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관심 있다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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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관심 있다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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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관심 있다고 말했습니다
2022.09.08.
“네? 본부장님. 지금 뭐라고 하신…….”
처음엔 자신이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하……. 이런 상황에 이야기하는 게 아니었는데.”
강현이 실수했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제가 잘못 들은 거죠?”
“은지연 씨에게 남자로서 관심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미 알고 있었을 거로 생각했는데, 우리의 대화를 곱씹어 보니 전혀 모르는 것 같더군요.”
지연은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 같은 팀원이자 동네 주민이라서 그러신 줄로만…….”
지연의 말에 강현이 피식 웃었다.
“길 가는 아무 남자나 붙잡고 물어봐요. 동네 주민과 주말을 함께 보내고 싶은지.”
일부러 가볍게 이야기하는 강현의 말투에도 지연 얼굴의 당황스러움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런 이야기했다고 당장 뭔가 크게 바뀌지는 않을 테니 너무 겁먹지 말아 줬으면 좋겠는데요. 그냥, 제가 은지연 씨와의 시간을 더 만들어 보지 않을까 하는 예상 정도? 아, 그리고 한식은 꼭 얻어먹을 거라는 것도?”
분위기를 바꿔보려는 듯, 강현이 짓궂은 표정을 짓더니 곧 환하게 웃었다.
그 뒤, 집에 어떻게 들어와 침대에 누웠는지도 기억이 잘 나지 않을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
착각이 아니었던 걸까?
언제부터인지 강현의 서늘하고 날카로운 눈매가 종종 부드럽고 따뜻하게 보였다.
눈을 감았지만, 그가 했던 말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워 마음이 어지러웠다.
지연이 집에 들어가는 것까지 확인한 강현은 1층으로 내려와 집 앞 정원을 잠시 걸었다.
정원에서 보이는 지연의 집에 불이 켜진 것이 보였다.
사실 아까 병원에 도착한 시간은 그녀의 병실로 들어가기 훨씬 이전이었다.
도착해서 그녀의 상태를 의사에게 전해 듣고, 퇴원 준비까지 마친 다음 병실 문을 열려고 할 때였다.
병실 안에서 지연의 흥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영아! $#@$#, 이 나쁜 자식이 혼인신고를 안 했었어. 내 3년이 없던 게 되었다고! 그 힘들었던 시간이 의미 없이 사라져버렸다고! 나……. 나 억울해서 어떡하지?”
왠지 더 들으면 안 될 것 같아 강현은 더 깊은 내용이 들리기 전에 자리를 피해 밖으로 나왔다.
평소 지연이 남자친구가 없다고 말한 것을 보면, 현재 진지하게 만나는 남자는 없는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아까 잠시 들었던 말로는 뭔가 복잡한 사연이 있어 보였는데.
‘좀 더 가까워지면 알게 되겠지.’
마음을 좀 더 느긋이 먹기로 했다.
당장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을 알 필요는 없었다.
오랜만이었다, 이런 감정은.
최근 5년간, 스쳐 지나간…… 인연이라 불리기에도 가벼운 관계는 있었어도 깊은 사이로 발전된 여자도 없었고, 관심이 가던 여자도 없었다.
그런데 지연을 만난 후, 그녀에 대해 자꾸 궁금해지고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마음이 커지고 있었다.
은지연을 더 깊게 알아보고 싶었다.
***
민우는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특별히 안 좋은 일이 있던 것은 아니었다.
그냥, 지난 일요일 이후 이런 기분이었다.
세아가 SNS에서 유명한 맛집이라며 꼭 가고 싶다고 우겨서 춘천까지 한 시간 반이나 운전을 해서 갔던 레스토랑.
도착하니 먼 곳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많은 사람이 와서 기다리고 있었고, 1시간 정도는 더 줄을 서야 들어갈 수 있을듯했다.
밖에서 식사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 이렇게 사람 붐비는 데 오는 것을 원체 싫어하는 그였지만, 이미 운전을 해서 오기도 했고 세아가 너무나도 먹고 싶다고 졸라대서 결국 웨이팅 리스트를 올려두고 기다렸다.
“잠시 화장실 좀 갔다 올게.”
“이제 앞에 다섯 팀만 기다리면 된다니 금방 자리 날 거예요. 여기서 기다릴게요.”
오랜만에 나온 민우와의 데이트에 설렜는지 세아는 그의 기분이 별로 좋지 않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민우가 화장실을 가기 위해 레스토랑 안쪽으로 들어갔을 때였다.
안쪽 테이블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설마…….’
소리가 들리는 안쪽으로 고개를 돌려 쳐다보자 그가 아는 얼굴이 있었다.
은지연.
그녀의 건너편에는 남자가 앉아 있었는데 뒤돌아 앉아 있어 뒤태만 보였다.
“@#[email protected]# 진짜 딱밤 때리실 줄은 몰랐어요! 완전 아파요!”
지연이 귀엽게 입술을 삐죽이며 남자에게 이야기하자 남자가 뭐라고 대답하면서 그녀의 머리를 헝클고 있었다.
무척이나 친근한 듯이.
‘뭐지 은지연? 벌써 남자가 생긴 거야? 네가?’
갑자기 민우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 울컥 뭔가가 올라왔다.
누군가 내 것을 허락 없이 함부로 만지는 장면을 본 듯한 느낌.
기분 나쁜 감정을 뒤로하고 화장실로 향했고, 다녀오니 아까 지연이 앉아 있던 테이블은 비어 있었다.
두리번거리며 찾아보았지만, 그녀는 더는 보이지 않았다.
웨이팅 라인 쪽으로 가니 세아가 손을 흔들며 웃고 있었다.
“방금 한 테이블 나가서 네 팀만 기다리면 된대요. 여기 맛있다고 SNS에서 엄청 유명해서 일찍 와도 열 테이블 넘게 기다리는 곳인데 우리는 운이 좋은 것 같아요, 민우 씨.”
“그래, 운이 좋군.”
대충 대답하는 그의 머릿속은 아까 봤던 장면으로 가득 차 있었다.
스멀스멀 모든 게 짜증 나기 시작했다.
주말, 한 시간 넘게 운전해서 사람 많은 이곳에 와 있는 것도.
기껏해야 밥 한 끼 먹으러 한 시간이나 기다리고 있는 것도.
그리고 은지연이 남자를 만나고 있는 걸 목격한 것도.
이런 기분은 시간이 지나도 가시지를 않고 더해만 갔다.
‘이번에 만나면 한번 물어볼까?’
그런데 그녀가 남자를 만난다 한들,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오히려 더 잘된 일이 아닌가?
이 기회에 잘하면 이혼을 조금이라도 더 빨리 당길 수도 있으니.
[다음 우리 만남은 언제지?]
몇십 분이 지나도록 그녀에게서는 답장이 오지 않았다.
[바쁜가?]
하지만 역시나 답장이 없었다.
민우는 짜증 나는 마음에 책상 위로 핸드폰을 던져두었다.
그때였다.
지잉 지잉-
깜짝 놀라 핸드폰을 들어 메시지를 확인하였다.
[XX카드 승인 / 3,000,000원 일시불 / XXXX 백화점]
짜증 나는 마음에 더 불을 붙인 세아의 카드 사용 승인 문자였다.
그녀에게 한도를 말하지 않았지만, 최근 그녀의 씀씀이를 보면 적지 않은 돈을 쓰고 있었다.
피부관리실이며, 백화점 쇼핑을 계속하더니, 최근에는 집의 실내장식을 바꾼다고 가구들 쇼핑까지 하겠다고 난리였다.
세아에게 준 카드의 한도가 월 3천만 원이었는데, 카드를 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한도에 거의 차도록 쓰고 있어 이대로라면 곧 한도 초과였다.
“안 되겠군, 한마디 해야겠어.”
세아에게 아직 하지 못했지만 할 말이 점점 많아졌다.
하지만, 세아에게 잔소리를 해야 한다고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멘탈이 유리같이 약한 세아는 민우의 잔소리를 들을 때면 끝에는 여지없이 눈물을 보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녀의 울음에 마음이 약해졌었는데, 이제는 점점 짜증이 나는 민우였다.
***
삐익 삐익-
“사모님, 한도가 초과하였다는데 어떡할까요?”
“네? 그럴 리가 없어요. 다시 한번 해보시겠어요?”
역시나 조금 전과 똑같이 카드기에선 사용이 안 된다는 경고 메시지가 경보음과 함께 흘러나왔다.
“사모님, 한도 초과가 맞아요. 뭔가 잘못된 거면 카드사와 한번 통화해 보셔요.”
직원이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세아에게 카드를 돌려주었다.
지금 세아는 백화점 명품관에서 쇼핑 중이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그럴 리가 없다고요. 잠시만요, 제가 바로 해결할게요.”
창피함에 얼굴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직원을 향해 어색한 웃음을 지었지만 속은 타들어 갔다.
Rrrr Rrrr-
“빨리 전화 좀 받아 민우 씨이…….”
몇 번을 걸어도 통화가 안 되다가 5번째에 민우가 전화를 받았다.
“회의 중이야, 지금.”
“잠깐만요 민우 씨! 전화 끊지 말아요. 나 지금 급하단 말이에요.”
다급한 세아의 목소리에 민우가 전화를 끊지 않자 세아가 빠르게 할 말을 내뱉었다.
“백화점에 뭐 사러 왔는데 카드가 정지됐어요. 한도 초과라는데 뭔가 잘못된 거 같아요.”
민우의 큰 한숨 소리가 들리더니 ‘잠시만 기다리시죠’라는 소리가 그 뒤로 작게 들렸다.
“얼마 쓰지도 않았는데 한도 초과라는데 뭐가 잘못된 건지 모르겠어요.”
“한도 초과 맞아. 세아 너, 몇 주 안 돼서 3천만 원을 넘게 썼다고.”
“네? 그럴 리가……. 그리고 그렇다 한들 다 꼭 필요한 거였다고요. 지금도 우리 가구 사러 왔는데.”
“오늘은 그만 사고 집에 가 있어. 주말에 나와 함께 가지.”
세아가 자신의 옆에 서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백화점 직원을 흘끗 보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돼요! 바로 처리 좀 해줘요. 지금 꼭 사야 한단 말이에요. 사람들도 다 기다리고……. 제가 많이 난감해요. 빨리요.”
팀장들과 중요한 회의를 하고 있던 민우는 너무나도 짜증스러워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세아가 눈치가 빨랐다면 여기서 멈춰 더 큰 것을 얻었을 텐데 아쉽게도 그녀는 눈치가 없었다.
“바로 처리해 줄 거죠? 그쵸?”
“10분 후에 다시 사용해.”
그렇게 말하고 민우는 인사도 없이 전화를 끊었다.
세아는 그가 그러든가 말든가 상관하지 않고 헤벌쭉 웃으면서 직원을 향해 돌아섰다.
“우리 그이가 며칠 전에 H사 컬렉션을 몇 개 구매해서 한도가 찬 걸 깜빡했다지 뭐예요?”
직원이 묻지도 않은 말을 주저리주저리 말하며 세아가 어색하게 웃었다.
‘아휴 진짜, 이게 무슨 망신이야. 민우 씨는 왜 이렇게 한도가 작은 카드를 줘서는 나한테 이렇게 창피를 줘.’
세아는 벌게진 얼굴의 홍조를 손바닥 부채질을 하며 가라앉히려 했다.
10분 뒤, 그녀는 1200만 원짜리 소파를 일시금으로 구매했다.
***
“아니 얘는 요즘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상의 한번 없이 제 맘대로 회사를 다시 다닌다고 하질 않나. 연락도 한번 안 하고…….”
주란은 짜증을 내며 핸드폰을 바라보다 내려놓았다.
저번 방문 이후, 지연의 연락이 뚝 끊겼다.
며칠에 한 번은 꼭 하던 안부 전화도, 한 달에 한두 번은 해오던 반찬도, 그리고 백화점에 신상이 나왔다고 데려가는 일도……. 모두 뚝 끊겼다.
“또 한 번 찾아가야겠네. 얘가 좀 잘해주고 풀어주면 이러더라.”
처음 지연과 민우의 결혼 이야기가 나왔을 때 주란은 극구 반대했었다.
집안이야 민우에게 나쁠 것 없었지만, 지연이 민우와 같은 학교 같은 과를 나오고 과탑을 할 정도로 똑똑하다는 말에 이상하게 정이 뚝 떨어졌다.
“똑똑한 것들은 시엄마를 우습게 보지. 나 같이 본처도 아니고 후처의 경우면 얼마나 기어오르겠어.”
차 회장이 본처인 김지원 여사와 사이가 안 좋을 때 그 틈을 파고든 게 강주란이었다.
그녀는 차 회장의 집에서 일손을 돕던 메이드였다.
차 회장이 김지원과 사소한 오해로 격하게 싸워 서재에서 만취하도록 술을 먹었던 그날, 주란은 작정하고 그의 곁에 다가갔었다.
술이 원수인지, 아니면 차 회장이 평소 강주란을 눈여겨봤었던 건지.
그날 차 회장은 그녀를 안았고, 주란은 민우를 임신하게 되었다.
차 회장은 민우가 태어나자 그를 자신의 호적에 올렸다.
하지만 그렇게 아슬아슬하던 차 회장과 김지원의 사이는 끊기지 않았고, 이혼도 하지 않은 채로 몇십 년째 별거하는 상황이었다.
갖은 애교와 회유로 차 회장을 설득했지만 그는 넘어가지 않고 그렇게 본가와 주란의 집을 오고 가며 생활했다.
가끔이지만 집안 행사 때, 차민우를 따라 함께 가게 되면 마주치는 김지원과 그녀의 자식들.
네가 여기가 어디인데 따라오느냐고 꾸짖는 듯한 환청이 종종 들리기도 했지만, 주란은 꿋꿋이 참석하여 자신도 이 집안의 일원이라는 것을 드러내곤 했다.
하지만 김지원을 마주할 때면 주란의 자존심은 땅을 치고는 했다.
민우를 가졌을 때도, 호적에 올렸을 때도, 가족 행사에 주란이 나타날 때도 김지원은 아무런 미동이 없었지만, 그녀의 눈이 말하고 있었다.
음식에 꼬여든 날파리를 내가 왜 신경써야 하지?
너 따위의 존재에 내가 왜 감정 소모를 하냐는 듯, 언제나 주란을 하찮은 벌레 보듯 내려 보는 김지원.
은지연, 잘난 집 잘난 계집애가 차 회장의 본처 김지원과 똑같을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