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한 꺼풀 벗겨진 콩깍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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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한 꺼풀 벗겨진 콩깍지
2022.10.06.
은지연과의 난리 이후 한주 뒤, 세아는 오피스텔 생활을 접고 민우의 집으로 이사하였다.
민우는 좀 더 있다 이 집으로 이사 왔으면 좋겠다고 말했지만, 세아는 절대 시간을 더 끌고 싶지 않았다.
‘내가 왜? 이제 이 집의 안주인은 난데, 내 집을 왜 버려두고 밖에서 살아?’
그전에 있던 벽지며 가구들을 대부분 바꿔두었고, 침대도 큰 킹사이즈로 사다 놓았다.
그리고 드레스룸에 새 옷들이며 비싼 장신구도 잔뜩 채워두었다.
보기만 해도 흐뭇한 광경이었고, 어서 친구들에게 자랑하고 싶었다.
“이야~ 정세아 출세했네.”
“너무 부러워 정세아. 네 남편 될 사람이 완전 잘나가는 대기업 임원이라며?”
“내가, 세아 저렇게 될 줄 알았다. 어릴 때부터 좀 이뻤냐?”
상상만 해도 흐뭇했고, 모든 게 완벽했는데…….
오늘 아침 민우와의 대화 때문에 세아는 골이 잔뜩 났다.
“세아야, 이제 너도 준비해야지.”
아침 식사라며 세아가 차려준 새벽에 배송 온 볶음밥을 수저로 뒤적이며 민우가 이야기했다.
“뭘요? 뭘 준비해요?”
“뭐, 여러 가지 많잖아.”
“여러 가지 뭐요?”
“이제 곧 정식으로 아버지 어머니 만나 뵈어야지.”
“정말요? 언제요? 당장 이번 주말 어때요?”
들뜬 표정의 세아가 기대에 찬 눈빛을 하며 민우의 맞은편에 앉았다.
“지금은 안 되지, 이 상태로는.”
“이…… 상태?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아버지 까다로우신 거 당신도 알잖아. 어머니야 이미 봐서 당신 반대하는 거 잘 알 테고. 두 분 눈에 들려면 준비해야지.”
‘이게 무슨 소리야? 지금의 나는 소개하기 어렵다는 말인 거지?’
“민우 씨, 지금 당신 말은……. 내가 많이 모자란다는 거예요? 너무 모자라서 소개할 수가 없다? 그 말인 거죠. 지금?”
세아가 자신도 모르게 짜증을 내며 목소리를 날카롭게 세우고는 반문하였다.
“그런 말이 아니잖아. 내가 언제 그렇게 이야기했어!”
“그렇게 표현만 하지 않았지 당신 말이 그 말이죠. 정세아 너는 고매한 우리 집안사람들에게 소개하기에는 많이 모자라니까 준비해서 채워라. 지금 소개하기엔 너무 창피하다.”
점점 더 말을 덧붙여 비꼬는 세아의 말에 기분이 상했지만, 그녀의 말이 다 틀린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민우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세아의 말대로 그녀를 지금 아버지 차승조 회장에게 소개하기엔 많이 모자랐다.
그녀가 아니라 그 누구라도 대기업 총수 집안에 들어오려면 배워야 할 것들도, 익혀야 할 것도 많았다.
특히, 아버지와 본가 쪽 사람들을 생각하면 반드시 그리해야 했다.
어머니 주란의 반응만 보아도 집안의 반대가 눈에 선한데,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는 세아가 조금은 답답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민우는 지연이 난장판을 만들고 갔던 그날 밤 이후 더욱 불안해졌다.
지연이 언제 자신의 아버지에게 이 모든 걸 말할지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우선은 지연이와의 오해를 풀고, 합의이혼 한다는 식으로 내가 먼저 이야기를 전해야 할 텐데…….’
민우와 지연의 결혼을 추진한 것도 아버지 차 회장이었고, 며느리가 된 뒤로 지연을 예뻐했던 것도 차 회장이었기 때문에 지금 이 상황을 그대로 전하는 것은 무리였다.
‘그러게 왜 아버지는 원치도 않는 나를 은지연과 결혼시키셔서는. 그리고 은지연은 왜 또 그걸 부추겨서는. 하…….’
새삼 아버지와 지연에 대한 원망이 솟아올랐다.
만약 3년 전 그때, 지연과의 결혼을 확실하게 거절했다면 지금은 어떤 상황이었을까?
***
3년 전.
갑자기 본가에서 호출해 간 자리에서 차승조 회장이 민우에게 대뜸 말했다.
“네 안사람으로 생각해 놓은 사람이 있으니 지금 만나는 애는 정리하거라.”
이 말은, 의논이 아닌, 반드시 해야 한다는 명령이었다.
게다가 차승조 회장에게는 한 번도 말하지 않았던 세아의 존재에 대해 이미 알고 계신 것 같았다.
“아버지, 세아 아직 만나보시지도 않으셨잖아요. 정말 좋은 여자예요, 저희에게 기회를 주세요.”
“만날 필요가 없는데 내가 왜 그 애를 만나겠니. 한 달 줄 테니 정리하거라.”
“아버지 전 세아 없으면 못 살아요. 제가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네가 큰 그림을 그리지 않고 이렇게 생각 없이 사랑놀음 따위에 목멜 생각이라면, 나는 네 미래를 걱정하지 않으마.”
차 회장의 단호한 말투에는 이미 결론이 정해져 있었다.
“그런데 과연 네가, 네 힘만으로 근우나 재우를 누르고 올라갈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차 회장이 비웃는 듯한 표정으로 민우를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사실 이 자리, 은지연이라는 아이, 지금 말하는 혼처는 네 큰엄마가 재우를 엮어주고 싶어 하는 아주 좋은 혼처야.”
차 회장의 본처인 김지원 여사가 자신의 이복형과 엮어주고 싶어 한다는 그녀의 이름이 낯설지 않았다.
‘은 지연……. 이름이 낯설지 않은데……?’
“온유 제약은 너도 많이 들어보았을 거다. 계열사까지 아주 탄탄하고 시장성이 높은 회사지. 거기 은 회장을 내가 알게 되어 그 집 셋째와의 혼담을 추진한 게야. 나도 그 애를 몇 번 만났는데 아주 어여쁘고, 똑똑하더구나. 그 집에선 집안끼리 인연 맺는 것을 꺼리고 있었는데, 마침 그 집 셋째가 너를 잘 안다고…… 너라면 결혼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겠다는 대답을 주었더구나. 너와 같은 학교 선후배라는데.”
그제야 민우의 뇌리에 번뜩 떠오르는 이름이 있었다.
‘대학 때 나를 계속 따라다녔던 껌딱지 같던 은지연!’
민우도 그녀를 알고 있었다.
복학 후, 어느 순간부터 자신을 따라다닌다고 소문난 재벌 집 딸이라던 은 지연.
하지만 그때 민우는 세아에게 정신없이 빠져 있어 그녀에게는 일절 관심도 없었고, 오히려 그런 소문이 너무 귀찮을 따름이라 그녀가 어느 재벌 집 딸인지 일절 궁금하지 않았다.
그 소문을 들은 세아와 크게 다툰 적도 몇 번 있어 더는 분란을 만들고 싶지 않다는 생각만 했던 터였다.
그게 벌써 몇 년 전인데 그때부터 지금까지 이렇게 나를 피곤하게 하다니.
민우는 말로는 뱉지 못했지만, 이제는 생김새도 희미해서 거의 기억도 나지 않는 그녀가 너무나 짜증스러웠다.
“나는 사랑 따위의 사사로운 감정만 목을 매는 아들에게 이 회사를 맡길 생각은 전혀 없다. 하지만 네가 이 혼처를 승낙한다면 나도 다음 경영진 구도를 바꿔 볼 의향이 있으니 잘 생각해서 대답하거라.”
이 이야기는 현재 ‘차민우’란 이름이 차 회장의 머릿속 경영진 그림 안에 없다는 말의 방증이기도 했다.
그렇게 뼈 빠지게, 온 힘을 다해 일해도 아직 그의 노력을 인정하지 않는 아버지였다.
‘차근우’와 ‘차재우’.
본처의 자식이라는 것 말고는 뭐가 더 잘나고, 뭐가 그리 대단해서 그들은 당신의 그림 안에 있고 나는 없는 것인지.
어렸을 때부터 쌓였던 이복형제들에 대한 열등감이 뱃속 깊이 아래에서 올라오고 있었고, 입에서 욕지기가 터질 것 같아 민우는 입술을 꽉 오므렸다.
“…….”
“네가 말하는 사랑이란 건, 그저 뇌 속 호르몬의 이상일 뿐이야. 2~3년 지나면 없어지고 흐려지고, 어떨 때는 발목을 잡을 수 있는 감정이지.”
혀를 끌끌 차면서 민우를 쳐다보는 차 회장의 눈빛에는 한심하다는 표정이 가득했다.
“시간은 오래 주지 못한다. 다음 주에 확답을 다오. 너의 현명한 판단을 기대하마.”
자신이 할 말만을 남기고는 차 회장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겨진 민우는 숨쉬기가 어려울 정도로 격분하여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어째서 내가 장기 말이 되어 팔려가야 하는가!
어째서 이걸 잡지 않으면 인정받지 못하는가!
어째서 그 계집애는 아직도 나를 괴롭히는 건지!
하지만, 이렇게 분노와 화에 차 있었던 민우였지만, 결국 그의 선택은 은지연이었다.
평생 바라오던 그것.
차 회장에게 인정을 받고 다음 후계자가 되는 것. 명실공히 C&C 글로벌의 차기 회장이 되는 것.
그것을 위해서는 다른 선택은 있을 수 없었다.
차 회장은 입 밖에 낸 말, 특히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은 반드시 그렇게 하고야 말았다.
그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민우였다.
그렇다면 우선 은지연과의 결혼 후, 경영진에 이름을 올린 뒤 그녀와 헤어지면 되는 것이다.
경영진에 올라선 다음에는 자신의 능력을 보여 더는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하면 되는 것이었으니.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정세아. 그녀는 분명 나를 이해해 줄 것이리라 굳게 믿었었다.
하지만 현실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간단하지 않았다.
그때 은지연과의 결혼을 승낙하지 않았다면 자신은 경영진은커녕 어느 부서 만년 과장이나 차장으로 있었을지 몰랐다.
그리고, 막상 경영진에 이름을 올렸어도 너무나도 불안한 현실이었다.
이복형제들은 민우가 생각하는 것만큼 멍청하거나, 바보들이 아니었다.
그들 역시 어린 시절부터 경영인 수업에 필요한 모든 엘리트 코스를 차근차근 밟았고, 회사에서는 그 누구보다 치열하게 일하고 있었다.
차민우와 같은 꿈을 꾸고 있는 그들은, 차 회장의 뒤를 이어 C&C의 최고 경영자가 되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덤비고 있었다.
예상보다 훨씬 더 어렵고 복잡한 길이었다.
그래서 1년을 예상했던 지연과의 결혼을 더 붙잡고 있었던 것이기도 했다.
***
민우는 머리를 가로저으며 생각을 털어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아버지에게 세아를 소개하려면, 그녀를 좀 더 나아지게 만들어야 했다.
아버지가 그리 좋아하는 은지연 엇비슷하게라도.
“그래서 뭘 어쩌라는 거예요? 뭘 준비하라고요?”
날이 선 세아의 목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언제부터였지? 세아의 예쁘고 낭랑했던 목소리가 이렇게 날카롭게 변한 건?
항상 미소 짓고 아름다운, 나긋나긋하고, 민우가 하자는 건 모두 따르던 세아였는데.
최근 들어 그런 그녀를 볼 수 없다.
“우선 음식 좀 배워. 아버지가 음식 잘하는 거 좋아하셔. 내가 장소와 연락처 보내줄 테니. 너도 이름 들으면 알만한 셰프야. 일정 잡기 쉽지 않을 정도로 유명한 곳이니 가서 잘 배워봐.”
그러고는 민우가 자신의 앞에 놓여 있는 접시를 밀어냈다.
“이런 배달음식 좀 그만 사고. 난 원래 바로 한 밥 아니면 아침 안 먹어. 그리고 세아 너 음식에 너무 MSG를 많이 넣어서 입에 너무 짜.”
“뭐……뭐예요?”
대놓고 자신이 사 온 음식과 종종 하는 요리에 핀잔을 주는 민우를 마주하니 너무 억울하고 서러워져 세아의 얼굴이 빨개졌다.
여태껏 아무 말 없다가 이렇게 한 번에 핀잔을 주다니.
“평소에 아무 말 없다가 이렇게 면박 주면 어떻게 해요.”
“그래서 지금 말해주는 거잖아.”
민우가 심각한 얼굴로 말하자, 더 말하려는 듯 입을 열었던 세아가 입을 다물었다.
“이 기회에 어머니에게 가서 집안일 좀 배우든가. 그러면서 네가 잘하면 어머니와도 좀 더 가까워지지 않을까?”
‘지연이처럼’이라는 말은 목구멍 안으로 꿀꺽 삼켰다.
“어머니가 저 싫어하시는 거 당신이 알잖아요. 저번에 그런 꼴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와요?”
어느새 흥분한 세아가 자신도 모르게 민우를 노려보았다.
“알았어. 그럼 네가 혼자 잘 배워보든가.”
“사람 쓰면 되잖아요. 밥도, 청소도. 요즘에는 전문가가 더 잘해준단 말이에요.”
민우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청소는 그렇게 하든가 마음대로 해. 하지만 음식은 배워. 너도 우리 부모님에게 잘 보이고 싶다며? 그럼 뭔가 하나는 잘해야지. 부모님 앞에서도 그런 말 할 거야?”
민우는 자신이 세아를 위해 많은 것을 양보해주고 있다고 생각했다
‘세아, 네가 그렇다고 딱히 다른 일을 하는 것도 아니잖아? 그런데 뭘 못 하겠다는 거지?’
“나 음식에는 소질 없단 말이에요. 그리고 요리하려면 손도 거칠어지고 손톱도 다 망가질 텐데.”
세아의 투덜거림에 민우가 냉정하게 말했다.
“이건 너와 타협하려는 일이 아니야. 그냥 네가 따랐으면 해.”
‘이 집에서 나와 살려면’이라는 뒷말은 굳이 내뱉지 않은 민우였다.
세아는 이렇게 못되게 말하는 민우를 본 적이 없다.
‘나에게 절절매던 그 차민우는 어디 간 거야? 내 생각에 3년간 너무 힘들어 매일 눈물지었다는 그 사람은 어디 있냐고?’
따져 묻고 싶었지만, 왠지 지금은 적절한 시기가 아닌 것 같아 입을 다물어 버렸다.
“아무튼, 그런 줄 알아. 그리고 요리 말고 서너 가지 더 좀 배워야 할 텐데, 그건 차차 말해줄게. 우선 요리부터 배워. 나 이제 이런 배달음식은 더는 못 먹겠다. 한계야.”
그렇게 말하더니 수저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주스는 직접 짜서 내와. 기성품은 방부제 냄새가 너무 나.”
그렇게 말하더니 자신 앞에 있는 컵을 들고 가, 담겨 있던 주스를 싱크대에 부어버렸다.
당황한 세아는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서로의 눈에 수십 겹 두껍게 씌었던 콩깍지 한 꺼풀이 벗겨진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