 상태도 안 좋았겠지만, 혹시나 안 좋은 일이 있는 건 아닌지 걱정되는군요.”

“그런 건 아니에요. 요새 이사하고 정리하느라 좀 피곤했나 봐요.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개인적인 일로 업무에 영향을 미쳐서 너무 죄송하네요.”

“그래서 물어본 거 아닙니다. 혹시라도 안 좋은 일이 있었다면 부디 나아지길 바란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뿐이에요. 아니라니 다행이군요.”

강현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지연의 어깨를 토닥였다.


“병원 데려다주신 게 본부장님이라면서요, 감사드려요. 그리고 업무 중에 이런 일 생겨 너무 죄송해요. 저 때문에 이것저것 신경 써주시고……. 제가 보답해야 할 일이 많네요. 앞으로 이런 일 없도록 조심하겠습니다.”

“아픈 사람이 너무 이것저것 고민이 많군요. 정말 아무것도 아니니 걱정하지 말아요. 이 정도는 얼마든지 도와줄 수 있습니다. 같은 팀으로서 같은 빌라 주민으로서.”

“정말 감사해요, 본부장님.”

“그리고…….”

“……?”

“지연 씨에게 관심이 있는 남자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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