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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키스해도 되나요? (18/85)


18. 키스해도 되나요?
2022.09.29.



 
시간이 흐를수록 깊어진 둘의 대화는 점점 더 무르익었다.

좋아하는 음악과 영화, 어떤 책을 좋아하는지, 무슨 색을 좋아하는지 등등 서로의 관심사에 관한 이야기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지연 씨는 어떤 영화 종류를 좋아해요?”

“음……. 저는 로맨스도 좋고, 드라마도 좋아해요. 아, 미스터리나 공포도요!”

“미스터리나 공포요? 의외인데요? 지연 씨 생각보다도 더 심장이 튼튼한가 보군요.”

“어렸을 때, 한때는 판타지 영화제 같은 데 가서 하루에 4편에서 5편, 3일간 내내 영화를 본 적도 있었어요. 그런 영화제에서 참신한 미스터리나 공포 영화 많이 나오거든요. 그런데, 보는 것까지는 너무 좋았는데 나중에는 머릿속이 뒤죽박죽되어서, 3년 정도 그렇게 보다가 하루에 한 편 보는 것이 제일 좋다는 것을 깨닫고는 멈췄던 적도 있어요. 그래도 그때의 그 열정은 그리워요.”

어렸을 때의 자신을 추억하며 지연이 흐뭇하게 말했다.


“좋은데요, 그 열정? 영화제나 뮤직 페스티벌 같은 곳에 3~4일씩 가시는 분들 보면 나도 해보고 싶기도 했지만, 사실 쉽지가 않으니 해본 적이 없거든요. 부럽기도 하네요, 그 열정이. 아, 혹시 XXX 이 영화도 좋아해요? 미스터리와 드라마가 아주 잘 조화된 영화인데.”

“XXX, 알죠. 너무 재미있게 봤던 영화예요. 이 영화 마지막 엔딩이 너무 흥미진진하지 않았어요? 오픈 엔딩으로 확실한 결말을 말하지 않고, 시청자가 알 듯 말 듯, 이해될 듯 말 듯…….”

“지연 씨 생각은 어때요? 어떤 결말인 것 같았어요?”

“음……. 전, 그들이 다시 만났을 것 같아요. 아니, 사실 못 만났을 것 같은데 만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못 만나면 주인공 인생이 너무 불쌍하잖아요. 아무런 잘못도 없는데. 재미를 위해 슬픈 결말이 필요하기도 하지만, 전 이제는 해피엔딩이 좋아요.”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영화의 결말은 못 만났을 것 같은데, 개인적인 바람은 만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또 제 생각을 읽으신 건 아니죠?”

“이런, 들켰군요.”

강현이 작게 웃었다.

평소에도 그런 생각을 했었지만, 가까이에서 들리는 강현의 저음은 근사했다.

특히 웃을 때. 아직 그에 대한 마음이 확실한 것이 없음에도 두근거리기까지 했다.


“강현 씨는 목소리가 참 좋네요.”

평소라면 절대 하지 못할 말들이 약간의 취기를 빌어 술술 나왔다.


“그래요? 좋군요. 관심 있는 이성이 내 목소리가 좋다고 하니.”

“다들 그렇게 생각할 거예요”

“고마워요. 그런데 모두의 생각은 사실 저에게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 여자의 생각만 중요하지.”

그의 말에 지연의 심장이 주체 못 하고 뛰었다.


‘은 지연, 너 오늘 왜 이래.’

“강현 씨는 연애하면 어떤 스타일이에요? 예를 들면, 헌신하는 스타일? 아니면 그냥 무던한 스타일이려나?”

지연은 턱을 괴고 강현을 바라보며 물었다.


“글쎄요, 이런 건 제삼자나 아니면 저와 연애를 해본 사람의 피드백을 들어봐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래도 본인의 마음가짐이라는 게 있잖아요.”

“본인의 마음가짐이라. 그렇다면 저는 좋아하는 사람에게 올인하는 스타일인 것 같네요.”

“올인? 어떻게요?”

“좋아하는 사람에게 정성을 다하려고 노력합니다. 제 마음을 많이 표현하려고 노력하고, 많이 보여주려 하죠. 시간이 허락하는 한 최대한 많이 만나고 연락도 자주 하고요. 물론 일 때문에 제 마음처럼 되기 쉽지 않은 상황이 종종 있겠지만, 그런 건 연인에게 미리 알려줘야겠죠. 양해를 받아야 하는 부분이니.”

“와, 너무 멋진데요?”

“이런 게요? 이러려고 연애하는 거 아닌가요? 사랑한다면서 버려두고 이리저리 재는 건, 그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마다 생각하는 게 다를 테니 이 부분은 제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강현 씨 연인이었던 분은 행복했겠는데요?”

“그랬으면 좋겠군요, 이제는 헤어졌지만. 전 제 감정을 모두 쏟아붓기도 하지만, 그만큼 저도 상대방에게 원하게 됩니다. 그리고 독점욕도 매우 강한 편이고, 질투도 많아요. 그런 걸 싫어하는 사람도 있겠네요. 아, 이런……. 단점은 말하면 안 되는데 너무 술술 말했군요.”

강현이 칵테일을 한 모금 마시더니 지연을 쳐다보며 말했다.


“지연 씨는 어떻습니까? 어떤 연애를 했습니까?”

지연은 그의 질문을 받고, 순간적이지만 당황했다.


“저요? 음…… 글쎄요…….”

‘나의 결혼 생활에 연애라는 말을 붙일 수 있는 것들이 있었을까? 어쩌면 나는 짝사랑이라는 가면을 쓰고, 껍데기와 살며 이것이 사랑이라고 자기 위안을 하며 살았던 걸지도 모르겠다.’

지연은 갑자기 입이 써, 앞에 있는 와인잔을 들어 한 모금 들이켰다.

은은한 꽃과 과일의 향이 입안을 감쌌다.


“저는 모든 것을 다 주는 스타일이었네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데 그게 좋지만은 않은 것 같아요.”

“왜요?”

“너무 다 주고 나니, 나중에 나 자신이 없어져 버렸어요. 원래의 나는 하나도 남지 않고 상대방에게 맞춰진 다른 은지연만이 남았달까. 그래서 사랑을 잘못한 것 같아요.”

“…….”

“앞으로 하는 사랑은 그러지 않고 싶어요.”

“상대가 누구냐, 당신의 사랑을 어떻게 받아들이냐가 문제였던 겁니다. 당신은 최선을 다해 사랑한 거지 잘못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말아요.”

강현의 부드러운 저음이 귀를 간지럽혔다.

왠지, 그의 말에 3년간의 힘듦이 조금은 위로받는 느낌을 받았다.

이 사람은 어쩌면 말 하나하나를 이렇게 따뜻하게 하는지.


“고마워요, 강현 씨. 당신의 말이 마음의 위안이 되네요.”

둘은 잔을 들어 다시 한번 가볍게 부딪혔다.


“그나저나 이 와인 이름이 뭐죠? 분명 예전에 똑같은 걸 몇 번 마셔봤는데 이 정도는 아니었거든요. 오늘따라 너무 맛있는데요?”

오늘따라 와인의 맛과 향이 더욱 감미롭고 향기로웠다.


“그렇다면 나 때문인 건데?”

“아, 네에~.”

둘이 동시에 킥킥대며 웃었다.


“강현 씨는 마지막 연애가 언제였어요? 아, 부담되는 질문이면 대답 안 해도 돼요.”

“지나간 이야기라 부담될 건 없습니다. 그렇게 대단한 연애도 아니었고. 5년 넘은 것 같네요. 누군가를 사귀었던 건. 그 사이 여자를 전혀 안 만난 건 아니에요. 좋은 사람들도 소개받아 보기도 했어요. 그런데 아쉽게도 머리로는 좋은 사람인인지는 알겠는데 내 마음에 좋은 사람은 아니더군요. 지연 씨는요?”

“저는……. 사실대로 말하면, 오늘 완벽히 깨졌어요. 마음이야 오래전에 부서졌고.”

“오늘 이혼했다는 말이에요?”

“아니요. 사연이 좀 복잡한데, 서류상 정리된 거라고 해야 하나? 뭐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오래전 이미 아무것도 아니게 되었고……. 그냥 인연 정리? 그런 게 오늘 깨끗이 정리되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아까 그런 말을 한 거군요?”

지연이 아까 쓰레기 분리수거를 했다는 말을 기억해 내고 강현이 물었다.


“아……. 그렇네요.”

“뭐가 되었던 지연 씨가 원하는 대로 된 겁니까?”

“네, 제가 원하는 대로 되었어요.”

“그럼 됐습니다. 그게 중요해요. 축하합니다, 잘 정리한 거. 그런 의미에서 건배!”

둘은 다시 한번 잔을 부딪쳤다.


“고마워요!”

둘은 몇 잔을 더 마신 후 밖으로 나왔다.

지연은 기분이 고양되고 둥둥 떠다니는 기분이었다.

이게 와인 탓인지, 분위기 탓인지를 모르겠지만.


“오늘 시간을 내 함께해 주셔서 고마워요, 강현 씨. 너무 즐거웠어요.”

“내가 고맙습니다. 이렇게 매력적인 분이 데이트 신청을 해주었는데. 오랜만에 너무 즐거웠어요.”

“그렇다면 다행이에요. 제가 강현 씨 갑자기 불러서……. 엄마얏!”

지연이 갑자기 비틀대다 넘어질 뻔한 것을 강현이 잡아주었다.


“괜찮아요?”

“네, 그런데 굽이…….”

신발을 보니, 지연의 구두 굽이 인도에 깔린 돌들 사이에 끼어 부러져 있었다.


“발목은요? 발목 크게 꺾인 것 아니에요?”

“괜찮은 것 같아요. 죄송해요, 강현 씨가 놀라셨겠어요”

지연의 구두 굽이 7센티 정도 되다 보니, 한쪽 굽이 나간 상태에서는 신고 갈 수가 없었다.


“그냥 신발은 벗고 맨발로 가야겠어요.”

“무슨 말이에요. 길거리에 유리도 돌도 얼마나 많은데. 자 업혀요.”

강현이 갑자기 한쪽 무릎을 굽혀 앉더니 자신의 넓은 등을 내밀었다.


“아니에요, 강현 씨, 저 진짜 괜찮아요. 20분 정도면 되는데요 뭐.”

“어서 업혀요.”

“아니……저기……. 제가 좀 많이 무거울 텐데.”

지연이 결정을 못 하고 우물쭈물하자 강현이 순식간에 본인의 힘으로 지연을 업어버렸다.


“무겁긴 뭐가 무겁다는……. 생각보다 많이 나가는 군요, 지연 씨.”

강현이 갑자기 앓는 소리를 했다.


“아 그러니까 어서 내려주세요. 빨리요.”

지연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갛게 달아올랐고, 강현의 등에서 버둥거렸다.


“농담이에요 농담. 깃털까지는 아니지만, 너무 가벼운데요? 내가 맛있는 곳 많이 데려가야겠네. 나한테 무거우려면 아직 멀었어요.”

강현이 더욱 세게, 지연을 업은 팔에 힘을 주었다.


“떨어질지 모르니 제 목에 팔 둘러요.”

“진짜 무거운데…….”

“어서요.”

“네…….”

지연이 부끄러움을 참고 강현의 목에 팔을 둘렀다.

넓은 그의 등에 업혀 꼭 붙어 있으니 그의 상쾌한 향이 강하게 풍겼다.


“자, 출발합니다.”

강현이 그녀를 업고 천천히 걸었다.


“강현 씨, 저 질문 하나 해도 되나요?”

“그럼요, 얼마든지요”

“예전부터 궁금했던 건데요, 바디 샤워 뭐 쓰세요? 아니면 향수인가?”

“이 향기 마음에 들어요? 지연 씨가 좋다고 하니 기분 좋군요.”

“네, 향이 너무 좋아요.”

“이 향은 제가 향을 몇 가지 선택하고 조향해서 오더메이드 한 바디 샤워예요. 그래서 이름이 따로 있지는 않아요.”

“그런 게 있어요?”

“마음에 들면 제가 선물할게요.”

“아니에요. 그러지 마세요.”

강현이 그다음 대답은 하지 않고 피식 웃기만 했다.

천천히 걷는 가로수가 늘어선 길의 밤공기가 참 청량했다.

나무들이 서로 대화를 하는 듯 바람에 흔들리며 나는 나뭇잎들이 부딪히는 소리도, 그렇게 흔들리며 퍼지는 싱그러운 풀냄새, 나무 냄새들도.

그래서 그런지 집으로 향하는 길이 더욱 아늑하고 기분 좋게 느껴졌다.

빌라 단지에 도착해서 지연을 집 앞에 내려준 강현이 ‘안 그래도 된다.’는 지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잠시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그러더니 지연의 발을 자신의 무릎 위에 올려놓더니, 발목을 세심히 살펴보았다.


“당장은 안 아프게 느껴지더라도 아까 삐었을 수 있어요. 꼭 응급처치하고 자요.”

“그럴게요, 강현 씨. 무거운 저 업고 와줘서 정말 감사해요.”

“하나도 안 무거웠습니다. 걱정하지 말아요.”

지연의 발을 보기 위해 무릎 꿇고 앉아 있던 강현이 다시 일어나니, 그가 얼마나 큰지 새삼 느껴졌다.

자신의 키가 그리 작은 키가 아님에도 구두까지 벗고 있었더니 땅꼬마가 된 기분이었다.


“그럼 잘 자요.”

강현이 부드러운 눈빛으로 지연을 쳐다보며 그녀의 머리를 잠시 쓰다듬더니 자신의 집으로 가려고 돌아섰다.


“강현 씨!”

지연이 갑자기 강현의 이름을 부르며 그의 팔을 붙잡았다.

거의 무의식중에 그런지라, 지연 자신도 놀랐다.

어느새 ‘더 같이 있고 싶다.’라는 생각이 지연의 머릿속을 잠식하고 있었다.


“무슨…….”

“강현 씨.”

“…….”

지연이 고개를 들어 강현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지금 당신에게 키스해도 되나요?”

둘 사이에 몇 초간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지연 씨, 지금 취한 것 같은데 내일 일어나면 지금을 후회할지도 몰라요.”

그의 말에 지연이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저 취하지 않았어요.”

느리게 눈을 깜빡이던 지연이 말을 이었다.


“취한 척하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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