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금요일의 난장판
(15/85)
15. 금요일의 난장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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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금요일의 난장판
2022.09.19.
시간은 바람과 같이 빠르게 흘러 민우, 주란과 만나기로 약속한 금요일이 되었다.
약속 시각보다 일찍 집으로 온 민우는, 7시쯤 집으로 찾아온 주란 때문에 깜짝 놀라 눈살을 찌푸렸다.
자신에게는 주란이 집에 오겠다는 사전 연락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좀 있으면 지연과 이 집에서 시간을 보내야 하는데 무슨 핑계로 주란을 돌려보낼지 걱정도 되었다.
“아니 도대체 비밀번호는 또 왜 바꾼 거야? 바꿨으면 나에게 바로 알려주던가!”
주란이 혼잣말로 투덜거리며 집 안으로 들어왔다.
“어머니가 여기에 무슨 일이세요.”
문을 열어주며 숨길 수 없이 짜증스러운 말투로 묻자 주란이 그를 노려보았다.
“나? 지연이가 보자고 했다. 그리고 무슨 일은 무슨. 내가 무슨 일이 꼭 있어야 너희 집에 왔었니?”
주란 역시 민우의 짜증 섞인 말투에 곱게 답이 나가지 않았다.
세아에 대해 민우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들이 많아 질문들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곧 지연을 만나야 하니 꾹 참는 주란이었다.
‘아직 세아 계집애랑 함께 이 집에서 사는 건 아닌가 보네.’
주란은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세아와 만났을 때 나누었던 대화를 곱씹었다.
“저에게 아무런 언질도 없으셨잖아요. 저희 집에 오시는데 연락을 해주셔야죠. 그리고 지연이가 어머니를 보자고 했다고요? 오늘 이 시간에요?”
“아니, 너 새삼스럽게 왜 이러니? 아니 내가 너희 집에 연락도 없이 좀 오면 안 되니? 내 아들 집인데? 그리고 내가 이 집에 언제 연락하고 왔던? 한 번도 그렇게 하고 온 적도 없었고, 그런다고 너도 상관도 하지 않던 애가 갑자기 왜 이렇게 짜증을 내고 그래? 그리고 내가 아까 말했듯이 오늘은 지연이가 부른 거라고. 7시까지 집에 오라고 했어!”
“하아……. 어머니!”
민우는 주란의 대답을 듣더니 그녀도 들리도록 크게 한숨을 쉬었다.
‘그동안에도 연락 없이 막 드나들었다고? 매번 올 때마다? 지연이에게 미리 연락하고 온 게 아니었어?’
평소 일절 관심이 없어 몰랐던 것들, 하지만 관심을 가지니 이상하고 신경을 긁는 것들이 하나하나 늘어나고 있었다.
오늘은 이 집에 오지 말고 오피스텔에 있으라는 민우의 말에 발끈한 세아를 설득하느라 온 힘을 빼서 힘들었는데, 그녀보다 더한 어머니라니.
갑자기 두통이 찾아온 듯 한쪽 머리가 지끈거렸다.
딩동 딩동-
잠시 후 지연이 집에 도착했는지 벨이 눌렸고, 민우가 문을 열어주었다.
“두 분 모두 시간 맞춰 와 계셨네요.”
집 안에 들어선 지연은 주란을 보더니 보일락 말락 고개만 살짝 까딱하고는 바로 거실 소파로 가 털썩 앉았다.
“지연이 너 요즘 왜 이러니? 너 요즘 왜 이렇게 버르장머리 없게 굴고 있어?”
주란이 그 모습에 성질이 나는지 갑자기 지연에게 삿대질하면서 큰 소리로 말했다.
“정세아, 이제 알게 되시지 않으셨어요? 새삼 왜 이러다니요.”
“그래, 내가 그러잖아도 세아 계집애, 그것 때문에 너한테 그렇게 연락을 했는데 답장도 제대로 안 하고, 전화도 안 받더니 인제야 만나자는 건 뭐야! 그 애가 그렇게 나타났으면 네가 나한테 제일 먼저 연락해서 상의하고 같이 방법을 찾아야지!”
“강주란 여사님, 제가 왜 그래야 하는데요? 남편이라고 불리던 사람이 죽을 것처럼 보고 싶어 했던 첫사랑 찾았다는데 축하해 줘야죠. 3년 동안 같이 산 은지연 너 따위는 첫사랑에 비하면 쓰레기통 바퀴벌레보다 못하다고 하는데. 그리고 아시죠? 3년 살았던 여자와 정식 절차도 밟기 전에 그새를 못 참고 짐을 싸서 나가 그 사랑한다는 첫사랑 여자와 딴 살림 차려서 사는 거?”
“지연아! 은지연!”
깜짝 놀란 민우가 경악스러운 표정으로 지연을 향해 소리쳤다.
아무리 헤어지는 마당이라도 3년간 시어머니였던 사람에게 여사님이라니.
“너……너 지금 뭐라고 한 게야? 뭐라고? 여사님? 여사니임?”
지연의 말에 너무 놀라고 당황한 주란이 입을 쩍 벌리고는 다물지를 못했다.
우습게도 민우나 주란은 둘이 행했던 지난 혹은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들의 추악함은 신경도 안 쓰고, 지연이 주란에게 ‘여사님’이라고 말한 것에만 꽂혀 불쾌감을 표출했다.
“네, 강주란 여사님. 제가 이제 3년간 살았던 사람과 헤어지잖아요, 그럼 여사님은 더는 제 시어머님이 아니신데 그럼 달리 뭐라 부르겠어요?”
“당신 미쳤어? 아무리 우리가 헤어지는 사이라지만 왜 이렇게 예의가 없어?”
“우리가 예의 차릴 일이 뭐가 있어요, 차민우 씨. 당신은 참 예의 바른 사람이라 본처 버리고 진작부터 내연녀랑 딴살림 차리나 봐요? 와~ 그 예의범절은 또 어디서 배운 거람. 어머니에게 배운 건가?”
“세아는 내연녀가 아니야! 그녀는……. 그녀는 절대 그런 게 아니라고! 우리 사이에 끼어들었던 건 너라고!”
그는 지연의 말에 흥분했는지 피부를 벌겋게 붉히며 벌떡 일어나 지연을 노려보았다.
그 모습을 보며 지연이 피식 웃었다.
“그럼 그렇게 생각하세요. 세상이 뭐라고 당신들을 부르던.”
“너 오늘 바닥을 보기로 아주 완벽히 작정했구나? 앞으로 우리 어떻게 보려고 이래?”
옆에서 주란까지 말을 더하며 지연의 분노에 기름을 부었다.
지연은 그런 둘을 징그러운 벌레 보듯 쳐다보다가, 갑자기 방향을 돌려 부엌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큰 컵을 찾아 한가득 물을 담더니 꿀꺽꿀꺽 한 번에 들이켰다.
“하아~ 시원하다. 이 집은 물맛밖에 좋은 게 없네.”
큰 목소리로 말한 지연이 다시 한 컵 가득 물을 담더니 거실로 돌아와 차민우 앞에 섰다.
“내가 TV에서나 보던 걸 이렇게 해볼 일이 있다니. 인생이 참 버라이어티한 거 같아요, 안 그래요 차민우 씨?”
큰 컵 가득 담겨 있던 찬 물을 민우의 얼굴에 부어버린 것은 그때였다.
“야! 은지연!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머리며 옷이 모두 흠뻑 젖어버린 민우가 크게 소리 질렀지만 동요하지 않고 흘끗 쳐다보던 지연이 가방에서 가져온 서류를 꺼냈다.
그리고 그 서류도 차민우의 얼굴에 집어던졌다.
“네가! 양심이 있으면 여기서 그렇게 말 못 해. 넌 폐기처분도 안 될 쓰레기야, 차민우!”
차민우는 두 눈을 부릅뜨며 지연을 노려보더니 곧 자신의 얼굴에 맞고 바닥에 떨어진 서류들을 주워들었다.
“혼인신고 서류? 이게 뭐?”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서류를 훑어보던 민우가 지연의 앞으로 서류를 집어던졌다.
“차민우, 너 이게 정말 뭔지 모르겠다는 거지?”
지연이 서류를 집어 들고 민우의 앞에 섰다.
“이 서류는 너와 나의 혼인신고 서류야. 네가 신고하겠다고 묵혀두었던 그 서류. 네가 기억도 못 하는 그 서류!”
지연의 입에서 거의 비명에 가까운 말이 흘러나왔다.
“너 지금 무슨 헛소리야! 그럴 리가 없잖아!”
“네가 하겠다던 혼인신고, 미루고 미루었던 그 신고가 안 되어 있다고. 너랑 나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뭐라고? 네가 잘못 알았겠지.”
민우가 지연의 손에서 서류를 뺏어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말도 안 되었다. 혼인신고는 분명 우리 둘이 구청에 가서…….
아니. 지연과 함께 구청을 방문한 기억도, 혼인신고를 한 기억도 없었다.
결혼하고 얼마 안 되었을 때 지연이 혼인신고를 물어봤고, 그때는 1년이 안 되어 헤어질 생각이어서 혼인신고를 일부러 미뤘었던 건 기억이 났다.
하지만, 그 뒤에……. 그 뒤에는 어쨌더라?
기억나지 않는 과거의 순간 때문에 갑자기 혼란스러웠다.
“기억이 안 나지 차민우? 그 정도로 너에게는 이 서류가, 우리의 혼인 서약이, 나의 부탁이 길가의 개똥보다도 못했던 거야. 그치?”
지연의 얼굴에 일그러진 웃음이 걸렸다.
“전혀 기억에 없을 당신을 위해 착한 내가 친절하게 설명해 줄까? 우리 결혼생활이 1년이 훌쩍 넘어 2년이 다 되어 갈 때 너에게 혼인신고를 하자고 했더니 네가 나중에 하겠다고 나에게 서류를 챙겨달라고 했어. 그러고 너는 나에게 서류를 받아둔 뒤 쓰레기처럼 방 안의 상자에 처박아 놓고 까맣게 잊어버렸던 거지. 완전히 잊어버린 거야. 이런 것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옆에서 주란이 경악을 하며 입을 막고 놀라고 있었다.
“그럴 리가……그럴 리가 없어!”
“너와 나, 차민우와 은지연은 아무런 사이도 아닌 거야. 우린 남남이었다고! 덕분에 나는 서류상 처녀가 되어버렸네?”
지연이 고개를 젖히고는 흡사 미친 사람처럼 웃어댔다.
화내지 않겠다고, 절대 저런 놈 때문에 나의 에너지를 쓰지 않겠다고 몇 번이나 다짐하면서 왔던 자리였다.
‘내 신발에 개똥이 묻었다고 똥에 화낼 게 아니야. 화는 사람에게 내야지’ 이런 생각을 끊임없이 되뇌면서.
하지만 그녀의 지난 3년이, 갑자기 사라져 버린 그 3년이 너무 억울했던 마음이 갑자기 훅 하고 올라와 자신도 모르게 머리끝까지 흥분하여 소리 질러 버렸다.
“자, 그래서 뭘 어쩔 거냐고? 너와 나는 아무런 사이가 아니니, 이혼이라는 것도 없는 거지. 그리고 당연히 너에게 넘기겠다는 내 주식, 그거 역시 네 인생에서 날아간 거야. 차민우 당신은 참 좋겠어. 이제 이혼할 필요도 없이 첫사랑이랑 맘 편히 살게 되어서.”
“말도 안 돼! 말도 안 된다고!”
“네 게으름을, 아니 너의 멍청함을 탓해!”
이렇게 소리치고는 지연이 방향을 바꿔 주란에게 향하였다.
“강주란 여사님, 당신의 소중한 아드님이 여자를 데려와서는 저와 헤어지자고 했는데……. 저희가 헤어질 필요도 없던 남남이었다네요. 지난 3년간, 난 그것도 모르고 여사님의 악질적인 화풀이에, 교양 없고 품위 없는 행동들에 시달렸는데. 지금 생각하니 너무 억울한 거 있죠?”
“뭐야? 네가 지금 미쳐서 제정신이 아닌 게로구나!”
“여사님이 매번 말하던 고상함과 교양은, 명품 옷을 입는다고 생기는 게 아니에요. 인성에서 나오는 거지. 여사님 어디 가서 심각하게 물어보세요. 사람들이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교양 있고 고상한 사람으로 보는지, 우악스럽고 질 떨어지는 사람으로 보는지. 그런데 뭐,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다른 사람들이 어떻든, 저에게는 저질의 행동만 하셨는데.”
끊임없이 나오는 지연의 독설에 주란이 당황한 것인지 화가 난 것인지 몸을 덜덜 떨었다.
“이제 앞으로 저를 아는 척도 하지 마세요. 당신이라면 그림자마저도 치가 떨리게 보기 싫으니까.”
“야!”
결국, 주란이 소리를 지르며 지연에게 달려들었다.
도저히 계속 지연의 독설을 듣고 있을 수 없었다.
그러자 지연이 달려드는 주란의 팔을 잡고는 소파로 확 밀어버려 주란이 내동댕이쳐졌다.
“아이고! 아이고 저게 사람 죽이네!”
“전 정당방위를 한 걸요, 여사님?”
지연이 숨을 거칠게 내쉬며 씩씩거렸다
“차민우. 이제, 너와 나 정말 아무 사이도 아니야. 다시는 나에게 연락하지도. 아는 척하지도 마. 위자료? 그딴 돈 필요 없어. 넌 네가 어떤 여자를 떠나보내는지 모르지? 내가 혼자 번 것만 해도 위자료 따위보다 많아. 한때라도 너를 사랑했다고 생각한 나 자신이 너무 불쌍할 뿐이야. 그래도, 이제라도 알게 되어 얼마나 다행인지!”
머리를 감싸고 멍하니 있던 민우가 지연의 팔을 잡았다.
“지연아, 내 말 좀 들어봐, 너 지금 뭔가 오해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때였다, 현관 도어락에서 비밀번호가 눌리는 소리가 난 것은.
곧 현관문이 열리자 세 사람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했다.
집 안으로 들어선 것은 세아였다.
“민우 씨. 어머, 어머님도 여기 계셨네요.”
놀란 듯한 표정을 지으며 세아가 그들에게 다가왔다.
민우가 극구 말리며 오늘은 이 집에 오지 말라고 한 것이 오히려 화근이었다.
‘분명, 오늘 거기서 뭔가가 있어. 은지연 그 여자를 거기서 만나는 걸 거야. 분명해!’
그의 행동에 세아가 뭔가 이상한 감을 느끼고 왔던 것이었다.
“이렇게 모여 계시는지 몰랐어요. 제가 좀 찾을 게 있어서 들렀는데, 여기에 의외의 인물도 계실 줄은……. 썩 반갑지는 않네요. 은지연 씨?”
세아가 지연을 무시무시하게 노려보며 말했다.
그녀를 마주한 지연이 갑자기 크게 웃어젖혔다.
“하하하! 아하하하.”
흡사 미친 사람처럼 계속 웃는 지연을 보며 다들 놀란 얼굴을 감출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