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유유상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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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유유상종
2022.10.20.
고작 몇 년 전에 에메랄드 클럽에 들어온 주란과 고진아 같은 사람들은 잘 모르는 게 있었다.
이 클럽은 대학교 선후배 3인, C&C 김지원과 온유 제약 김고은, 그리고 C 바이오의 구자연이 약 15년 전쯤 만든 커뮤니티 클럽이었다.
에메랄드 클럽은 본래 노블레스 오블리주(사회 고위층 인사에게 요구되는 높은 수준의 도덕적 의무)에 초점을 맞춰 만들었었으나, 많은 사람이 모이게 되면서 처음의 그 본질이 점점 흐려지게 되었다.
그러면서 가장 먼저 김고은 여사가 클럽에서 빠지고, 남은 둘도 서서히 참여를 안 하게 된 것이었다.
본질이 달라진 에메랄드 클럽은 다른 의미에서 승승장구하며 상류층에 합류하려면 반드시 거쳐 가야 하는 관문처럼 부잣집 사모님들에게 전파되었다.
그중 두 명의 클럽 창립자 김지원과 김고은이 등장하자 초창기 회원들이 들썩였다.
창립 멤버가 아니더라도, C&C의 김지원과 온유 제약 김고은이라는 네임 밸류가 두 사람을 빛나게 했다.
주란은 두 사람을 보고는 순식간에 움직임을 멈추고 얼어붙었다.
누가 봐도 그녀가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면서 가장 껄끄러워하는 존재 김지원과 얼마 전까지 사돈이라 불렀던 온유 제약 김고은이 함께 오다니.
지금 이곳에서 가장 만나기 싫은 사람들이었다.
‘김고은 저 여자는 지연이 계집애에게 다 듣고 온 걸까?’
그 생각을 하니 주란의 입에 쓴 물이 올라왔다.
그런데 차분히 생각해 보면, 김고은이나 은 회장이 지연에게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면 차승조 회장이 이리 잠잠할 리 없었다.
‘아직 내용을 모르는 거야! 들은 게 없는 게지. 은지연 고 계집애가 아직 제 부모에게는 뭐라 말 못 한 거겠지? 어디 말하기가 쉽겠어? 헤어지네 마네 하면서?’
이런 생각이 드니 다시 얼굴이 밝아졌다.
은지연을 다시 만나기 전에 먼저 김고은을 좀 구워삶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 엄마라면 껌뻑 죽는 아이니까 엄마 말은 좀 듣겠지.’
주란은 지원과 고은을 바라보며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들었다.
“여사님~ 아니지, 김지원 사장님. 오랜만이에요.”
“어머 김고은 여사님까지! 이렇게 원년 멤버 모이나요?”
“왜 이렇게 안 오셨어요, 두 분? 그동안 개나 소나 아무나 들어와서 에메랄드 클럽 이름이 무색했는데, 이제야 좀 사교계 클럽 같네요.”
강주란 들으라는 듯이 이죽거리며 마지막 말을 한 것은 강주란 무리를 항상 못마땅해 하던 T전자 계미숙 여사였다.
주란이 클럽에 거액의 기부금을 주고 들어와 요직을 맡았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돌았던지라, 그녀를 회원으로 받아들이는 걸 마지막까지 반대했던 사람이었다.
주란이 살기등등하게 노려보았으나 아무도 상관하지 않았다.
“주란 언니, 언니한테는 형님이신데 인사 안 해요?”
노려보기만 하는 주란에게 고진아가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물어보았다.
생글생글 웃으며 은근슬쩍 비위를 살살 긁는 고진아의 말에 주란이 소리를 지르려다 보는 눈이 많아 꾹 참았다.
김지원이 홀에 들어오며 주란과 눈이 마주쳤지만, 그녀는 아는 척 없이 눈을 돌려 자신 주변에 모인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내가 너 따위에게 인사를 할 필요가 무엇이겠니. 넌 그저 내 남편에게 나 몰래 찾아 들어가 알을 깐 바퀴벌레 같은 것을.”
지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괜스레 제 발 저린 주란의 자격지심이 환청을 만들어 내 머릿속에 이상한 소리가 울렸다.
지원과 고은이 사람들의 환대를 받으며 홀 중앙 쪽의 자리에 앉았다.
아직 정식 모임이 시작되려면 30분 정도 있어야 했기 때문에 주란은 눈 딱 감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함께 있는 김지원은 싫었지만, 김고은에게는 빨리 이야기를 해봐야 했다.
지원과 고은이 주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주란이 살짝이 고은의 근처로 가 섰다.
그녀의 눈빛이 느껴졌는지 고은이 대화를 멈추고 고개를 들어 주란을 쳐다보았다.
“사돈, 오랜만에 보네요. 그간 잘 지내셨지요?”
혹시라도 사람들이 들을세라, 주란은 목소리를 죽여 고은에게 말을 걸었다.
드문드문이었지만, 가끔 얼굴을 보게 되는 자리에서 절대로 먼저 말을 건 적이 없는 주란이었다.
항상 지연을 걱정하는 고은이 지연 모르게 주란에게 고가의 선물을 주며, 막내딸 좀 어여삐 보아달라고 부탁하기만 했을 뿐이었다.
딸 보낸 엄마 마음에 딸을 잘 봐주기를 바랐고, 또 한편으로는 주란이 얼마나 기가 세고 우악스러운지 감이 왔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고은이 주란을 바라보았지만, 대답하지는 않았다.
주란은 짜증이 났지만 한번 꾹 참고 다시 한번 이야기하였다.
“사돈, 따로 급히 논의할 일이 있는데 지금 시간 좀 내주시지요.”
그 말에 고은이 피식 웃었다.
“저희가요, 강주란 여사님?”
고은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많은 사람이 두 사람을 주시하고 있었던지라 그녀의 대답을 많은 사람이 들었다.
사돈 사이에 나올만한 대답이 아니었다.
갑자기 홀에 정적이 흘렀다.
“흠흠……. 그렇지요. 저희 이야기를 좀 나눠야 하지 않겠어요? 뭔가 들으신 게 있으신 것 같은데, 여기는 좀 그렇고 밖에 좀 나가 이야기를 하는 게 좋겠네요.”
주란이 목소리를 더욱 낮춰 작게 이야기했다.
“굳이 나갈 필요가 있을까요? 전 여기가 좋은데요? 강주란 여사님. 말씀해 보세요.”
홀에 있는 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눈들이 둘을 쳐다보았다.
“사돈……. 그러지 말고…….”
“사돈이라니요, 여사님.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벌겋게 달아오른 주란의 얼굴에 땀이 흘러내렸다.
‘이 여편네가 자기 딸내미에게 무슨 말을 듣고 왔길래 이렇게 사람 많은 데서 당당해? 혹여나 자기 딸내미한테 민우랑 사이 벌어진 거 들었다고 쳐도, 그게 이렇게 사람 많은 데서 크게 말할 일이야? 자기랑 딸내미 얼굴에 똥칠하는 건데?’
그때였다.
김지원이 자리에서 일어서 손짓하자, 곧 스태프 한 명이 마이크를 가져다주었다.
“여러분, 오랜만에 만나서 반갑습니다. 제가 없던 사이 클럽 규모도 커지고 정말 다양한 분들이 가입하셨네요.”
지원은 전체적으로 둘러보더니 말을 이었다.
“정식 프로그램 시작 전에 새로 클럽에 가입하게 되실 분이 있어서 짧게나마 소개하려고 합니다. 제가 특별히 초대하였으니, 잘 기억해 주시고 나중에 클럽 룰이나 여러 가지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이 웅성웅성했다.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길래 C&C 김지원이 직접 데려와 소개까지 하는지 모두 너무 궁금해했다.
“저기 마침 들어오네요.”
모든 사람의 이목이 홀 입구를 향하였다.
홀에 들어온 것은 정세아였다.
***
김고은이 김지원에게 연락한 것은 며칠 전이었다.
둘은 몇 년 전까지 꽤 가까운 사이였지만, 지연과 민우가 결혼하면서, 사돈이기도 하면서 사돈이 아닌 이상한 관계가 되며 서로 연락이 뜸해졌었다.
특히 김지원이 자신의 둘째 아들과 지연을 엮어주고 싶어 했던 것이 흐지부지되면서 더욱 어색해졌었다.
하지만 어찌하리, 결혼 당사자의 뜻이었던 것을.
하지만 대학 때부터 오랜 시간 쌓인 서로에 대한 신뢰 관계가 꽤 두터웠던지라, 고은의 연락에 지원이 반가워했다.
“지원 언니, 오랜만이에요. 지연이에게 가끔이지만 잘 계시다고 들었어요.”
“그러게, 오랜만이네. 나도 바빠서 연락을 통 못 했어. 잘 있니?”
“사실 언니에게 도움을 구할 일이 생겨서 연락했어요.”
그렇게 운을 떼며 고은이 간략하게 지연과 민우 사이를 이야기하더니, 도움을 청했다.
“언니, 강주란과 차민우는 우리 딸 이렇게 만들고는 또 다른 피해자를 만들 거예요. 그 정세아라는 아이가 강주란 눈에 찰 리 없어요. 분명 또 어느 집 여식을 또 찾을 거라고요. 나, 그 꼴을 못 보겠어요.”
“그래, 강주란 눈에 그 세아라는 애가 충분할 리 없지.”
“누군가 또 피해자가 되는 것도 싫고, 차민우가 여자 잘 잡아서 친정 덕 보는 것도 못 보겠어요. 그 여자가 그렇게 좋아 죽겠다고 우리 딸 이렇게 헌신짝처럼 취급했으니, 천년만년 그 여자랑 잘 붙어살게 해야죠.”
“그래서 내가 뭘 도와주면 되겠니?”
지원이 가만히 듣다가 물었다.
“다른 건 없어요. 언니가 세아라는 여자 에메랄드 모임 때 불러서 소개 좀 해주세요.”
“그거면 되는 거야?”
“그거면 돼요.”
“그런데 그렇게 되면 사람들이 네 딸과 민우 헤어진 거, 다 알게 될 텐데 그건 괜찮고?”
“어차피 얼마 안 있으면 다 알게 될 거예요. 어쩌면 이미 알 사람은 다 알지도 몰라요. 차민우 그 자식이 그 세아라는 여자와 온갖 곳을 다 다니고 있다니……. 이미 많이들 봤을 거예요. 지연이는 이런 거 신경도 안 쓸 거예요. 어쩌면 걔는 이쪽 세계 사람들은 다시는 쳐다보고 싶지 않아 할지도 몰라요. 이렇게 알려져서 지연이에게 새로운 인연 찾아오면 차라리 그게 나아요.”
지원으로서는 큰일이 아니었다.
평소 주란의 도 넘은 행동들이 꼴 보기 싫을 때도 많았지만, 바쁘기도 하고 신경을 쓰고 싶지 않아 그냥 내버려 두었는데, 이런 작은 행동으로 주란의 얼굴에 금을 낸다면, 그건 또 그 나름대로 고소하기도 할 터였다.
“알았어, 고은아. 내가 세아라는 애 찾아내서 꼭 나오도록 할게.”
곧 정세아의 연락처를 알아낸 지원은 바로 그녀에게 연락했다.
-민우 본가, 김지원이에요.
세아도 민우에게 본가와 김지원에 대해 몇 번 들은 적이 있었다.
“안녕하세요, 사모님!”
세아가 지원이 앞에 있는 것도 아닌데 자신도 모르게 통화를 하며 허리 굽혀 인사했다.
김지원에게는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고, 이 사람에게 잘 보여야 한다는 촉이 왔다.
C&C 본가 안주인에다 계열사 사장님이 아닌가! 주란과는 급이 달랐다.
-내가 사교계에 세아 씨를 민우 약혼자로 소개를 좀 하려고 하는데 시간 좀 내주겠어요?
이 말에 정세아의 얼굴이 환해졌다.
공식적인 자리에서 소개한다니, 그동안 얼마나 바라왔던 꿈같은 소식인가!
“네, 사모님! 시간과 장소만 알려주세요. 맞춰서 가겠습니다.”
***
“여기 소개하지요, 차승조 회장님의 셋째 아들, 차민우 군 어머니이신 강주란 씨의 새로운 며느님 되실 ‘정세아’ 씨입니다. 모두 환영해 주세요.”
이렇게 소개하고는 김지원이 박수를 쳤다.
조용했던 홀에 더욱 싸늘한 정적이 흘렀다.
세아는 이게 무슨 상황인가 어리둥절하면서도, 소문으로만 들어봤던 최상류층 사교계에 발을 들이고, 거기에 실세로 보이는 김지원의 소개를 받으니 왠지 모르게 뿌듯함을 느꼈다.
소개한 말을 자세히 들으면 김지원이 자신과는 명확히 선을 그었다는 것을 알았을 텐데, 그런 뉘앙스 따위 전혀 느끼지도 못했다.
“안녕하세요. 정세아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뭐든 열심히 할게요.”
세아가 허리를 깊게 숙여 인사했다.
그 모습을 보며 김지원과 김고은은 어이없다는 듯 웃었고, 강주란의 얼굴은 더 하얘질 수 없을 정도로 하얗게 질려갔다.
그리고 근처에 앉아 있던 고진아는 ‘풋’하고 마시던 물을 뱉으며 웃어댔다.
고은이 곁에 서 있는 주란을 지나쳐 정세아에게 다가갔다.
“김고은입니다. 차민우 씨와 결혼을 앞두고 있고 지금 이미 함께 살고 있다고요?”
고은이 누구인지 알 리 없는 세아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네, 여사님. 같이 산지 반년 다 되어 갑니다. 얼마 안 있으면 식 올릴 것 같아요.”
세아가 자신의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계획을 술술 이야기하였다.
자신의 딸과 완전히 헤어지기도 전에, 사위였던 사람과 살고 있었다는 여자를 마주 보며 고은이 뺨을 올려치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고은은 세아의 손을 잡아끌더니 근처에 서 있는 주란의 곁으로 데리고 갔다.
그러고는 세아의 손에 주란의 손까지 함께 잡아서 두 사람의 손을 억지로 포갰다.
주란이 손을 빼려고 했으나 고은에게서 어디서 이런 힘이 났는지 포갠 두 사람의 손을 더욱 꽉 잡았다
“어쩌면 시어머니와 이렇게 똑같은 며느리가 들어왔을까요. 유유상종이라는 말이 딱 맞네요.”
고은이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나지막이 말했다.
“정세아 씨, 차민우 씨와 백년해로하시고. 두 분……, 벽에 똥칠할 때까지 함께 하길 바랄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