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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나 자신을 위해 (14/85)


14. 나 자신을 위해
2022.09.15.



 


“그때 기억 안 나세요? 제가 말했잖아요. 우리 민우 씨가 저 포기 못 한다고. 왜 제 말을 안 들으셨어요. 제 말 듣고 저희 놔두셨으면 민우 씨도 행복하고 저도 행복하고. 모두가 얼마나 좋았겠느냐고요.”

“네가 지금 어디서 이런 막장을 보여! 내가 당장 지연에게 연락해서……!”

“어머니, 그 여자랑 민우 씨. 같이 안 산 지 오래됐어요. 민우 씨 지금 저랑 같이 산 지 다섯 달이 넘었는걸요?”

“뭐야? 이것들이 지금 미……미쳐서 이래?”

주란은 기가 막혔는지 말을 더듬거렸다.


‘얼마 전에 집에 왔을 때, 그래서 지연이 고 계집애가 그렇게 기어올랐구나!’

화가 나는 마음이 갑자기 지연을 향했다.


“내가 민우랑 다시 확인할 테니 우선 나가! 이 집에서 나가라고!”

주란이 세아의 팔을 거칠게 잡아끌고는 현관문 쪽으로 이끌었다.

하지만 세아가 주란의 손을 세게 내치더니, 허리에 팔을 올리고 주란을 향해 섰다.


“왜 이러세요 정말? 나가려면 어머니가 나가세요. 이 집은 이제 저와 민우 씨의 집이 될 거예요. 그러니까 이렇게 아무 때나 함부로 오실 생각하지 마시고, 저희가 초대할 때만 오시라고요!”

 

***

주란은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드러누워 끙끙 앓았다.

정세아가 다시 민우의 앞에 나타날 줄은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때 내가 더 세게 내쳐야 했어. 3년 전에 내가 더 뒤를 파고, 더 확실한 것들을 내밀어서 다시는 우리 민우 앞에 나타나지도 못하게 해야 했어. 너무 쉽게 생각한 내 탓이야 내 탓.”

더욱 모질게 내쳐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 저렇게 당당하게 자신들의 앞에 나타난 것이 모두 자신의 탓만 같았다.

혹시라도 정세아가 나중에 민우와 지연의 결혼식장에 나타난다거나, 회장님이나 지연이를 따로 찾아가는 등, 다 된 밥에 깽판을 놓을까 싶어 결국 돈으로 무마했는데 그럴 게 아니었다.

사진에 있었던 그 남자와 세아.

주란의 귀신같은 촉이 둘이 보통 사이가 아니다 싶어, 사진을 받자마자 민우에게 보여주며 민우를 회유하기도 했었다.


“민우야, 걔가 보통내기가 아니야. 분명 다른 남자가 있을 거라니까. 이것 보렴. 사진으로 봐도 둘 사이 이상해 보이잖니.”


“어머니, 뭐 하시는 겁니까. 이런 추잡한 짓 하실 시간에 아버지를 위해 교양 프로그램이나 더 신청해서 들으시는 게 어떠세요? 아들의 여자 뒤를 캐실 생각이나 하시고. 참 가관이네요. 다 어머니 같은 사람인 줄 아세요?”


“뭐야? 나 같은 사람? 너 말을 어떻게 그렇게 하니?”


“어머니가 이러니까 제가 본가 사람들에게 더 무시를 당하는 겁니다. 제발 그냥 조용히, 교양 있게 살면 안 되세요?”


“너 말을 해도 어쩜 그렇게 하니? 엄마한테 왜 이렇게 모질게 그래? 너 엄마 못 믿어?”


“세아 작정하고 남자 꾀고 하는 여자 아니에요. 제가 그녀를 먼저 발견하고, 어렵게 내 사람으로 만든 여자라고요. 그렇게 쉬운 여자 취급하지 마세요.”

3년 전의 민우는 생각보다 더 세아에게 푹 빠져 있었다.

결국, 그날 주란은 아무것도 건지지 못하고 민우의 경멸 어린 말만 듣고는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민우가 결혼하고 나서도 세아를 찾아 헤매었다니, 3년 전 세아에게 돈을 주어 내쫓았다는 걸 알면 어쩌면 주란을 평생 안 볼지도 몰랐다.

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지연을 만나야 하는데 지연은 답장도 없고 전화도 받지를 않았다.

민우도 연락이 안 되고…….


[너 오늘까지 연락 없으면 회사 찾아갈 테니 그리 알아.]

지연에게 문자를 보내고는, 다시 드러누워 머리를 굴리는 주란이었다.

***

지방에 출장 갔던 하영이 서울로 오자마자 지연에게 연락해 둘은 급하게 만났다.


“지연아, 너 핸드폰이 계속 울린다. 급한 전화면 받지 왜?”

지연의 핸드폰이 계속 울려대는 것을 본 하영이 걱정했다.


“급한 거 아냐.”

지연은 요 며칠 번갈아 가며 연락이 오는 민우나 주란에게 짜증이 극에 달했다.


[너 오늘까지 연락 없으면 회사 찾아갈 테니 그리 알아.]

생각하고 싶지 않아 한동안 회피하였는데 이렇게 둘 게 아니었다.


[이번 주 금요일 저녁 7시에 당신 집에서 만나요. 그 여자는 꼭 빼고.]

우선 민우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바로 주란에게도 메시지를 보냈다.


[금요일 7시까지 집으로 오세요. 절대 회사에는 오시지 말고요.]

더는 방해받고 싶지 않아 핸드폰을 가방 깊숙이 넣어버렸다.


“이제 급한 연락은 해결된 거?”

“응, 해결했어.”

“좋아. 그럼 우리 본격적으로 얘기 좀 하자.”

“그래…….”

“지연아, 내가 너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지? 너를 너무 잘 아는 나니까 내 말 잘 들어줘.”

“알겠어.”

“넌 너무 사랑스럽고 좋은 사람이야. 내가 네 친구라서가 아니라, 누가 봐도 넌 너무 괜찮은 사람이라고.”

“고마워.”

“그런데 너는 너의 소중한 시간을 분노로, 미움으로, 복수로 채우려 하고 있어. 부디 그러지 마, 지연아. 그건 결코 너를 위한 게 아니야. 내가 웃긴 얘기, 하나 해줄게.”

“알았어, 잘 들을게.”

“오래 사귀다 헤어진 두 사람이 있었어. 둘이 헤어진 이유는 남자에게 새로운 여자가 생긴 탓이었지. 남자는 새로운 여자를 만나 행복하게 지냈지. 오래 사귄 전 여자친구? 당연히 아웃 오브 안중이었어. 오직 짜증 나는 건 여전히 전 여자친구가 질척거리는 거였지.”

하영이 크게 한숨을 쉬더니 이야기를 이어갔다.


“다른 하나인 여자, 즉 그의 전 여자친구는 억울하고 분해서 매일매일 힘들게 살아. 그리고 그 남자 보란 듯이 매일 그 마음을 SNS에 올려서 말해.”

[난 너 때문에 너무 힘들어, 너 때문에 내가 이렇게 불행해.]

“근데 그거 알아? 전 여자친구의 힘들고 아프다는 SNS를 남자는 현재의 여자에게 웃으면서 보여주며 말해.”

[야, 이 여자는 나 아직 못 잊고 이러고 있어. 나 이런 대단한 남자야.]

“어이없지? 그런데 이게 현실이야. 네가 힘들다고 복수하겠다고 붙잡고 있으면 있을수록 차민우 그 X새끼는 네가 자기를 못 잊고 이런다며 그 정세안지 정쎄리인지 하는 X랑 웃으면서 회자할 거라고. 너 그걸 원해?”

하영의 뼈를 때리는 말에 지연은 상처를 받으면서도, 동시에 그녀의 충고에 감사함을 느꼈다.


‘지금 나에게 그 누가 이런 말을 해주겠어. 맞아. 내가 바보였어.’

“너 차민우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평생 외롭게 살고 싶어? 아니잖아. 너도 너를 아껴주는 사람과 꽁냥꽁냥 하면서 살아봐야지. 네가 주는 사랑에 감사하며 돌려주는 사람과 서로 사랑해 봐야지. 안 그래? 가장 멋진 복수는, 너를 차버린 그 자식. 차민우 보란 듯이 행복하게 사는 거야. 그만한 복수는 없어.”

“응…….”

“지연아, 너 그 본부장이 너에게 고백했다며. 만나봐. 당장 뭘 하라는 게 아니고, 편하게 만나보라고. 그 사람 멋지고 신사적이라고 그랬잖아? 너에게는 속 쓰리고 아픈 얘기지만, 너 서류상으로 자유인이야. 너 프리하다고. 그런 멋진 남자 만나도 법적으로 전혀 문제 없는 사람이야.”

하영의 얘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지연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완전한 이별은 6개월 뒤를 생각했었지만, 조금 일찍 마무리를 지어야 할 것 같다.

이건 민우나 그 여자가 아닌, 전적으로 나 자신을 위해.

***

오전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모르게 업무에 집중하던 지연의 눈에 깜빡이는 사내 메신저 마크가 눈에 띈 건 12시가 다 돼서였다.


[점심 약속 있습니까? 좀 급한 일이 있는데.]

[없습니다, 본부장님. 뭐 급하게 시키실 일 있으세요?]

[개인적으로 좀 급한 일인데, 괜찮다면 저 좀 도와주면 좋겠습니다. 외부 일정으로 시간은 2시간 내외로 걸릴 겁니다. 괜찮습니까?]

[네, 가능합니다. 어디로 갈까요?]

[주차 위치 알려줄 테니 주차장으로 내려오세요. 제 차 타고 이동하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지연은 급히 짐을 싸서 그가 알려준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강현은 이미 내려와 차 운전석에 앉아 있었다.

지연이 보조석에 앉자 그는 바로 차를 출발시켰다.


“빨리 내려왔네요. 저 때문에 서두른 것 같은데 미안합니다.”

“아니에요, 본부장님.”

“그리고 개인적인 점심시간인데 시간 내주어서 고마워요.”

“별말씀을요, 별일 아닌걸요. 그런데 급한 일이라는 것이 뭔지…….”

“가보면 알게 되니 잠시 기다려요.”

“본부장님이 저에게 해주신 여러모로 감사한 일들이 많아 이 정도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에요.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편하게 생각하시고 알려주세요.”

“그렇게 말해주니 마음이 좀 편해지네요. 고맙습니다. 목적지까지는 15분 정도 걸릴 겁니다.”

강현과 이동하며 지연은 계속 울리는 전화기를 쳐다보았다.

강주란이었다.


“전화 받아도 됩니다. 계속 전화가 오는 걸 보니 급한 일인가 보군요.”

“아니에요. 급한 일도 중요한 일도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지연은 문자 하나만 보내고는 전화기를 꺼두었다.


[일하는 중입니다. 금요일에 뵐 거니 전화는 그만하세요.]

곧 도착한 곳은 복잡한 서울 시내와는 어울리지 않는 근사한 한옥이었다.

따로 간판이 있지 않아 뭘 하는 곳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내리세요. 여기가 목적지입니다.”

강현을 뒤따라 안으로 들어가자 고운 한복을 입은 분이 나오더니 따로 질문 없이 둘을 안으로 안내했다.

안내한 곳은 큰 창이 있는 방이었고, 창밖으로 잘 가꿔진 정원이 보여 풍경이 아름다운 곳이었다.

방 안쪽에는 큰 상이 놓여 있어 그 양옆으로 강현과 지연이 마주 앉았다.


“본부장님, 여기 뭐 하는 곳이에요? 고즈넉하고 너무 예쁘네요. 저 창밖 정원 좀 보세요. 나비도 날아다니고. 와…….”

“맘에 들어요?”

“네, 이곳 너무 예뻐요.”

“여기 개인적으로 잘 아는 분이 하시는 한식당이에요. 여기가 따로 오픈해서 손님을 받는 데가 아니고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예약이 가능한 데라 못 들어봤을 수도 있어요.”

“어머 진짜요? 덕분에 이런 데를 와보게 되네요. 그런데 급한 일이라는 게……. 여기에서 하는 일인가요?”

강현이 지연의 말을 듣더니 피식 웃고는 짧게 한숨을 쉬었다.


“역시 지연 씨는 이런 쪽으로는 참 눈치가 없네요. 일 눈치는 그렇게 빠르면서.”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제가 지연 씨와 따로 만나고 싶은 마음이 너무 급했어요. 그래서 이렇게 갑자기 이곳에 모셔왔습니다.”

“…….”

근사한 웃음을 지으며 강현이 설명했지만, 지연은 뭐라 대답을 하기가 어려웠다.

저번 고백 이후 둘 다 업무로 너무 바빴고, 강현 역시 따로 어떤 말을 하거나 행동을 취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크게 부담스러운 마음은 없었다.

그래서 오늘과 같이 갑작스러운 초대가 있을 줄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혹시 부담됩니까?”

“아니요, 그런 게 아니고…….”

강현이 그녀를 쳐다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이 부분은 미리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요.”

“말씀하세요.”

“저 결혼했었어요. 지금은 아니지만.”

“…….”

지연의 말에 갑작스러운 정적이 이어졌다.

평소 결혼했다는 말이나, 남자친구가 있다는 말은 안 했기 때문에 강현이 오해하기 쉬울 것 같았다.

이혼이 죄도 아니고 잘못도 아니지만, 누군가와 새로운 시작을 하기 전에는 꼭 밝혀야 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지연의 상황은 조금 다른 경우기는 했지만, 3년간 결혼생활을 한 것은 사실이니까.


“지금은 아니라는 건데……. 그렇다면 지금은 그게 가장 중요한 게 아닌 것 같은데요.”

“네?”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지연 씨가 저에게 관심이 있는지 없는지가 더 중요한 부분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 천천히 서로를 좀 더 알아가는 건 어떻습니까, 은지연 씨?”

“…….”

누군가에게는 어려웠을 이야기를 너무나도 아무렇지 않게 지나가는 그의 말에 지연은 당황스러웠다.


“우리는 아직 서로를 잘 모르잖아요. 아는 거라고는 회사에서의 경직된 모습뿐이에요. 서로를 알아보기 위해 시간을 좀 더 같이 보내보고, 좀 더 다가가 보는 것부터 시작해 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저는……. 아직 마음의 여유가 없어요. 이전 결혼생활이 쉽지 않았거든요. 제가 본부장님과 같은 마음이 될지 자신이 없어서 그래요.”

“지금은 아무것도 자신하지 않아도 됩니다. 지금 당장 사랑에 빠지자는 게 아니에요. 그건 저 역시도 어려워요. 그저 함께 좋은 시간을 보내고, 취미를 나누고, 좀 더 가깝게 서로의 이야기를 해보는 겁니다. 지연 씨가 원하는 속도에 맞춰서. 그리고 혹시 알아요? 지연 씨가 오히려 저에게 훅 빠져들지?”

그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는 달콤한 말은 지연의 가슴을 뛰게 만들기 충분했다.

지연은 혹시라도 평소보다 심하게 뛰는 심장 소리를 그가 들을 것만 같아 조심스러울 정도였다.


“난 기다릴 수 있습니다. 지연 씨는 어떻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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