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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두 사람 (17/85)


17. 두 사람
2022.09.26.


지연은 민우의 집에서 나와서는 잠시 걸었다.

속 시원하면서도 텅 빈 듯 허한, 복잡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였다.

아직도 아까의 흥분이 가라앉지 않아 심장이 마구 두근거렸다.

작정은 했었지만, 자신이 어떻게 그렇게 독기를 뿜으며 말할 수 있었는지.

다시 생각해도 잘했다 싶었다.


‘은 지연! 너 오늘 좀 잘했다.’

이제 끝이고, 평생 안녕이었다.


‘나도 이제 아름다운 사랑도 하고, 커리어도 멋지게 성공하고, 투자하는 것도 다 대박 나서 너희들 다 보란 듯이 행복하게 살 거야! 그렇게 행복해져서 너희에게 최고의 복수를 해주겠어.’

‘아니다, 복수는 무슨 복수, 너희가 어찌 살던 난 신경 쓰지 않을 테니 알아서 살아라. 난 더 행복할 테니.’

‘아니야, 이 사람들 못된 짓한 만큼 벌은 받아야지.’

지연의 머릿속에 이런저런 많은 생각이 뒤죽박죽 뒤엉켜 맴돌았다.

그때였다.

지연의 핸드폰이 울렸다.


“누구지 금요일 저녁에? 하영인가? 아니면 은우?”

갸웃하면서 핸드폰을 확인하니, 강현이었다.


“본부장님이 이 저녁에?”

받을지 말지 잠시 고민이 되었지만 결국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본부장님.”

“안녕하세요, 지연 씨. 금요일 저녁 어떻게 보내고 있어요?”

“저요? 음……. 쓰레기 분리수거랄까. 아무튼, 정리하고, 지금 시간 좀 나서 걷고 있어요.”

“쓰레기 분리수거? 이사하고 나서 정리할 게 아직 많았나 보군요. 그런 정리를 황금 같은 금요일 밤에 하고.”

“네! 3년이나 묵혔던 쓰레기들이었는데 오늘 딱 분리수거했더니 속이 다 시원해요. 본부장님은 불금에 뭐 하세요?”

“난 조금 전까지 운동하고 있었어요. 그러고 나서는 지연 씨 생각나서 전화했습니다.”

지연에게는, 뭔가 이런 말랑말랑한 대화가 어색한데, 싫지는 않은 이상한 감정이었다.

조금은 더 느끼고 싶은…….


“본부장님!”

“네, 얘기해요. 지연 씨”

“혹시 이 이후에 특별한 계획 있으세요?”

“음……. 아니요? 아마 와인 한잔하면서 최신 영화나 좀 찾아볼 듯하네요.”

“그럼 이건 어떠세요? 저랑 밖에서 한잔 안 하실래요? 불금인데?”

평소의 지연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제안이었지만, 지금은 평소와 다르게 감정이 고양되어 있었고, 왠지 이런 밤을 혼자 보내고 싶지 않았다.

몇 초간 정적이 이어졌다.


“지연 씨 데이트 신청이라면 당장이라도 나가야겠군요.”

데이트 신청?

하긴 데이트가 별거인가? 시간을 함께 보내면 그게 데이트지.


“네, 데이트 신청 맞아요. 저랑 시간 좀 보내주세요.”

“좋습니다. 몇 시에 어디가 좋겠어요?”

“30분 뒤에 빌라 1층에서 만나요. 너무 먼 데 말고, 집에서 걸어갈 수 있는 데로 본부장님이 데리고 가 주세요.”

”좋아요. 그럼 30분 뒤에 만나요. 제가 끝내주는 곳으로 데리고 갈 테니.”

웃음 섞인 강현의 목소리에 조금은 답답했던 지연의 마음도 한결 가볍고 즐거워졌다.

바로 택시를 타고 집으로 향한 지연은 빌라에 도착해서 1층 정원을 왔다 갔다 좀 걸었다.


“우리 집 참 좋다. 이런 예쁜 정원도 있고. 우리 집, 우리 집~.”

새삼 입 안에서 맴도는 ‘우리 집’이라는 말이 참 좋았다.

지연 혼자 살지만 ‘우리 집’이라고 말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내 집.

민우와 살 때는 말할 때마다 참으로 어색했던 ‘우리 집’

‘당신 집’이나, 혹은 그냥 ‘집’이라는 말이 더 잘 어울렸던 그 집이었다.

정원은 오늘 막 잔디를 깎았는지 푸릇푸릇한 풀 향과 달콤한 꽃 향이 섞여 신선한 향을 가득 내뿜고 있었다.

그런 정원에서 3층에 있는 자신의 집을 바라보니 더욱 애정이 샘솟았다.


“뭘 그렇게 흐뭇하게 바라봅니까?”

“엄마야~.”

갑자기 곁에서 목소리가 들리자 지연이 화들짝 놀랐다.

조금 전에 샤워했는지 머리가 촉촉하게 젖어 있는 강현이 지연의 바로 곁에 서 있었다.


“미안해요. 많이 놀랐어요? 내가 몰래 온 것도 아닌데 바로 옆에 올 때까지 아무 소리를 못 들었나 보군요.”

“네, 전혀 몰랐어요. 저는 그냥…… 3층 우리 집 보고 있었어요.”

“우리 집, 어감이 참 좋네요. 그냥 집보다.”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며 말하는 강현이 너무 신기해서 지연이 두 눈을 크게 뜬 놀란 얼굴로 강현을 쳐다보았다.


“왜요? 왜 이렇게 놀라요?”

“제가 조금 전에 딱 그 생각 했거든요. ‘우리 집’이라는 어감이 너무 좋다……하고. 근데 본부장님이 그 얘기를 하니까 엄청 신기해서요.”

강현이 갑자기 심각한 얼굴로 지연의 귓가에 얼굴을 가까이 대더니 속삭였다.


“이거 비밀인데, 제가 사람의 머릿속을 읽을 수 있거든요. 독심술같이. 30분 전 생각까지 가능해요.”

그렇게 말하더니 손가락을 입가에 대면서 ‘쉿’이라는 포즈를 취했다.


 


‘뭐지 이 사람? 방금 진심으로 말한 건 아니겠지?’

지연이 조금은 혼란스러운 얼굴을 하였더니 강현이 웃음을 터트렸다.


“지연 씨는 역시 너무 재밌는 사람이네요. 얼굴에 다 드러나요 ‘이 사람 좀 이상한 거 같은데’하는 표정이 얼굴에 가득하네요,”

‘어머! 진짜 생각을 읽는 건 아니겠지?’

조금은 진심으로 생각하게 된 지연이었다.


“저녁 먹었어요?”

“아니요, 아직이요. 배도 아주 고파요. 맛있는 안주가 있는 곳으로 가요.”

“그럼 20분 내외로 걸어갈 수 있는 데로 갈게요. 그런데 그렇게 높은 구두 신고 괜찮겠어요?”

“네, 그럼요. 20분 정도는 전혀 상관없어요. 자, 가요.”

지연과 강현은 빌라 입구로 향했다.

빌라 단지를 나와서도 근처에 조경이 잘 가꿔진 가로수들이 늘어서 있어 동네가 참 아름답고 따뜻해 보였다.

둘은 천천히 걸으며 금요일 밤을 느긋이 즐겼다.

뺨에 와닿는 밤공기가 선선했다.


“본부장님은 보통 금요일에 뭐 하세요? 일하시나요?”

“저도 금요일은 개인 생활하는 거 좋아합니다. 요즘같이 프로젝트로 바쁜 날 빼고는 문화생활을 즐기거나 친구를 만나요, 어떨 때는 혼자 영화를 보기도 하고. 오늘도 봐요, 미인과 데이트하잖아요.”

강현이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미인……이라고 하기엔 좀 힘들지만, 뭐 넘어가요. 그럼 친구들 만나면 뭐 하세요? 저는 친한 친구가 몇 명 있는데, 근 몇 년간 사정이 있어서 자주는 못 보고 최근에 좀 자주 보게 되었는데 만나면 주로 차를 마셔요. 그리고 수다를 떨죠. 말하고 보니 별로 특별할 게 없네요.”

“저도 비슷합니다. 저는 친한 친구들 함께 모이는 걸 좋아해요. 친구들이 몇몇은 결혼해서, 다 같이 밤늦게까지 노는 날은 몇 달에 한 번이고, 보통 만나면 함께 식사를 같이 해요. 식사하면서 대화를 많이 하고. 남자들도 수다 떠는 걸 참 좋아합니다.”

어깨를 으쓱하는 동작을 취했다.


“아, 가끔 친구들이 집으로 초대해 줘서 모이는데, 저 빼고는 이제 다들 커플이 되어서는 제가 혼자 외롭죠. 아, 이쪽으로 걸어요.”

곧 강현이 지연을 끌어 안쪽으로 걷게 했다.

아무래도 인도가 좁아지고 차도가 가까우니 보호해 주려는 듯했다.


“남자들도 이야기를 많이 하는군요! 모이면 무슨 얘기해요? 정치 얘기? 경제? 사회?”

“뭐 그런 얘기들도 가끔 하지만 대부분 가정이나 아이들 얘기, 결혼 안 한 친구들은 연인 얘기. 가끔 운동 얘기도 하고요. 친구들과 종종 모여서 농구하거든요. 몸이 예전처럼 날쌔지는 않지만.”

“여자들이랑 비슷하네요. 전 오빠가 있는데 좀 과묵한 편이라서 남자들은 어떤 얘기 하는지 몰라 궁금했어요. 아니면 오빠도 내 앞에서만 그러고 친구들 만나면 수다쟁이였으려나?”

둘은 평범하고 소소한 주제로, 끝없이 대화를 이어나가며 함께 걸었다.

어느새 목적지에 다다랐는지 강현이 어느 작은 일식집 앞에 멈춰 섰다.


“여기예요. 여기 주방장 특선이 아주 잘 나와요. 제가 여기 단골이라 더 잘해줄 거니, 저만 믿어요.”

“기대돼요!”

둘이 안으로 들어가자 낮게 늘어진 아늑한 조명이 인상적인 실내장식이 눈에 띄었다.

일식집이었지만 분위기는 일반적인 곳에 비해 좀 더 아늑했다.

얼마 안 있어 주방장이 그들을 발견하고는 입구로 나와 반갑게 인사했다.


“강현아! 오랜만이다. 오늘은 혼자가 아니네?”

“오랜만이에요, 형.”

둘은 주방장의 안내로 안쪽 바에 앉았다.


“누구신지 소개해 줘야지?”

주방장의 두 눈에는 그녀가 누구인지 매우 궁금해 죽겠다는 표정이 가득했다.


“제가 요즘 다가가려고 노력하고 있는 분이에요. 그러니까 형이 진짜 맛있는 거 준비해 주셔야 해요. 믿어요, 형.”

강현이 한쪽 눈을 찡긋하며 대답했다.


“이야~ 진짜야? 이게 얼마 만의 좋은 소식이냐! 내가 잘해야 강현이 네 연애를 빨리 볼 수 있다는 말이지?”

주방장이 껄껄껄 웃으면서 앞치마를 바로 하더니 지연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저는 강현이 친한 형, 민규식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은지연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우리 강현이 잘 부탁합니다. 신이 내려주신 저 얼굴이 아깝게, 저렇게 생겨서 몇 년간 연애 코빼기도 못 하고 있네요. 드디어 우리 강현이에게도 꽃비 내리는 봄이 왔나 봅니다.”

규식은 너스레를 떨며 이야기했지만, 전혀 과장되지 않고 굉장히 유쾌해 보였다.


“제가 우리 강현이 잘 봐달라고, 오늘 끝내주는 코스로 쏘겠습니다. 강현이에게 가산점 추가해 주셔야 해요?”

“하하하, 가산점. 네, 알겠어요.”

곧 규식이 준비해 준 신선한 스시와 그 외 요리들을 감탄하며 먹은 지연은 두 손 모두 엄지 척을 하였다.


“정말 너무 맛있어요, 본부장님. 본부장님이 끝내주는 곳이라고 하신 이유를 너무 잘 알겠어요.”

지연의 피드백을 미소를 지으며 듣던 강현이 입을 열었다.


“우리 사석에서는 서로 이름으로 부르는 게 어때요? 제가 여기서는 지연 과장님이라고 안 하듯이, 지연 씨도 저를 강현 씨라고 불러주면 좋겠는데?”

“이름으로요? 그건 좀…….”

“빨리요. 자 해봐요. 강현 씨.”

강현이 손으로 턱을 괴고는 지연의 대답을 기다렸다.

두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짓궂은 표정을 얼굴 한가득 싣고서.

지연은 강현의 요구가 좀 난감했다.

까마득히 높은 상사인 데다, 아직 그와 어떤 사이가 아닌지라 이름을 불러도 되는 건지.


“지연아, 너 그 본부장이 너에게 고백했다며. 만나봐. 당장 뭘 하라는 게 아니고, 편하게 만나보라고. 그 사람 멋지고 신사적이라며?”

갑자기 친구 하영이 말해준 말이 머릿속에 울렸다.


‘그래, 편하게.’

“강현 씨.”

지연이 강현의 이름을 말하자, 강현이 눈부시게 멋진 함박웃음을 짓더니 지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잘했어요. 아주 많이 잘했어요!”

강현의 말에 지연이 ‘풋’ 웃음을 터트렸다.


“본부장님 지금 초등학생에게 ‘참 잘했어요’ 도장 찍어주시는 선생님 같은 말투였어요.”

“어허~ 강현 씨라니까.”

“아, 강……현 씨.”

강현과 지연은 미세하게 더 부드러워진 둘 사이의 기류를 느끼며 다시 이야기를 이어갔다.

식사를 다 하고, 둘은 간단하게 마실 화이트 와인과 칵테일을 시켰다.


“이제 쓰레기 분리수거는 다 끝난 겁니까? 이삿짐 정리하며 나온 쓰레기였나 봐요?”

강현이 아까 지연이 한 이야기를 꺼냈다.


“아, 쓰레기. 이삿짐 정리하며 나온 쓰레기가 맞긴 하네요. 네, 이제 분리수거 잘해서 더는 안 나올 것 같아요. 싹 다 정리하니 어찌나 속이 시원한지 모르겠어요.”

지연은 정말 속 시원하다는 표정을 짓더니 말을 이었다.


“진작에 정리했어야 했는데, 살면서는 그게 쓰레기인지 몰랐던 거예요. 사람이든 물건이든 제대로 된 게 맞는지, 쓸모가 있는지 없는지, 이게 맞는 선택인지 아닌지……. 꼭 중간에 한 번씩은 멈춰 서서 뒤돌아보고 점검해봐야 했는데, 제가 그걸 못했어요. 그때는 분별력이 없었거든요. 하지만 이제라도 발견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지연이 강현을 바라보며 확신에 찬 말투로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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