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범 앞의 아기 토끼
(19/85)
19. 범 앞의 아기 토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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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범 앞의 아기 토끼
2022.10.03.
갑자기 주변의 모든 소음이 사라진 것처럼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심지어 두 사람의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지연은 자신이 도발해 놓고는 어떻게 숨을 쉬는지 잊을 정도로 더 긴장했다.
곧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혀들었고, 지연의 두 눈을 빤히 쳐다보는 강현의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더욱 깊고 짙게 가라앉았다.
그의 시선에 지연이 자신도 모르게 애간장이 타는 느낌이 들고 몸이 파르르 미세하게 떨렸다.
“부디 이 순간을, 후회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더욱 낮아진 그의 목소리에 지연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아버렸다.
감은 그녀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빨갛게 달아오른 귓불과 홍조가 번져가는 양쪽 뺨, 그리고 헐떡이며 얕게 쉬는 숨.
흡사 범 앞에 뭣 모르고 다가온 아기 토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현의 손이 그런 지연의 뒷머리를 부드럽게 감싸 끌어당겼고, 천천히 자신의 얼굴을 그녀에게로 내렸다.
닿았는지 아닌지도 모르게 살포시 그의 입술이 지연의 입술을 덮었고, 곧 그가 많이 긴장한 듯 앙다문 지연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댄 채로 무언가 나직이 속삭였다.
지연의 입술이 가빠진 호흡을 내뱉기 위해 잠시 열리자 강현이 순식간에 들어와 그녀의 안에서 유영하였다.
가볍게 시작된 그의 침입은 곧 깊고 강렬해졌고, 곧 지연의 모든 호흡을 앗아갈 듯 사로잡았다.
‘난…… 난 이런 키스는 몰라.’
지연은 난생처음 키스를 해보는 사람처럼 어찌할 줄 몰라 덜덜덜 떨리는 손으로 강현의 옷을 꽉 붙잡고 그에게 매달렸다.
서투른 지연의 반응이 오히려 강현의 깊은 곳 무언가의 불씨를 당긴 듯, 그는 지연의 허리를 감싸 안고 더욱 깊게 파고들었다.
한 줌이 되지 않을 듯한 가녀린 지연의 허리가 강현의 품에 더욱 세게 안겼다.
한번 맛본 지연의 달콤한 입술을 탐하며 강현은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지연이 숨이 차 강현의 가슴을 통통 때리기 전까지 그는 지연을 놓아주지 않았다.
“하아…….”
강현은 여전히 지연의 허리를 안은 채, 숨차하는 그녀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지연은 다리가 후들거려 쓰러질 것 같아 그의 셔츠를 더욱 세게 잡고는 그의 가슴에 이마를 기대었다.
“숨 다 쉬었어요?”
잠긴듯한 강현의 목소리에 지연이 고개를 들었다.
지연의 눈빛과 마주친 그의 눈빛은 새카만 어둠처럼 가라앉아 끝을 알 수 없이 깊어 보였다.
“네? 네.”
“그럼 한 번 더…….”
여전히 숨차하며 얕은 숨을 몰아쉬는 지연을 강현이 더욱 강하게 안으며 바로 다시 침입하자, 결국 지연은 강현의 목에 팔을 둘러 끌어안고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난 것인지도 모르는 채 둘은 정신없이 서로에게 빠져들었다.
수없이 빨아들인 서로의 호흡에 거칠어진 숨을 가라앉히며 강현이 지연의 입술에서 자신의 입술을 떼어내었다.
“더는……. 안 되겠어요.”
갑작스러운 강현의 말에 지연이 눈을 뜨고 몽롱한 눈빛으로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여기서 멈추지 않으면 난 당신을 놓아줄 자신이 없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지연의 이마와 눈가, 입술……. 얼굴 곳곳에 버드키스를 하고는 지연에게서 몸을 떼어내었다.
아직도 둘은 가라앉지 않은 흥분에 거친 호흡을 하고 있었다.
어색하게 흐르는 침묵을 먼저 깬 것은 강현이었다.
“우리 또 만나서 데이트 해야죠. 내일 시간 어때요?”
지연이 갑자기 이 상황이 부끄러워져 얼굴을 푹 숙이고는 고개를 얕게 끄덕였다.
“……좋아요.”
“그럼 내일 11시에 만나요.”
강현이 다시 한번 지연을 품에 끌어당겨 꼭 힘주어 안고는 풀어주었다.
집안으로 들어온 지연은 다리가 덜덜 떨려 입구에서 바로 주저앉아 버렸다.
자신도 자신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다.
‘나는 왜 그를 도발한 거지?’
약간의 취기와 약간의 허세, 그리고 약간의 외로움이 섞여 지연을 평소와 다르게 만들었던 것일까?
그저 그를 붙잡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냥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강현의 관심이 좋았다.
민우와의 아픔과 헤어짐에 화나고 가슴 아픈 감정의 찌꺼기들은 아직 가슴 깊은 곳에 쌓여 있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강현에게 그녀 역시 끌리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 경험한 그와의 키스는 그녀가 이전에 알고 있던 키스가 아니었다.
그녀가 아는 그것은…….
어떨 때는 강압적이거나, 또는 다른 관계에 연결된 의식 같은 느낌이었던, 아무런 감정이 들어 있지 않은 행위에 가까운 것이었다.
하지만 강현과의 키스는 달랐다.
온몸이 찌릿찌릿하고 감미롭고 황홀했다.
어디론가 날아갈 듯, 아니 어디에선가 그녀를 빨아들이듯…….
블랙홀에 빠진 것처럼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키스란 게 이런 거였어?’
지연은 자신에게 묻어난 강현의 향기를 느끼며 바닥에 주저앉아 아까의 기분을 곱씹었다.
아무 생각을 할 수도, 아니 숨을 쉴 수도 없이 몰아쳤던 그 느낌에서 지연은 쉽사리 헤어 나오지 못했다.
강현은 밤새 뒤척이다 결국 4시간도 채 못 자고 새벽부터 눈이 떠졌다.
예상치도 못한 지연의 도발이 그를 온통 흔들어놓았기 때문이다.
그녀의 입술은 예상보다도 더 감미로웠고, 부드러웠다.
한 품에 쏙 들어오는 그녀를 강현은 더욱 안고 싶었고, 마지막엔 정말 그녀를 떼어놓기가 너무 힘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밤새 그녀를 자신의 품 안에 가둬두고 울리고만 싶었다.
“은지연. 정말 의외에서 곳에서 맹랑하단 말이지…….”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지연과의 입맞춤을, 흥분 가득했던 기분을 좀 가라앉힐 필요가 있었다.
더는 잠은 안 올 것 같아 강현은 결국 일어나 새벽 운동을 택했다.
강현은 러닝머신부터 근력운동까지 2시간을 하고서도 정신을 차리지 못해, 마지막으로 얼음같이 차가운 물로 샤워를 하고서야 붕붕 떠 있던 마음이 좀 가라앉았다.
‘하, 이건 마치 무슨 첫사랑에 빠진 열다섯 사춘기 어린애 같군.’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며 강현이 자조했다.
하지만, 이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다.
어느 때보다 맑고 화창한 토요일이었다.
둘은 조금은 쑥스러우면서도 며칠 전보다 훨씬 부드러운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잘 잤어요?”
“네, 푹 잘 잤어요.”
강현이 묻자 지연은 해사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발목은 좀 어때요? 괜찮아요?”
“접질린 건 아닌가 봐요, 다행히 아프지는 않아요. 그래도 조심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오늘은 운동화를 신고 왔어요.”
청바지에 스니커즈를 신고 밝은 프린트가 된 티셔츠를 입은 지연의 모습에서 청량함이 넘쳐났다.
어제보다 더 예뻐 보이는 건 둘만의 특별한 시간을 나눴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녀가 원래 이렇게 예뻤었나?
강현이 자신도 모르게 지연의 얼굴을 잠시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강현 씨?”
지연이 큰 눈을 깜빡이며 강현의 이름을 부르자 강현이 정신을 차리고 차 시동을 걸었다.
“잘했어요. 자, 그럼 우리 출발할까요?”
강현이 눈부시게 웃으며 차를 출발시켰다.
둘 다 어제의 일은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
지연의 마음이 충분히 열리기에는 아직 이르다는 걸 강현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별했고, 무척 감미로웠지만, 섣부르게 말을 꺼내면 그냥 조금은 취한 밤의 해프닝으로만으로 끝날 수 있기에 강현은 조심스럽게 말을 아꼈다.
아직은 아니었다.
지연에게는 아직……. 좀 더 시간이 필요했다.
“오늘 우리는 어디를 가나요?”
지연이 기대에 찬 목소리로 물었다.
“오늘은 가평 쪽에 있는 수목원을 가려고 합니다. 날씨도 아름답고, 공기도 맑아서 야외에서 있어도 좋을 것 같아요. 혹시 더 좋은 아이디어 있다면 알려주세요. 목적지는 언제든지 바꿀 수 있으니.”
“아니에요. 수목원 가는 거 좋아요.”
“다행이네요. 다음에는 지연 씨에게 미리 물어볼게요.”
지연을 향해 강현이 부드럽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리고 그 근처에 정말 맛있는 맛집도 있어서 함께 들르려고 해요. 혹시 두부 좋아해요?”
“두부요? 좋아해요.”
“두부 요리를 정말 맛있게 하는 곳인데, 가평 갈 일이 많이 없어서 몇 번 못 갔거든요. 지연 씨와 함께 가게 되어 좋네요. 두부 좋아하면 거기 요리 아주 좋아할 거예요.”
지연은 왜인지 모르게 강현과의 대화가 살짝 어색했는데, 잠시 후 그와의 대화가 왜 자신에게 어색했는지 곧 깨닫게 되었다.
그 집에 살면서 3년간 지연에게 물어본 사람이 없었다.
뭘 좋아해? 뭘 먹고 싶어? 어디 가고 싶어? 뭘 할까? 같은 평범한 질문들.
“전 차도 있는데 근교도 많이 안 다녀 봤어요. 얼마 전까지는 그냥 마트나 백화점에 뭐 사러만 가보고. 그래서 서울 근교든 지방이든 뭐가 맛있는지, 뭐가 유명한지를 거의 모르네요. 이렇게 가보게 되니 너무 좋아요.”
“그렇다면 앞으로 나에게 맡겨 봐요. 아마 반년 뒤에는 웬만한 맛집 블로거보다 더 많은 맛집을 가보게 될 테니.”
“네, 그럴게요. 잘 부탁드려요, 본부장님, 아니 강현 씨.”
“잘했어요! 한번 배운 건 안 잊는 똑똑한 학생이네요, 우리 지연 씨.”
강현이 한 손으로 운전대를 잡더니 오른손을 들어 지연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럼요 강현 선생님. 제가 좀 많이 똑똑합니다.”
둘은 크게 소리 내 웃었다.
“그런데 강현 씨.”
“네.”
“저에게 말 놓으셔도 돼요. 편하게 반말하셔요. 저보다 나이도 많으시고, 직급도 높으신데.”
“반말이라…….”
강현이 잠시 고민하더니 말을 이었다.
“반말할게요. 지연 씨가 확실하게 내 여자가 되면.”
내 여자라는 말에 지연의 얼굴이 갑자기 화르륵 달아올랐고,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빨리 지연 씨에게 반말하고 싶네요. ‘지연아’하고 불러도 보고 싶고.”
지연은 운전하며 말하는 강현에게 붉어진 얼굴이 보이지 않도록 창문 쪽으로 얼굴을 돌리고는 창을 열었다.
‘이 말이 이렇게 섹시할 일이야? 왜 이렇게 목소리가 근사하게 느껴지는 거지?’
지연은 머릿속에서 뜬금없는 생각을 하며 계속 찬바람을 쐬었다.
“지연 씨 좋아하는 음악 종류 있어요?”
“다 좋긴 한데 오늘 같은 날씨에는 보사노바도 좋을 것 같아요.”
그러자 강현이 플레이리스트에서 뭔가를 한두 번 누르고, 곧 스피커에서 살랑살랑한 보사노바풍의 음악이 흘러나왔다.
아름다운 날씨와, 살랑대는 음악, 거기에 멋진 스포츠카를 운전하는 매력적인 남자.
지연에게는 정말 오랜만의 완벽한 토요일이었다.
1시간쯤 운전하고 도착한 수목원에는 꽤 많은 사람이 와 있었다.
대부분 연인 같았다.
웃고 떠들고 팔짱을 끼거나 허리를 감싸 안은 많은 연인 틈에서 강현과 지연은 조금은 어색하게 수목원 사이를 걸었다.
“전 수목원이나 식물원을 좋아합니다. 도심 속의 공원도 좋아해요. 머리가 복잡하거나, 고민이 있을 때 찾으면 제 머릿속의 것들을 모두 비워주는 느낌을 받거든요. 오늘은 사람이 꽤 많아서 그런 느낌을 받기는 쉽지 않지만. 그래도 콘크리트들 사이에 있다가 이런 곳에 오면 힐링이 되는 것 같아요.”
강현이 고백하듯 말해주었다.
“전 자주 가보진 못했지만, 강현 씨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 같아요. 저도 지금 힐링이 되는걸요.”
“다행이네요.”
몰랐는데 천천히 걷는 지연의 걸음에 맞춰 걸어주는 강현의 속도에, 지연의 머릿속에 문득 민우와 함께 백화점에서 시부모님 선물을 사던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보폭이 넓고 뭐가 그리 바쁜지 항상 빠른 걸음으로 걷던 그를 따라 걸을 때면 거의 뛰어다녔던 지연이었다.
지연이 뭔가라도 발견해 잠시라도 그걸 보고 있으면 민우는 금세 시야에서 사라지고는 했다.
함께 쇼핑하러 갔지만, 타인처럼 다녔던 그때.
그런데도 그는 항상 ‘빨리 좀 걷지, 너무 느리군.’이라는 말을 빼먹지 않았었지.
정세아와 다닐 때도 그랬을까?
이런 생각을 하다 지연은 왜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지, 머리를 흔들었다.
‘이런 좋은 순간에 왜 이딴 짜증 나던 순간이 기억난 거야?’
“뭔가 웃기는 상상을 하거나 이불킥 할만한 생각을 한 표정인데요?”
지연이 잠시 생각에 빠졌다가 머리를 휘젓는 걸 본 강현이 물었다.
“네, 맞아요. 진짜 어이없고 웃기는 생각이 잠시 났었어요. 그나저나 저희 언제 밥 먹으러 가요? 여기 너무 좋아서 계속 있고 싶은데, 사실 배가 너무 고파요”
지연이 조금은 불쌍한 표정으로 말했다.
“언제든지 바로 가면 되죠. 지금 가요.”
강현이 지연의 손을 잡아끌고는 차로 향했다.
무심결에 잡은 손이었지만, 지연은 그 손을 굳이 빼고 싶지 않아 그대로 잡힌 채로 강현을 따라 차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