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쥐똥 같은 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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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쥐똥 같은 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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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쥐똥 같은 돈
2022.09.12.
“돈 있고, 똑똑하면 김지원이랑 같을 거 아냐. 얼마나 나를 깔보고 무시하겠어. 어렸을 때부터 그런 사람들 틈에서 남을 내려다보는 삶을 살았을 텐데.”
주란의 이상한 자격지심은 지연을 더 구박하고 못살게 구는 것으로 표현되었다.
하지만 차민우는 그런 주란을 알면서도 전혀 제지하지 않았고, 그런 민우의 모습에 그녀는 더욱 힘을 얻었다.
마치 ‘어머니가 잘하고 있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부부지만 민우를 외사랑 중인 지연은 혹여라도 민우나 주란의 눈 밖에 날까, 대들지도 못하고 주란의 괴롭힘을 고스란히 받아냈다.
쩔쩔매며 주란의 말을 따르는 지연을 보면 어찌나 즐겁던지.
“다~ 사람 하기 나름이지. 제아무리 똑똑해도 시엄마가 어떻게 가르치냐에 따라 고분고분해질지, 아니면 드셀지 결정된단 말이지.”
주란은 자신이 지연에게 하는 행동들을 자랑스럽게 친구들에게 이야기하기도 했다.
[너 요즘 뭐 하는데 연락도 없니?]
메시지를 보내고 기다렸지만 한참 동안 답장이 없었다.
‘분명 메시지를 읽었는데, 답이 없어?’
화가 나 바로 지연에게 전화하였지만 받지를 않았다.
몇 번을 더 해도 마찬가지였다.
“얘가 요즘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거지? 제 시아버지가 저를 좀 이뻐한다고 기세등등해져서 나를 아주 우습게 본다 이거지? 요즘 내가 너무 봐줬지?”
종종 화가 날 때, 혹은 지연에게 불만이 있을 때 지연에게 말도 안 하고 집에 방문하였다.
막무가내로 지연이 아끼는 물건을 버리거나 집을 좀 헤집어 놓은 뒤 그녀가 당황하고 슬퍼하면 그게 그렇게 고소했다.
마치 잘난 김지원을 골탕 먹인 것 같은 느낌이랄까.
지금은 지연도 민우도 회사에 있을 테니 집에 아무도 없을 거라 가서 맘대로 하기에 아주 적기였다.
화풀이할 생각에 신이 나서 바로 아들의 집으로 향했다.
그런데 현관문이 열려 있었다.
“출근 안 하고 집에 있는 거 아냐?”
천천히 집 안으로 들어가 조심스레 두리번거렸다.
“아니 집이 왜 이렇게 이상하게 변한 거야. 저 요상한 그림이나 촌스러운 가구는 또 뭐고. 얘는 뭘 바꾸거나 새롭게 꾸미려면 연락을 해서 나한테 알려야지, 아주 뭐든 제 맘대로지.”
그 순간 방에서 나오는 사람과 마주친 주란은 기함할 듯이 놀라며 소리 질렀다.
“네가 왜 여기 있어!”
“어……어머님.”
방에서 나온 건 다름 아닌 정세아였다.
놀라 잠시 멈칫했던 주란은 냉큼 정신을 차리고는 망설임 없이 세아에게 다가가 세아의 등을 세게 때렸다.
그러고서는 그녀의 팔을 잡고 이리저리 흔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네가 왜 여기 있냐니까! 얘가 미쳤어, 미쳤어! 정세아 네가 미쳐도 아주 단단히 미쳤구나, 여기를 들어오고.”
세아는 악다구니를 쓰며 자신을 흔드는 주란을 잠깐 내버려 두며 가만히 있었지만, 점점 더 강도가 거세지자 도저히 참지 못하겠다는 듯 그녀의 손을 세게 잡아 자기 몸에서 떼어냈다.
“왜 이러세요, 진짜! 아 씨…… 아파라.”
“뭐야? 네가 진짜 몰라서 이래? 내가 준 돈 받아먹었으면 멀리서 쥐 죽은 듯 살아야지 여기가 어디라고 나타나 나타나길! 네가 정말 미친 게야?”
주란은 다시 세아를 칠 기세로 팔을 내둘렀으나 곧 팔을 잡혔다.
“그딴 쥐똥같이 적은 돈 쥐여주고 뭘 쥐 죽은 듯 살라는 거예요? 그때야 나도 순진해서 내가 물러나야 한다고 생각하고 물러난 거지. 돈 때문이 아녔다고요!”
“뭐……뭐야? 쥐똥 같은 돈? 네 눈엔 1억이 쥐똥이야? 엉?”
“그리고 내가 나타난 것도 아니고, 민우 씨가 날 찾아낸 걸 나보고 어쩌라는 거예요? 내가 찾아오길 했어, 편지를 보냈어, 아니면 연락을 했어? 지방 구석에서 숨죽이고 살고 있는데 그 시골에 있는 날 찾아낸 걸 나더러 어쩌라는 거냐고요!”
“뭐? 민우가 널 찾아내?”
“제가 그때 어머님께 말했잖아요. 민우 씨는 절대로 나를 포기 못 한다고. 평생 나 찾아다닐 거라고. 왜 제 말을 못 믿으셨어요.”
민우가 우연히 자신을 발견한 것을 모르는 세아는 그가 몇 년간 백방으로 알아보다 자신을 찾았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아이고…….”
주란이 목덜미를 잡으며 주저앉았다.
“어머님 이제 저랑 평생 가족으로 보고 사셔야 해요. 그 은지연이 아니고요. 아셨어요?”
***
3년 전.
주란과 세아는 첫 만남부터 매우 꼬여 있었다.
민우와 며칠 전 크게 싸운 세아는 너무너무 짜증이 나 참을 수가 없었다.
“세아야 딱 1년만 참아줘, 정말 딱 1년만 참아주면 돼. 절대 그 여자와 잠도 안 자고, 방도 같이 안 쓸 거야.”
“민우 씨는 어떻게 나한테 그런 말을 하지? 제정신인 거야? 말이 돼? 사귀는 여자 두고 다른 여자와 결혼한다니?”
그렇게 자기가 조르고 조를 때는 이런저런 핑계로 미루더니만 그 여자와 결혼 얘기가 나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하겠다고 하는 걸 보면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이 남자가 지금 날 사랑하는 거 맞아? 어떻게 이런 말을 서슴없이 하는 거지?’
이런 생각이 매 순간 수십 번도 더 들었다.
민우는 둘의 첫 만남에서 세아의 촉이 예상했듯, 귀한 부잣집 아들에 엘리트였다.
그것도 대기업 막내아들.
나중에 좀 더 깊게 알고 보니 혼외자이기는 했지만, 그건 상관없었다.
본처 자식들보다야 못하더라도 대기업 회장 자식이니 어느 정도는 물려받을 것이었다.
그의 잘생긴 외모도 큰 매력이었다.
하지만 세아에게 남자의 외모는 잠시의 즐거움이었다.
평생 얼굴 뜯어먹고 살 것도 아니고 아주 못 참을 정도로 생기지만 않으면 되었다.
세아는 무엇보다 돈, 지위, 권력. 그런 것을 가진 사람이 좋았다.
민우는 그 모든 것을 충족하는 정말 딱 세아의 이상형이었다.
딱 하나 맞지 않는 것만 빼고는.
안타깝게도 세아는 그와 보내는 밤에 만족하지 못했다.
그는 너무 자신의 욕구에만 충실했고 세아를 전혀 배려하지 않았다.
함께 보내는 시간 동안 대충 장단을 맞추고 그가 좋아하는 대로 해주면 그는 전혀 눈치를 못 챘기에 세아는 매번 연기해야 했다.
그렇게까지 해가며 그와 보낸 시간을, 얼굴도 모르는 딴 계집애에게 뺏긴다고 생각하니 너무너무 분했다.
“그 누구에게도 안 뺏겨.”
며칠이 지났을 때였다.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받지 말까? 누군데 계속 이렇게 전화하는 거야?”
처음에는 받지 않았지만 계속 오는 전화에 결국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정세아 맞지?”
“아……. 네. 누구세요?”
“나 민우 엄마다. 너 지금 어디니? 지금 나 좀 만나야겠어.”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사이에 대뜸 반말로 말하는 민우의 모친에게 화가 났지만, 지금은 화를 내면 안 될 것 같아 가만히 있었다.
“제가 가겠습니다. 어디로 갈까요?”
“xx동 xx 한식당으로 와라.”
“네, 알겠습니다.”
“꾸물거리지 말고 바로 와!”
그렇게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하고는 주란이 전화를 끊었다.
“뭐야 이 아줌마. 왜 이렇게 매너가 똥이야?”
세아는 투덜대며 바로 택시를 잡아타고 주란이 말한 한식당으로 향했다.
고급스러운 한식당 룸에 이미 자리를 잡고 앉아 있던 그녀.
세아의 눈에 비친 주란의 첫인상은 ‘표독스럽다’였다.
얼굴 곳곳에 심술과 욕심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것이 한눈에 보였다.
하지만 민우와의 미래를 위해선 잘 보여야 할 사람 중 하나였기에 최대한 얌전하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어……머님.”
“왔구나, 앉으렴.”
“네.”
“내가 왜 불렀는지는 말 안 해도 알 텐데? 우리 민우랑 얼마나 됐니?”
“민우 씨 학교에서 만났어요. 짧지 않은 시간 함께했어요, 어머님.”
“어머님, 어머님 하지 마라. 누가 네 어머님이야. 다른 사람이 보면 오해할라. 여사님이라고 불러.”
“하지만 어떻게 그렇게…….”
“됐다. 그게 무슨 상관이니, 너랑 나랑 얼마나 볼 거라고. 아무튼, 오래 만났다면 우리 민우가 얼마나 큰일 해야 하는지, 얼마나 중요한 일을 하는지 모르지 않을 테고. 네 생각에는 네가 우리 민우 짝으로 맞는다고 생각하니?”
“사람이 사귀는데 맞고 안 맞고가 어디 있어요. 저희는 사랑해서 만나는걸요.”
“사랑은 무슨 사랑, 사랑 타령하면서 얼마나 살 건데. 다 자기에게 맞는 사람 만나서 비슷하게 살아야지 돼, 얘. 넌 아니야. 내 말이 섭섭하게 들려도 어쩔 수 없어. 사람이 자기 몸에 맞는 옷을 입어야지, 민우는 너에게 너무 과하단다. 너도 느꼈을 텐데, 왜 모른 척이니.”
“저도 노력하고 있어요, 어머님. 우리 민우 씨 소중한 사람이라 저도 노력한다고요.”
“노력? 노오려억? 무슨 노력을 했다는 거야 네가? 그리고 내가 네 뒷조사도 안 했을 줄 알아? 어디 나를 속이려고 해?”
“무……무슨 말씀이세요?”
“너 우리 민우 만나면서 다른 남자 있었던 거 내가 모를 줄 아니?”
이렇게 말하며 주란이 세아 앞에 몇 장의 사진을 던졌다.
사진에 나와 있는 사람은 세아와, 몇 달 전에 친구들과 갔었던 클럽에서 만난 남자였다.
민우와 크게 싸운 날 밤이었다.
말이 잘 통하고 꽤 잘생겼던지라, 민우 몰래 몇 번 가볍게 만나 즐겼던 사람이었다.
그를 만날 때 세아는 본명을 말하지 않았고 그 사람도 아니었을 터였다.
그저 즐기기 위해 잠시 스쳐 지나갔던 사람과 만나던 때를 이 아줌마가 어떻게 알게 된 거지?
세아는 이 모든 것이 밝혀질까 봐 소름이 끼쳤지만, 잡아떼기로 했다.
“친구예요. 친한 친구. 어머님 세대는 모르시겠지만, 저희 세대는 남자 사람 친구들도 많다고요. 그게 잘못은 아니잖아요?”
“넌 사귀지도 않는 사람이랑 숙소에 가니?”
심장이 떨어질 것처럼 놀랐지만 세아는 끝까지 오리발을 내밀었다.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와서 그 숙소에 머무르고 있어 잠깐 간 거라구요, 잘 알지도 못하시면서 함부로 사람 매도하지 마세요!”
주란은 세아의 이야기를 들으며 한숨을 쉬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너랑 무슨 말을 더하겠니. 아무래도 그냥 말하면 안 되겠구나.”
그렇게 말하더니 주란이 가방에서 봉투를 꺼내 세아 쪽으로 밀었다.
“돈 받고 떨어질래, 아니면 그냥 쪽박 차고 떨어질래? 우리 민우, 날 잡았어. 네가 우리 민우랑 만나든 안 만나든 걔는 이제 딴 여자 남편이 된다고. 네가 그래도 상관없다면 계속 민우 쫓아다니렴. 그다음에야 지연이 걔가 알아서 하겠지.”
“뭐라고요? 말도 안 돼요. 며칠 전까지 민우 씨는 그런 말 없었는데…….”
“걔가 왜 너에게 말하겠니. 귀찮게.”
가소롭다는 듯 피식 웃던 주란이 세아를 정면으로 쳐다보았다.
“줄 때 받아. 사람이 똑똑해야지, 응? 지금 나 여기서 나가면 다시는 이런 제안 안 할 거야.”
세아는 온몸이 덜덜 떨렸다.
‘민우 씨가…… 민우 씨가 나한테 어떻게 이래. 어떻게 나한테.’
“생각 없다 이거지? 그래 알았다. 난 이만 가마.”
테이블 위에 올려놨던 돈 봉투를 집으려 주란이 손을 뻗었을 때였다.
그때 세아가 두 손으로 덥석 그 봉투를 잡았다.
“1억, 이하는 안 돼요.”
“하! 세구나, 남자 하나 잘 물어서 헤어지는 마당에 1억이나 받고. 알았다. 이 봉투 안에 있는 돈이 3천이니까, 7천 곧 이체해 주마.”
자신의 예상대로 세아가 돈 봉투를 잡자 주란의 입에서 숨길 수 없는 비웃음이 흘러나왔다.
“너, 오늘 이후에 절대 우리 민우 앞에 나타나지 마. 내가 돈 말고도 지방에 숙소랑 간단한 일 하는 데 소개해 줄 테니 당분간 거기 가서 살고. 핸드폰, 카드, 아무것도 만들지 마. 핸드폰은 내가 하나 만들어 줄 테니 그거 쓰고. 한 1년 동안만 그렇게 살아. 너 이거 어기면 내가 어떻게 해서든 너한테 손해배상 받아낼 테니까. 알았어?”
주란은 다다다 쏟아내듯 말하고는 세아 앞으로 명함 하나를 던졌다.
“이따 이 번호로 계좌번호랑 주소 보내렴. 내가 챙길 것 다 챙겨 보낼 테니.”
파르르 떨리는 손을 뻗어 명함을 잡아 들은 세아가 고개를 들고 주란을 노려보았다.
곧 그녀의 두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어머님, 반드시 후회할 거예요. 민우 씨, 그렇게 쉽게 저를 포기할 사람 아니에요. 장담하지만 분명 평생 저 찾아다닐 거예요.”
“그래, 기대해 보마. 내 아들이 어찌할지.”
굳어 있는 세아를 뒤로하고 주란이 방에서 나왔다.
그 어느 때보다 홀가분해진 마음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