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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멋진 남자가 상시 대기 중 (26/85)


26. 멋진 남자가 상시 대기 중
2022.10.27.



 


“아녀자가? 지금 그렇게 말씀하신 거 맞죠? 제가 잘못 들은 게 아니죠, 아버님?”

너무나 어이없어 헛웃음을 짓던 지연의 눈빛이 점점 불타올랐다.


“아버님이 말씀하시는 아녀자는 도대체 뭔가요? 자신은 원하지 않아도 남편과 가족을 위해 집에서 온종일 요리며 청소, 그리고 집안일을 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건가요? 아내를 두고 밖에서 도는 남자를 이해하고 눈감아 주고, 그런 뒤에도 그 남자가 밖에서 돌다 돌아오면 모멸감을 삭이며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살아가는 거. 아버님이 말하는 아녀자라면 그래야 한다는 말인가요?”

“그게 어떻다는 게냐? 주란이도, 그리고 세아라는 그 계집애도 다 그렇게나 원하고 바라던 삶이야! 이 정글 같은 사회에서 남편이 힘들게 헤쳐나가고 살아남아 풍족하게 살 수 있도록 만들어주고, 작은 일 한두 가지 말고는 큰 고민 없이 살아갈 수 있게 해주잖느냐. 그렇게 살도록 남편이 힘들게 이뤄주었다면 가끔 일어날 수 있는 사사로운 잘못이나 실수는 눈감아 주는 것이 인지상정이지.”

차승조 회장은 이죽거리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리고 너희가 지금 애가 없어서 그래. 애가 생긴다면 민우도 더는 밖으로 나돌지 않고 정착할 거고 너도 아기 보느라 다른 생각 안 들 거다.”

“하! 아버님! 아버님은 애가 없으셔서 강주란 여사를 만나셨나요? 그래서 민우 씨가 태어난 건가요? 전…… 이제는 부당함을 알면서 살 수 없습니다. 저를 기만하는 남편과 살 수 없다고요.”

지연은 자신도 모르게 부들부들 떨려오는 몸을 다잡으려 두 손을 꽉 움켜쥐었다.

손바닥이 파고든 손톱에 아파졌지만 그런 걸 신경 쓸 틈은 없었다.


“지난 3년간, 차민우와 강주란 여사에게 정신적 학대를 받으면서도 저를 어여뻐하시는 아버님에게 감사함을 느끼곤 했습니다. 이 집에서 아버님만은 다르구나 하면서요. 그런데 지나고 보니, 아버님은 많은 순간 함께 계셨지만 좋은 말은 해주시면서도 그들의 행동을 제지하지는 않고 내버려 두었다는 걸 깨닫게 되었어요. 가끔은 아닌 척 부추기실 때가 있었던 것도요.”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제야 알겠더라고요. 아……. 어쩌면 그 둘을 통해 저를 바꿔보려고 하셨던 건 아닐까. 사회생활하겠다고 밖으로 나도는 며느리를, 본인의 입이 아닌 다른 사람들을 통해 말 잘 듣는 여자로, 남편 내조나 잘하는 여자로, 얌전하고 집에서 기다리는 여자로, 남편의 외도에도 꾹 참고 사는 여자로.”

“하!”

길게 언급할 가치도 없다는 듯 한쪽 눈썹을 추켜세우며 비웃던 차 회장의 얼굴이 점점 더 일그러졌다.


“앞에서는 저의 사회생활을 응원하는 좋은 시아버지처럼 행동하시면서 저희 부모님께는 딸에게 잘해주는 사돈으로 보이고요. 그런데 거기에 더해 이런 끔찍한 생각을 하고 계셨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너의 머릿속에서 허황한 이야기를 지어내어 나에게 덮어씌운다면, 난 더는 할 말이 없구나.”

“네, 저 역시도 더는 드릴 말씀 없습니다. 오늘 마지막으로 예의를 갖춰 저희가 이제 끝났다는 말씀만 드리고 가려고 했습니다.”

“끝났다……라. 누구 맘대로! 내가 널 순순히 놓아줄 것 같으냐!”

살기등등한 차 회장의 집요한 눈빛을 마주한 지연은 순간적으로 숨을 들이켰다.

그간 차 회장에게서 한 번도 저런 매서운 눈빛을 본 적이 없었다.

그의 모습에 순간적으로 공포감마저 일었지만, 저 눈빛이 향하는 곳은 자신이 아닌 온유라는 뒷배경과 비즈니스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두려움을 떨치려고 애썼다.


“아버님, 아니 차승조 회장님. 회장님께서 저를 놓아주고 말고 할 것이 없습니다. 이건 제 의지입니다.”

“기업 간의 정략결혼이라는 게 얼마나 복잡하게 엮여 있는지 무지한 네가 몰라서 이렇게 쉽게 말하는 게다. 너희 집에서도 쉽게 이 결혼을 놓지 못할 것이야.”

불 보듯 뻔하다는 듯, 차 회장이 입술을 얇게 오므린 채 비웃었다.


“다행히도, 저의 부모님은 생각이 다르신 것 같습니다. 저희의 헤어짐에 적극적으로 찬성하시고 오히려 이제야 헤어지는 것에 안타까워하셨지요. 물론 저와 차민우의 헤어짐이 당장 온유 제약과 C&C 글로벌의 비즈니스를 무너트리는 계기가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말을 끝맺지 않고 숨을 고르는 지연을 차승조가 노려보았다.


“차민우 덕분에 저희는 법적으로 아무런 사이도 아니었습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니 정말 다행스럽게도 말이죠.”

“네가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게야! 알아듣게 얘기를 해!”

“자세한 속 사정은 이제는 남인 저보다는 아드님에게 들으시는 것이 좋지 않으시겠어요, 회장님?”

굳이 더 할 말도 없어 지연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이 일로 회사에서 제게 불이익을 주신다거나 관여를 하신다면, 저는 가만있지 않을 것입니다. 저 역시 이 회사에서 길게 머물지는 않을 생각이니 잠시 놔두시기를 부탁드리죠. 제가 가장 싫어하는 집안 뒷배경을 이용하는 일이 부디 생기지 않길 바랍니다.”

말을 마친 지연이 차 회장에게 깊게 인사하고는 자리를 벗어났다.

더욱 당돌하고 싶었지만 그러기가 쉽지 않았고, 지금도 손이 덜덜 떨려 꼭 부여잡고 있었다.

지연의 뒤로 방에서 와장창 식기들이 깨지는 소리가 들렸지만, 지연은 상관하지 않았다.

회사 건물에 도착한 지연은 마음을 진정하기 어려워 바로 건물 옥상 정원으로 갔다.

점심시간이 끝나서 그런지, 사람이 모두 빠져나간 옥상 정원은 조용했다.

그래도 혹시나, 누군가에게 노출되기 싫어 예전에 주연과 함께 찾아낸 비밀의 공간이라 부르는 비상구 입구 뒤쪽 구석진 곳으로 갔다.

평소 사람들이 거의 다니지 않는 비상구 뒤쪽이라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나오면 보이지가 않았다.

사람들이 잘 모르는지 이곳에 오면 항상 아무도 없었다.


“나중에 혹시라도 상사에게 혼나거나 동료랑 다퉈서 속상할 때 요기 와서 울면 딱 맞겠는데요 과장님? 요기 소문나지 않게 우리 둘만 알자고요!”

주연이 우스갯소리로 했던 말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둘만의 비밀 공간에 누군가 이미 와 있었다.

벤치에 앉아 옥상에서 보이는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는 사람은, 강현이었다.

인생은 타이밍이라고 했던가.

어째서 저 사람은 나의 마음이 이렇게 약해져 있을 때 항상 그곳에 있는지.

지연의 시선을 느꼈는지 강현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지연 씨?”

반가운 얼굴로 지연을 불렀으나, 곧 지연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강현의 얼굴이 굳었다.

아무렇지 않을 줄 알았는데 강현의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자 갑자기 울컥하더니 눈물이 줄줄 흘렀다.


‘3년이라는 시간이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구나. 이런 사람들 속에서 내가 살았구나.’

아닐 거라고 믿고 싶었던 단 한 사람 차승조 회장마저, 그 속내를 알게 되니 미세하게 남아 있던 실낱같은 무언가가 뚝 끊어져 완전히 없어진 느낌이었다.

‘나의 지난 3년은 잘못되지만은 않았다.’라고 믿고 싶었는데…….

화가 나고, 억울하고, 또 슬프기도 한……. 다양한 감정들이 한꺼번에 물밀 듯이 몰아쳤다.

가족 앞에서도 울지 않고 꿋꿋이 버텼던 지연이었는데, 강현을 마주하자 눈물이 넘쳐흘렀다.

그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다가와 그녀를 끌어당겨 가만히 안아주었다.

그러자 지연은 그 따뜻함에 더욱 어리광을 부리듯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괜찮아요……. 괜찮아요.”

강현이 그녀를 더욱 꼭 안아주며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지연은 결국 어깨를 떨며 흐끅댔다.

한참을 울다 울음이 잦아들자 지연은 퍼뜩 정신이 들었다.


“죄송해요, 본부장님.”

지연이 강현의 품에서 떨어지려고 하자 강현이 힘주어 더 세게 안았다.


“슬픔은 참으면 안 돼요. 그냥 잠시라도 아무 생각 하지 말고 울어야 할 때가 있는 거예요.”

그 말을 듣자 다시 눈물이 핑 돌았다.

이 사람은 어쩌면 이렇게 자상한 거지.


“얼마나 좋아요. 이렇게 기대어 울 수 있는 멋진 남자가 상시 대기 중인데.”

강현이 미소 짓고는 자신의 어깨를 툭툭 치며 지연을 바라보았다.


“고맙습니다, 본부장님.”

지연은 회사에서 혹시라도 잘못해서 강현의 이름을 부를까 봐 조심했다.


“제가 고마운데요. 이렇게 지연 씨 안아보기도 하고. 좀 더 안겨 있으면 안 돼요? 내가 부탁하고 싶네.”

강현이 괜스레 장난스럽게 이야기하며 다시 지연을 품에 안았다.


 
지연이 울어서 퉁퉁 부은 눈을 하고는 쿡쿡 웃었다.


“울다 웃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 텐데.”

“아 뭐예요. 완전 구식 농담을!”

그러면서도 그 구식 농담에 웃는 지연이었다.

강현은 벤치에 지연을 앉혔다.


“지금 바로 가면 사람들이 지연 씨 운 거 다 알 거예요. 그러니 여기서 잠시 진정하고 가요. 눈이……. 좀 많이 부었네요.”

“그래요? 아 큰일이네. 티가 나면 안 되는데.”

“예쁜 개구리 같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

지연은 강현의 말을 듣고는 바로 핸드폰으로 얼굴을 살펴보았다.

정말 개구리눈처럼 심하게 부어 있었다.


“본부장님 너무하네……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정말 두 눈이 두꺼비 같네요.”

강현이 가지고 있던 시원한 캔커피를 건넸다.


“눈에 좀 대고 있어요. 마셔도 되고.”

“감사합니다.”

지연은 캔커피를 받고는 자신도 모르게 멍하니 바깥 풍경을 둘러보았다.

강현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가만히 그녀의 곁에 앉아 있었다.


“고마워요. 아무것도 안 물어봐 줘서.”

“그건 지연 씨의 권리예요. 말하고 싶을 때 하는 것, 말하고 싶지 않을 때 안 하는 것. 그 어느 것도 부담을 느껴 말하지 말아요.”

지연은 오히려 그 말에, 말문을 열었다.


“결혼 기간, 그 가족 중에서 저에게 유일하게 잘해주셨던 분이 계셨어요. 힘든 그 시간 동안 그분만이 저에게 친절하셨죠. 그런데 그 친절이 저를 위한 게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지연이 말하면서 다시 훌쩍이자 강현이 손을 들어 지연의 등을 토닥였다.


“집안이라든가, 여러 가지 복잡한 것들을 위한 가식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는데……. 그게 아닐 거라고 계속 믿지 못하다가, 조금 전에 확인받고 왔어요. 그랬더니 남편이었던 사람이 잘못했을 때보다 더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더라고요. 이미 그 집과는 모든 게 다 끝났다고 생각했는데도요.”

“배신감이 들어서 그런 걸 겁니다. 마음속에 좋은 사람으로 크게 자리 잡았는데 알고 보니 그 어떤 사람보다도 더 나쁜 놈이라는 걸 알게 되었을 때의 배신감. 지연 씨, 울만 해요. 충분히 슬퍼해도 될만한 상황이에요.”

지연이 다시 엉엉 울었다. 꼭 수도꼭지가 고장 나 마구 물이 새는 것 같았다.


“흐끅…… 좋은…… 단 하나의 좋은 사람이었는데. 흑흑.”

강현은 마치 어린아이같이 우는 지연이 걱정되어 등을 한참 동안 다독여주었다.


“오늘은 재택근무를 하도록 해요. 필요한 건 온라인 회의로 하고. 노트북은 내가 챙겨서 차로 가져다줄 테니 바로 차로 가요.”

지연은 아니라고 하고 싶었지만, 지금 이대로 사무실로 가면 분명 사람들이 자신을 더 신경 쓰느라 피해를 줄 것 같았다.


“감사합니다, 본부장님. 다음부터는 개인적인 일로 물의를 일으키는 일 없도록 할게요. 다시는.”

“그런 걱정 하지 말아요. 그럼 10분 뒤에 지연 씨 차에서 만나도록 하죠.”

“감사합니다.”

강현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연은 자신이 왜 우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미 다 끝난 인연들에 뭐가 미련이 남았다고 이리 눈물이 나는 건지.

몇 번 크게 숨을 들이켰다가 내쉬고는 지연도 곧 자리에서 일어나 주차장으로 향했다.

10분 뒤 강현이 지연의 차로 지연의 노트북을 챙겨다 주었다.

주연 대리가 많이 걱정한다는 말과 함께.


“오늘 몸이 많이 안 좋아 보여 재택으로 돌린다고 했더니 걱정되었나 봅니다.”

“주연 대리님에게는 이따 제가 따로 연락할게요.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본부장님.”

지연이 인사를 하자 강현이 지연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다 잘 될 거예요. 그럼 조심히 들어가고 이따 온라인에서 만나도록 하죠.”

“네.”

지연이 차를 몰고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모습을 보며 강현은 잠시간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멀찍이 서서 그들을 이글거리는 눈으로 노려보는 또 하나의 사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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