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아름다운 원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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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아름다운 원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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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아름다운 원피스
2022.09.22.
“아하하하하.”
지연은 웃음을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
나중에는 눈가에 눈물이 맺힐 정도였다.
지연이 큰맘 먹고 샀던 아름다운 원피스.
한국에 3벌밖에 입고되지 않아, 백화점 VVIP 중에서도 기업 총수 가족들이 아니면 입고된 실물도 볼 수 없었던 원피스.
매장에 연락하면 구매자 이력이 남아 있는 그 원피스를 정세아가 입고 있었다.
“진짜 너무너무 웃긴다. 정말 그러네……. 최고의 복수는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었어. 난 그냥 내 행복을 바라고 노력하며 사는 게 맞네. 진짜 복수는 알아서 될 테니.”
지연은 다른 사람은 알아들을 수 없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끝없이 흘러나오는 웃음을 꾹 참고 민우에게 돌아섰다.
“차민우 씨, 참 행복하겠어. 이렇게 예쁘고 참한 도둑년이랑 살게 되어서.”
그 말을 옆에서 들은 세아가 두 눈을 부릅뜨더니 지연에게 달려들어 지연의 팔을 낚아챘다.
“야! 너 지금 나한테 뭐라고 한 거야? 도둑년?”
“정세아 씨, 그 머리로는 무슨 소리인지 모를 테니 내가 한 번만 말해줄게, 잘 들어야 해?”
지연이 세아의 손에 잡힌 팔을 쳐내며 웃었다.
“네가 입은 그 원피스, 넌 그 옷이 어떤 옷인지 모르지? 모르니까 아무 생각 없이 훔치고, 이곳에 입고 왔겠지. 넌 우리나라에 딱 3벌 들어온 전국 백화점 VVIP들에게나 판다는 옷을 입고 있는 거야. 그 원피스를 네가 샀다는 말, 하지 마. 2벌은 어느 분들이 산지 내가 알고, 마지막 3번째를 내가 산 거였으니까. 가격? 나에게도 부담되는 옷이었어. 아무리 차민우의 빽이 생겼다지만, 글쎄? 저 사람이 그 금액을 지급하고 너에게 이 원피스를 사줬다고? 절대 상상이 안 되는데?”
말을 하더니 지연이 정세아의 가슴 윗부분을 툭 치며 말했다.
“이 옷, 가슴 쪽이 나에게는 작아서 내게 맞춰 늘려놨는데, 당신한테는 많이 남네. 이렇게 가슴 부분이 뜨면 안 예쁜 옷이야 이 옷은. 알겠어?”
“무……무슨 말을 하는 거야! 이건…… 이건 내가…….”
“브랜드 매니저 만나게 해 줄까? 너 이 브랜드 이름은 뭔지나 알아?”
세아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점점 시뻘게지더니 온몸이 눈에 띄게 부들부들 떨었다.
“쓰레기가 입었던 옷이라 더러워져서 도저히 내가 다시 받지는 못하겠다. 그냥 너 입어. 내가 큰맘 먹고 적선할게.”
이렇게 말하고는 민우와 주란을 향해 돌아섰다.
“이제 이걸로 끝내요, 우리. 다시는 만나지 맙시다.”
지연이 바닥에 흩어져 떨어져 있는 혼인신고 서류를 집어 들고는 그들의 앞에서 갈가리 찢었다.
“잘 살아, 그렇게 죽고 못 살던 첫사랑이랑. 평생 헤어지지 말고, 꼭 붙어서. 알았지? 평생.”
민우의 얼굴에 던져진 찢어진 서류 조각들이 사방으로 휘날렸다.
뒤를 돌아 집에서 나가는 지연의 얼굴은 오히려 평온해진 표정이었다.
지연이 떠나고 난 뒤 한동안 그 누구도 입을 떼지 못했다.
모두에게 충격이었던 그 시간, 특히 민우에게는 믿을 수 없는 시간이었다.
세아는 왜 오지 말라는 이곳에 온 건지, 그리고 원피스는 또 무슨 말인 건지.
너무나도 혼란스러운 동시에 화가 치솟았다.
소파에서 끙끙대는 주란을 뒤로하고 세아의 팔을 거칠게 붙잡아 방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아파요, 민우 씨. 놔주세요.”
세아가 민우를 노려보며 말했다.
“오늘 오지 말라던 이유가 이거였어요? 은 지연 만나려고? 어머니까지 셋이서 뭘 하려고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고 저를 못 오게 한 거예요?”
“지연이가 말하던 원피스는 무슨 얘기야. 너 이 원피스 지연이 것 훔친 거야? 미쳤어? 도대체 언제 가져간 거야?”
민우는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고, 오히려 믿을 수 없다는 듯 세아를 채근했다.
“무……무슨 말이에요. 아까는 은 지연 때문에 내가 설명할 시간이 없었는데, 훔치기는 누가 뭘 훔쳤다는 거예요?”
“그럼 지연이 얘기는 무슨 말이야? 이 원피스는 어디서 난 거고? 세아 네가 산 거 맞아?”
“내가 산 거 맞아요. 이거 창피하지만, 특A급 짝퉁이에요. 아까 그 여자 말대로 오리지널은 너무 비싸니까 당신에게 사달라고 할 수도 없고…… 가지고는 싶고. 그래서 제가 아는 사람 통해서 산 오리지널이랑 똑같이 만든 거 구한 특A급 짝퉁이라고요. 당신 설마 그 여자 말만 듣고 날 의심한 거예요?”
세아가 오히려 화가 난다는 듯 오히려 민우에게 따졌다.
“확실해?”
민우는 그녀의 말이 사실 믿기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안 믿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지금 당신 나 의심해요? 진짜? 와……. 당신이 어떻게 나한테 이래요.”
세아의 눈에 또 금세 눈물이 차올랐다.
‘또 울어, 또!’
민우는 이 상황과 세아, 주란 모두에게 짜증이 났다.
“그래 알겠어. 당신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억울하다고요! 진짜! 그리고 이 상황은 당신이 나에게 설명해 줘야 하는 상황 아니에요? 왜 죄 없는 나만 가지고 뭐라 하는 거예요? 오늘 은지연이랑 왜 만난 거예요? 그 여자랑 따로 만난 거, 오늘이 처음 아니죠?”
“무슨 말이야. 오늘 우리 헤어지는 문제 때문에 만난 거야.”
“저 여자는 도대체 왜 이렇게 질질 끄는 거예요. 맘 떠난 남자 잡고 뭘 하려고. 무슨 억하심정으로 이러는 거냐고요!”
세아가 신경질적으로 쏘아대며 말했다.
“이제 더는 이혼 얘기 나올 필요 없어. 이혼할 필요도 없고.”
민우는 거의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세아에게 말했다.
“알고 보니, 은지연과 나……. 혼인신고도 안 되어 있었어.”
“네에? 그게 진짜예요? 어머 어머, 그럼 당신 서류상으로는 미혼인 거죠? 진짜 너무 잘됐다! 그럼 우리 당장 신고해도 되는 거네요?”
세아가 방금까지 글썽이던 눈물을 쏙 삼킨 채 함박웃음을 짓는 얼굴로 민우에게 말했다.
“너무 잘됐네요! 그럼 이제 우리 숨어서 만날 필요도 없고, 당당하게 밖에도 다녀도 되고요.”
“그래……. 잘됐지.”
떨떠름한 표정의 민우가 마지못해 동의했다.
“그럼 월요일에 당장 혼인신고 하러 가는 건 어때요, 우리? 더는 시간 끌 필요 없잖아요?”
“어떻게 그래, 지금 당장. 우선 시간을 좀 가지고 아버지에게도 말씀드려야 하고.”
“당신은 내 맘과 다르게 급하지 않은가 봐요? 나는 하루라도 빨리 우리가 정식 부부가 되었으면 좋겠는데.”
민우가 미적지근하게 대답하자 세아는 입을 샐쭉댔다.
“무슨 그런 섭섭한 말을 해 세아야. 그런 생각하지 마. 나도 당장이라도 혼인신고 하고 싶지. 하지만 알잖아, 우리 집. 아버지 말이 절대적인 거. 그러니 차근차근 인사도 하고, 어머니 아버지 맘도 잡아보자는 거지. 아버지가 지연이를 워낙에 예뻐해서. 아니, 이건…….”
민우는 정신없이 이야기하다 세아에게 해서는 안 되는 말을 내뱉고는 급하게 입을 닫아버렸다.
세아가 민우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그렇게 아버님이 예뻐하는 부인 버리고 왜 나랑 살려는 거예요, 민우 씨는? 그럼 아버님이 끝까지 반대하면 난 다시 버려지는 거예요? 그러고 나서 다시 그 여자나 다른 부잣집 부인 찾는 거냐고요? 저 여자와 3년 전 결혼할 때도 아버지 때문에 나 버리고 그 여자랑 결혼한 거잖아요? 아버지가 밀어 넣은 여자랑 살아야 후계자 구도에 들어간다고 하면서.”
민우가 매섭게 변한 세아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
“미안해 세아야, 네가 상처받을 말을 내가 하는 게 아니었는데 실수했어. 아버지는 곧 찾아뵙고 인사드리자. 내가 곧 시간 잡을게. 결국은 우리 사이 허락해 주실 거야.”
세아는 그의 말에 믿음이 가지 않았다.
그는 한창 그녀에게 빠져 있었을 3년 전에도 후계자 자리가 자신보다 더 우선이었다.
무슨 아버지 눈치를 그리 보는 건지.
아버지가, 아버지는, 그래도 아버지 말을…….
그렇게 주저리주저리.
민우가 서자라서 그런 게 아니고, 그 자체가 아버지의 기에 눌려 사는 것 같았다.
그러니 아버지에게 반항 한번 못해보고 사랑한다는 여자를, 오랫동안 사귄 여자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그렇게 쉽게 날을 잡았겠지.
다시는 그렇게 버려질 수 없었다.
“민우 씨, 그래요. 우리 천천히 아버님 어머님 마음을 얻도록 해요. 내가 기다리고, 노력할게요.”
“고마워 세아야. 이해해줘서.”
“그 대신, 내가 말하는 이거 하나는 나를 따라줘요.”
“그게 뭔데?”
“우리, 아기 먼저 가져요.”
“뭐? 그게 무슨 말이야?”
갑작스러운 ‘아기’라는 단어에 민우의 눈이 깜짝 놀라 커졌다.
“민우 씨, 이젠 다 해결된 거잖아요. 당신 결혼한 것도 아니고 서류상 미혼인데 이제 뭐가 문제겠어요? 그러니 우리 빨리 아기 가져요.”
민우는 사실, 이 상황에서 아기 이야기를 꺼내는 세아가 전혀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흥분해 있는 그녀에게 맞다 아니다 이야기하는 것도 아닌 듯싶어 우선은 그녀를 진정시키기로 했다.
그리고 우선 이 모든 상황을 빨리 마무리하고 나가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지끈지끈 머리가 너무 아팠다.
“그래 알았어. 잘 생각해보자. 네 말대로 이제 문제가 될 건 없으니.”
세아가 환하게 웃으며 민우를 꼬옥 껴안았다.
“내가 노력할 테니, 당신도 나를 위해 노력해 줘요. 우리 떨어져 있었던 시간 까맣게 잊도록 더욱 행복해져요. 민우 씨.”
둘이 방에서 이야기를 마치고 거실로 나오자 주란이 여전히 씩씩대며 거실 소파에 누워 있었다.
아까 지연과의 만남에 화가 가시지 않은 듯했다.
갑자기 벌떡 일어나 앉은 주란이 민우 곁에 있던 세아에게 뛰어가더니 양팔을 붙잡고 그녀를 마구 흔들기 시작했다
옆에 민우가 있으니 더욱 힘을 받았고, 저번에 세아에게 받은 면박이 다시 생각나기도 했다.
“너희는 대체 이 상황에 무슨 비밀 얘기를 속닥거린다고 둘이 방엘 들어가! 그리고, 세아 너는 무슨 낯짝으로 내 아들 집에 이렇게 당당하게 오는 거냐? 엉? 네가 제정신이 박힌 애라면 이러면 안 되는 거지! 어디 부인 있는 남자 집에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드나들어 드나들길!”
주란이 세아를 마구 흔들어대는 것과 동시에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패악을 부렸다.
갈데없는 분노와 흥분을 세아에게 대놓고 풀고 있었다.
예전 지연이 이 집에 살 때 하던 그 버릇이 그대로 나온 것이다.
그 못된 버릇.
성질이 나면 어딘가에 패악을 부려야만 풀리는 못된 성미.
차 회장의 본처인 김지원이 있는 본가에 갔을 때.
차 회장이 자신에게 면박을 주었을 때.
투자했던 곳에서 뭔가 잘 안 풀릴 때.
주란은 화가 나는 일이 생기면 연락 없이 지연에게 찾아와 칼날 같은 독설을 퍼붓고, 때로는 지연의 몸을 흔들거나 밀면서 화풀이를 해댔었다.
“네가 잘해야 우리 아들이 너에게 가지, 괜히 민우가 세아를 못 잊는 게 아니다?”
“넌 집안 좋고 대학만 잘 나오면 다니? 할 줄 아는 게 뭐가 있니? 시집오려면 음식도 할 줄 알아야지 이게 뭐니.”
“민우가 너와의 결혼 얼마나 하기 싫어했는지 알지? 그런 민우 마음을 잡으려면 네가 애라도 있어야지 어떻게 걔 마음을 잡겠어?”
이제 지연은 없으니 눈에 보이는 세아에게 패악을 부릴 수밖에.
“어머니!”
민우가 미친 사람처럼 날뛰는 주란을 붙잡아 말렸다.
“어머니, 저에게 왜 이러셔요. 제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요. 전 민우 씨 사랑한 죄밖에 없는걸요.”
세아가 주란에게 붙잡힌 팔을 빼지 못하고, 눈물을 뚝뚝 흘리며 흐느꼈다.
눈물을 흘리는 그녀를 보자 화가 난 듯 민우가 주란을 밀치듯이 떼어냈다.
“어머니! 제발 좀 그만 하세요! 도대체 세아에게 이게 무슨 짓이세요. 하아……. 오늘은 이만 돌아가시는 게 좋겠어요. 제가 나중에 정리되면 연락드리겠습니다. 그전까지는 여기 오지 마세요.”
민우가 말렸지만 주란은 제 성질에 못 이겨, 여전히 씩씩대며 세아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다.
세아는 옆에 민우가 있으니, 저번처럼 주란에게 대들고 맞먹을 수가 없었다.
분출할 곳 없는 분노는 폭발하기 일보 직전이었지만, 민우의 얼굴을 보며 꾹 참았다.
그에게는 그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도 들키고 싶지도 않았다.
다만…… 언젠가는 은지연에게도, 강주란에게도 고스란히 다 갚아주겠다며 혼자 되뇌며 입술을 깨물고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